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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수도회] 선(善)을 부르고 하느님을 반사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요한 2,29―3,6
† 복음 요한 1,29-34
★ 요한 1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강조한다(제1독서).
★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까지도 없애시니 하느님의
사람이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셨다고 고백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리고
보라!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하느님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세상에 증언하며 드러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여 지배하고 강제하는 것은 권력이고
자본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일제 식민 통치와 우리의 군부 독재 시절은
무력으로 지배한 강제의 역사였다. 세상이 반대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한다. 특근이나 휴일 잔업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일 많이 하고 돈 많이 받겠다.’고 나선다. 정치 사회적인 비리나 비정한
문제들은 귀찮다며 외면하고, 협박하지 않아도 부자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 해결의 열쇠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를 행복의
전령이자 문제 해결사로 숭앙하는 데는 보수와 진보도 종교도 학문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모든 정치 공약이, 모든 희망 사항이 경제고 민생밖에
없다. 자신이 이미 물신 우상의 광신도가 되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돈과 정부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돈과 정부를 만들 때는 ‘국리민복’
(國利民福)이라는 말처럼 국익으로 민복을 이루어 고루 잘 살아 보자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돈과 권력이 고통과 눈물을
만들어 내는 원죄 장치가 되고 말았다. 전쟁, 폭력, 핵무기, 원자력 발전소,
재개발, 공공 부채 등 ‘세상의 죄’를 끊임없이 낳는다. 돈의 소유욕과
권력의 지배욕은 자신을 지키려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생리 구조를 가졌으니 어리석은 물건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진정한 문제 해결은 하느님의 사랑을 복구하는 십자가의
헌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외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정화하시고 죄를
소멸시키시고자 제물로 어린양이나 송아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직접
바치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시라고 고백한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월3일 토요일(뉴튼수도원 54일째) 주님 공현 전 토요일
1요한2,29-3,6 요한1,29-34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오늘 1독서 중 다음 말씀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3,2ㄱ).
바로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칭호가 참 영예롭습니다.
이 말마디가 우리 믿는 이들에 대한 정의요, 존엄한 품위의 신원임을
입증합니다. 예전 학장님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호를 '다운'이라
정했다며 역설한 말씀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에 대비되어 역시 수 십 년전 신학교 시절, 교수님의 열정적 강의 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해야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공감했던 말씀이라 강론에도 수차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어제 고위직에
있는 분이 년초를 맞이하여 직원들을 향해 훈계했다는 기사를 읽는 중,
몇몇 한자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물론 지도자에 대한 수하 사람들의 자세를 빗댄 용어지만
우리의 중심에 모신 하느님께 대한 자세와도 그대로 통합니다.
'우리는 여러 불충(不忠)한 일들이 있었다.‘
'이심(異心)을 품어서는 안 된다.‘ '충(忠)이 무엇인가. 한자로 쓰면
중심(中心)"이다. 우리는 충성(忠誠)해야 한다.‘
'파부침주(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히며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왕조시대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용어라 영 찜찜하지만
이 말씀들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경우에 대입하면 그대로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가 충성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이며, 하느님과
우상을 섬기는 즉, 두 마음을 품는 불충한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장한 느낌도 들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자세입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마디들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 카시아노가 강조한 수도생활의 궁극 목표도 '마음의 순수'였습니다.
하여 수도자들의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궁극 목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자비와 지혜입니다. 주님 역시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며 이심(二心)이 아닌 일심
(一心)을 강조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전심전력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아파도 마음만 갈리지 않고 하느님만 향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갈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잃는 일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 자체가 축복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마음의 순수만은 잃어선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들이 지녀야할 자세로 마음의
순결을 강조합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우리를
순결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밝은 눈'으로 제대로 보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편견없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아야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산상수훈 중 진복팔단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복음의 요한이 좋은 모범입니다.
광야의 수련을 통해 마음의 순수를 획득한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본 순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환호하는 '순수한 영혼의 사람' 요한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신는
것을 보았다."(요한1,32).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4).
오늘 복음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보았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셋째,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도, 밝은 마음의 눈도 은총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마음의 순결이요 눈도 밝아 집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3,1ㄱ).
요한은 우리 모두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저절로 위로와 치유입니다.
계속되는 요한을 통한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입니다."(1요한3,5-6).
늘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무죄한 삶에 몸과 마음의 일치요, 또 주님을 뵙고
알 수 있습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깨달아 아는 하느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읽은 '관념운동학'을 소개합니다.
