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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고 흐린 주말은 기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그렇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지요. 어차피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람의 일이 아닌 이상은 그게 맞습니다. 온 세계 비행기를 모아 바람을 일으킨다 해도 이 구름이 다 지워질까요? 허망한 바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래도 저래도 즐거운 시간을 우리는 만들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게 빠르고 옳은 길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일도 실망할 일도 아닙니다. 각자 맞는 것을 찾아가면 됩니다. 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신나는(?) 명절 연휴가 기다립니다. 신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ㅋㅋ
요즘은 뉴스를 보아도 한 반쯤 지났다 싶을 때부터 봅니다. 잘난 사람들 떠든 시간이 다 지날 때쯤 해서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봤자 여기저기 사고 터진 내용들이라 그다지 즐겁지는 않습니다. 뭐 뉴스를 즐겁자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따뜻한 이야기도 나오니까 기다려보는 겁니다. 그런데 늘 생각하지만 세상 참 시끄럽습니다. 지진 홍수 전쟁, 이 조그만 지구가 편하지 않지요. 그럼에도 그냥저냥 살고들 있습니다. 역시 대단한 존재 아닌가요? 가는 사람 가고, 머문 사람 조금 더 있다 가는 겁니다. 큰 차이 있습니까? 거기 모이면 무슨 이야기들을 나눌까요? 거기서는 다 지나간 쓰잘 데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우성이지요.
뭐라카든 주말은 즐거운 시간입니다. 머리도 쉬고, 몸도 쉬고, 마음도 쉬어야지요. 조금 더 머물고 싶으면 건강하세요. ㅎㅎ
2023년 9월 16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신명기 18 : 10 - 11)
<잠>
무의식의 세계는 아직도 신비 속에 있습니다. 그 유명한 ‘꿈의 해석’이라는 책도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물론 획기적인 시작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종종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것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잠을 잡니다. 그리고 때때로 꿈을 꿉니다. 그것에 의미를 담아서 해석을 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많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태몽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거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보통은 그냥 잊어버립니다. 무엇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 꿈속을 헤매는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몽유병’이라는 것입니다. 본인에게는 현실일 수 있지만 혹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아무리 봐도 이상행동으로 보입니다. 깜짝 놀라겠지요. 잠 속에 있는데 일상의 생활 행동처럼 움직입니다. 잠에서 깨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일어난 후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 할 수 있습니다. 나타난 현상을 보면서도 갸우뚱하기 십상입니다. 어쩌다 몇 번 일어난 현상이라면 혹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넘어갑니다. 실제 그럴 수도 있다고 하니까요. 만약 뇌의 이상이 생겨 발생한 것이라면 원인 규명을 하고 질병으로 인식하여 치료해야겠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 더구나 사랑하는 배우자가 그런 현상을 보인다면 어떨까요? 단순한 이상행동을 넘어 좀 엽기적인 행동까지 보인다면 그 충격은 매우 클 것입니다. 일단 알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일이니 고쳐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협의해서 치료하거나 고칠 방법을 찾습니다. 두 사람의 힘으로 벅차다면 전문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방법을 의논하여 결정합니다. 약 처방도 받습니다. 어느 정도 기간을 가지고 필요한 조처를 행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참으며 하루하루 버텨나갑니다. 참으로 더딥니다. 보통의 육체적 질병도 아니기에 금방 뚜렷하게 호전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은 가는데 바라던 대로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망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민간요법을 생각해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사고대로 작동한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면 영혼에 관한 문제이겠다 싶었겠지요. 그래서 주술사를 부릅니다. 남편 ‘현수’를 보더니 아내인 ‘수진’에게 대뜸 하는 말입니다. 두 남자를 모시고 있군 그래. 남편은 하나인데, 그리고 지금 그 방에 엄마와 자기를 빼면 주술사와 남편뿐인데 주술사도 여자입니다. 그런데 두 남자라고? 어떻게? 남편 안에 또 다른 남자가 들어있답니다. 거참!
얼마 전 아래층 아줌마가 먹을 것을 챙겨서 인사 차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새벽에 자꾸 쿵쾅거려서 잠을 자기 힘들다고 개선해주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벌써 꼭 한 주가 되었답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사이 한 주 동안이나 남편이 이상행동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제 치료를 시작하여 또 한 동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니 주술사의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래층 여자와 알게 되어 대화하는 기회도 가집니다. 그리고 안 사실입니다. 아래층에 까다로운 어르신이 살다가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 딸이 이사 온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열흘 안에 구천에 들어가지 못하면 이승에서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답니다.
남편 자신은 나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다리다 지친 아내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 사이 낳은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할지 걱정입니다. 아내가 무슨 짓을 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단 장모님에게 맡기고 아내를 달래려 합니다. 그 사이 아내는 아래층 살던 어르신의 사망 시점부터 지나온 시간들을 따져서 자기 집에 미칠 악영향(?)을 대비합니다. 어느 날 거실에 남편을 붙잡아 앉히고는 자기가 조사한 내력을 화면에 올립니다. 그 어르신의 혼이 남편에게 들어가 있기에 이제 낳아서 자라고 있는 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아내야 합니다. 그 힘을 어르신의 딸, 아래층 아줌마가 쥐고 있답니다.
처음에는 남편 현수의 몽유병이 좀 심하여 아내가 고생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이상행동을 하는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어떻게 나란히 잘 수 있겠습니까? 치료하다 안 되니 주술사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상황은 바뀝니다. 이제는 남편 현수가 아내로 인하여 공포를 느낍니다. 결국 주술사의 말을 따라갑니다. 아래층 여자를 붙잡아 귀신에 대한 강제 추방령을 내리도록 강권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흘러가지? 싶었습니다. 마치 한국판 ‘엑소시스트’를 보는 듯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 자체가 어두워 관람 후에도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뭔가 마음에 감동이나 어떤 즐거움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라고 영화를 보는 건데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영화 ‘잠’(Sleep)을 보았습니다.
뭔 가마요?
‘불가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찜질방입니다. 아마도 이 ‘가마’라는 용어가 남아있는 경우는 바로 이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본래 가마라고 하면 음식을 만드는 커다란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마는 그런 용도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관광을 와서 경험해본 외국인들이 그 맛에 빠졌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도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두 번 다 경험한 줄 압니다. 그 속에서 땀 쭉 빼고 나오면 아주 개운합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지요. 아무튼 ‘가마’라고 하면 그 밑에다 불을 때는 것과 가마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본래의 용도입니다. 옛날에 부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도구입니다.
지금은 시골에 가도 그런 부엌을 보기 힘들 것입니다. 대부분 현대식으로 개량되어 있습니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부엌이 집안에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부엌이 바깥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가장 큰 이유는 나무로 불을 때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에서 나무를 땔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은 시골에도 가스가 공급되기 때문에 불 땔 일이 없지요. 도시와 마찬가지로 방안에 부엌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은 시골에 가도 가마솥이라는 커다란 솥을 구경하기 힘듭니다. 일부러 그렇게 설비한 음식점이 아니라면 커다란 음식점에서조차 구경하기 힘들지요.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는 가정이라면 아마도 그런 가마솥으로 밥을 짓는 집이 행여 남아 있으리라 봅니다. 장작을 때서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우리가 흔히 해먹는 밥과는 맛이 좀 다릅니다. 전기 스위치만 누르면 알아서 다 끝내버리고 끝났다는 신호까지 보내주는 편리한 밥솥과는 밥을 짓는 자체가 다릅니다. 처음 쌀을 안칠 때부터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가지요. 불을 때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의 풍경을 보면서 그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던 때가 생각납니다. 여름에는 고역이지만 겨울에는 아주 재밌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이 불장난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최고의 놀이터지요.