-관념운동학은 인체를 인식하고 움직이는데 있어 심상(Imagery)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심상을 이용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환자들을
도움으로써 정신적인 이미지(심상)가 실제 신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방식의 핵심개념은 운동은 힘이 아니라 인식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은 매 순간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충전된다. 내 몸은 점점 새롭게 되기와 재생의 구현체가
되어간다. 이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한다.
우리가 현재 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의 실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사멸하고 탄생하는 세포들이 만들어낸 한 장의 사진과 같다.
수 없이 변해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가는 실질적인 내 몸의 변화를 일으킨다.
중한 병의 회복뿐만 아니라 좋은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긍정적인 인식의 힘'은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 할 수다.-
마음이 몸을 치유합니다. '긍정적 인식의 힘'이 상징하는바 은총입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일어나는 효과에 대한 증거로 봐도
무방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주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인식하며 수행하는 성체성사, 성무일도, 성서독서
(렉시오 디비나), 성체조배, 향심기도 및 제반 묵상, 명상기도가
목표하는바도 이런 집중적 하느님 현존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련을 전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 '밝은 눈', '주님 안에 머무름'의 수련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안에 머무르는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며 마음의 순결을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선(善)을 부르고 하느님을 반사하는 삶/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5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
선(善)을 부르고 하느님을 반사하는 삶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저 낮은 곳에서 요한의 외침이 따뜻한 난로처럼
울려오는 듯하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와 그 죄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없애려 오셨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었고, 죄 없는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영혼의 어둠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덕분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드려야 한다.
구세주요 선(善)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악을 없애기 위한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뿌리를 완전하게 없애고 갈라진 틈을 온전히
회복하여 창조의 상태가 되도록 하는 재창조의 계기이다. 우리 삶의
속살은 '무엇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와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한계성을 벗어나려고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속살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새로움과 본질로 돌아가려면 애착과 욕망을 내려놓고 순수본질에서
멀어진 자신에게서 어둠과 속박과 죄를 거두어주시는 예수님을 온
인격으로 만나야만 한다. 물질을 접하면서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는
고귀한 인간존재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리고 천박한 물질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그분의 눈으로 보면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로 변형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에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될 신약의 ‘해방절 양’의
상징(19,36; 탈출 12,11), 메시아로서 당할 수난을 뜻하는 '야훼의
고통받는 종'(이사 52,13-53,12) 표상도 내포되어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호칭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거룩한
십자가상 사건의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기워 갚는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저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은 신비스런
사건으로만 볼 수 없다. 예수님의 오심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희생의
절정을 보여준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사랑행위의 결과 아닌 것이 없고, 다른 이들의 희생과 도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내 삶의 존재이유와 목적은 나의 성공이나 이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죽음을 거슬러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조건 없는 내어줌’과
십자가의 희생이다. 우리도 오직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로 내어주는 공유와
나눔, 생명을 키워가기 위한 희생을 거룩한 습관으로 삼고 살아가자!
요한은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1,31). 그러나 그는
계시를 통해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의 그 깊은 뜻을 미리 알려주었고,
성령으로 가득 찬 분(3,34)으로 알아보았다(1,34). 그는 구세주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1,31),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였다(1,34).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통한 증거 소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증거는 내가 지닌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증거의 삶이란 영이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내
안에 모셔들여 내 안에 오신 그분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요한처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오늘의 어린양이 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반사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간직해야
2014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어떤 분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고 합니다.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지요.
상대방 친구는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하려 했고, 둘은 오랫동안 꽉 안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의 강력한 포옹에 느낌이 이상하더랍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몸이 감기 걸린 것처럼 힘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글쎄
갈비뼈 3대가 골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가워서 한 포옹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반가워서 한 행동이 이렇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네요. 물론
뼈가 약한 사람의 탓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대방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약한 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병원 신세를 지게 한 것이지요.
제대로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으로 배려하는 삶,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는 인천교구 평화의 날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미사의 성가를
신학생들이 맡아서 했지요. 그런데 영성체 후 특송 때 이상한 것입니다.
피아노 반주만 계속될 뿐 노래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저는 ‘신학생들이 왜
이래?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저런 실수를 한 거야?’하면서 그들이 실수를
했다고 마음속으로 판단했지요. 그 순간에 한 신부님이 성가대쪽을
바라보고 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학생들이 지금 영성체 모시고 있는데, 해설자가 미리 특송하라고 말해
버렸네.”
신학생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해설자의
실수였던 것이지요. 뒤쪽의 성가대석만 바라봐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을,
저는 보지도 않고 소리만 듣고는 신학생들이 실수를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를 알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해서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이러한
증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은 항상
주님의 일만을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을 알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아
똑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비로서 인생이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카를 쾨르너)
전쟁에 크게 패하는 요인(‘행복한 동행’ 중에서)
옛날 어느 장군이 전쟁에서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급한 전보를 받고
전쟁터에 나가고자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의 시종이 붙잡았다.
“장군님, 아직 말의 상태를 다 점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단 1분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 그리고 평소에도 이 말은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했다. 오늘이라고 별 일 있겠느냐. 비켜라!”
하지만 불행히도 장군은 그날 전사하고 말았다. 그것도 적군과 맞서기도
전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실 장군이 타고 나갔단 그 말의 편자는
부서져 있었다. 편자가 부서지자 말은 발의 통증을 못 이겨 기우뚱거리다
그만 장군을 떨어뜨렸다. 장군의 죽음은 군사들의 자신감을 잃게 했으며
곧 전쟁에 크게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
말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모른다는 것,
또한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돌아올 큰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어린양 |반신부의 복음 묵상
주님공현 전 토요일 (요한1,29-34)
2014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하느님의 어린 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속죄물,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8).고 했듯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홍같이
붉은 나의 죄가 말끔히 씻어지고 양털같이 되리니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이 되어줄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을 알면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복음: 요한 1,29-34
< 하느님을 알면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 >
저는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해서 삶이 고단해지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안
돼요!’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것들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책을 내니까 사인을 해서 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싸게 사는 것까지 미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냥
수십 권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 사이에 돈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쁘시겠습니까?
저는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그 사람이 그만큼이나 나를 믿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절대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다 주어버립니다. 이렇게 나를 완전하게 믿고 기대할 때는 그 믿음을
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우리가 하느님께 그렇게 믿고 기도할 때도
그럴 것이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믿고 계신 것을 안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로젠탈과 초등학교의 교장이었던
제이콥슨은 초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학년 초 담임교사들에게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단을 주면서
지능검사 결과 잠재력이 뛰어난 아이들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알리지 말고 그냥 아이들을 지도할
때 참고하라고만 하였습니다. 1년 후 아이들의 지능을 검사했더니 1년
전과 비교하여 무려 24점이나 올라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선생님들의 기대와 믿음이
아이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기대 효과는 없는 능력도 만들어 냅니다. 플라시보 효과(위약효과)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기대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환자들에게 ‘약효가 뛰어난 약’이라고 주면 실제로 병에서 회복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 햇볕 같은 이야기, 김필곤, 기대의 힘]
이렇게 사람은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그 모상을 닮은 인간도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그 사랑해 주는 사람의 원하는 바를 따라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완전해지기를
믿고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의 모습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를 원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단절을 일으키는 죄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
2015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공현 전 토요일(2015년 01월 03일)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서양에서는 양을 많이 키웁니다. 이태리말을 배우기 위해서 이태리 남부
노치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있을 때 그곳 들판에 양떼가 많았습니다.
양을 가까이서 보려고 살금살금 기다시피 몰래 접근했는데 양은 어느새
내 쪽을 쳐다보며 멀리 도망쳤습니다. 낯선 사람을 정말 귀신같이 압니다.
양은 모든 것을 사람한테 줍니다. 털과 고기와 젖을 온전히 내어줍니다.
유목민 생활을 한 중동 지역에서 양은 사람들의 생명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동물이기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도 양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오!”
분명 요한은 이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주님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우리
수도원 참사회의실 벽화에도 손가락으로 정중앙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사 때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 한국 교회가 미사 통상문을
개정하면서 “보라”(Ecce)라는 말을 삭제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지 않으니
신자들은 어린양이신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라”라는 이 단어는
굉장히 강한 명령어이며 초대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사를 주례할 때
성체를 들어보이며, 의도적으로 “보라”를 집어넣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다”라는 동사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도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와 머무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신 주님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빵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그분을 참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께
매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글레멘스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전 토요일
2014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죄와 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계명’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길 하면 죄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 살인을 하는 것, 남을 속이는 것, 양심을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것들이 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죄’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 기도문을 영성체 전에 바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이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릇된
제도와 구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노예제도, 신분제도, 독재권력,
전쟁, 물질 만능주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인간이 이런 제도에 의해서 인격이 침해되고,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권력이 부당하게 사용되어서 무죄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도 세상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책임과 권한이 있는 사람이 태만해서
사고와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개인의 죄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개인의 죄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고, 속죄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의 죄에 대해서도 많은 표징과 말씀을 통해서 치유와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면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증언하지 않으면
돌들이 증언할 것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해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2015년 새로운 한해에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밝은 빛이 비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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