가마 또는 가마솥이라고 부릅니다. 음식을 끓이는 커다란 그릇입니다. 무쇠로 만들어졌지요. 그 뚜껑도 무겁습니다. 거기에다 밥을 짓고 또 국도 끓입니다. 한 지붕 아래 대가족이 살던 때의 부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마가 지금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가마를 생각하면 더불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많은 양의 음식과 아궁이에서 불을 때야 하니 많은 나무들입니다. 가마, 양식, 땔나무 그리고 불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웬 가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렘 1 :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끓는 가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울어졌다고 하니 곧 쏟아질 것이 예상됩니다. 끓는 것이 쏟아질 것이니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절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예,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끓는 것을 쏟을 것이니 다치겠지요. 징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 남북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졌다고 하니 북한이 우리 남쪽의 대한민국을 침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범죄할 때 징계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쟁입니다. 주변국을 들어서 하나님 백성을 침략하여 괴롭히는 것이지요.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당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요즘 다시 미사일 타령하면서 위기를 조장하고 있지만 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당시 자기 임의의 해석이었다는 말이지요. 첫째로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나라 전체에 갖다 붙이는 것은 무리지요. 우선 ‘예레미야’는 선지서입니다. 예언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은 구약의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구약의 예언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선포하셨지요. 요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러므로 우선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가마’가 여기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겔 24 : 3 - 6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찌어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찐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찌어다” 여기에 나오는 가마는 ‘녹슨 가마’입니다.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더러운 그릇에 담긴다면 먹겠습니까? 맛있는 불고기를 개밥그릇에 담아준다면 먹겠습니까? 당연히 안 먹습니다. 그렇다면 녹슨 가마에 삶았다면 그것이 쓸모 있는 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귀한 재료가 들어갔다 하여도 그 가마에 삶은 음식은 먹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음식을 삶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마를 깨끗이 만드는 일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합니다. 겔 24 : 11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하라” 그런데 이 말씀이 비유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가마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해석이 나옵니다. 12절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곤비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어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가마가 ‘성읍’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6절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찐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찌어다” ‘피 흘린 성읍’과 ‘녹슨 가마’가 동격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녹슨 가마가 피 흘린 성읍이란 뜻이지요. 가마는 가마인데 녹이 슬었다는 것은 성읍에 죄악이 가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녹이 벗어지지 않는다 하니 그 성읍의 죄악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어쩌겠습니까? 13절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역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성읍에 분노를 푸시겠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가마가 나옵니다. 슥 14 : 20 - 21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는 가마라 하지 않고 ‘솥’이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같은 의미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솥은 다른 곳과는 다릅니다. 모든 솥이 여호와의 성물이 된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솥 곧 가마는 ‘성결한 솥(가마)’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앞에 나온 가마와는 다릅니다. 과연 쓸 만한 가마요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먹기에 좋은 음식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니 성경에서 세 가지 가마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지서 곧 예언서에서 말씀하시는 가마는 비유입니다. 우선은 가마의 특성을 알아야 하지요. 가마는 무엇 하는 도구입니까? 삶는 도구요 커다란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릇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노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요. 잠시 시력을 잃고 사람들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환상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울에 관하여 지시하시지요. 행 9 :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은 주님이 사용하시고자 하는 일꾼입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서 ‘그릇’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곧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그릇은 인재 곧 큰 인물을 뜻합니다. 사람이지요. 그러나 앞에서 본 그릇은 일반 그릇과는 다릅니다. 굉장히 큰 그릇 곧 가마솥입니다. 그래서 그 뜻도 사람들이 모인 성읍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릇은 개인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이라면 오늘날 어디를 말하겠습니까? 교회지요.
성경의 비유를 알려면 육적인 소재 가지고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를 찾을 때도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의 의미와 사단의 편에서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듯 사단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가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마가 있는가 하면 사단이 쓰는 가마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 정리합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3 가지 가마를 보았습니다. 녹슨 가마와 끓는 가마 그리고 성결한 가마입니다. 도대체 이것들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알아야 하겠지요. 한 가지만 더 보겠습니다. 겔 11 : 3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이제껏 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마는 성읍 곧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이요 가마 속의 고기는 그 성읍의 백성 곧 하나님 백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가마는 교회요 고기는 바로 그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성도인 내가 어느 가마에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 백성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을 등집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 때부터 그랬다는 말입니다. 오랜 후 선지자의 말에서 그 동안의 역사를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이것이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무불과 같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인도를 받아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지요. 그렇게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옵니다. 이제 하나님은 수백 년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래서 시내 산 밑으로 불러 모아 그곳에서 1년을 지내며 율법과 성막제도를 주십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대표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준다는 약속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약속하신 복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창 1 : 28), 하신 약속은 곧 하나님의 뜻이고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등지고 쫓겨났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등지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지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들어옵니다. 그 축복의 땅에 들어와서까지 이스라엘은 꾸준히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사사기의 기록이 바로 그것을 그대로 증거합니다. 삿 2 : 11 - 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그 결과 하나님은 이웃나라를 불러와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의 공식처럼 이어집니다. 사시기의 역사가 바로 그 표본이지요. 삿 3 :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우선 하나님을 배반(반역)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주변 이방나라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이스라엘은 큰 고통에 빠져 하나님께 구원을 청합니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사 구원자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9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이 자그마한 역사가 전체로 확대된 것을 보면 쉽습니다. 한참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메시야(구원자)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이고 오랜 구원의 순리를 따라 오신 구원자입니다. 마 1 :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앞에서 본 3 개의 가마도 바로 이것을 비유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녹슨 가마를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멀쩡했는데 녹이 슨 것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아담이 녹이 슬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등지고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아담의 세계에 끓는 가마를 부으셨습니다. 홍수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신 노아로 구원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새로 만드신 성결의 가마였던 것입니다. 녹슨 가마에서 끓는 가마로 그러고 나서 성결의 가마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구원의 노정입니다. 비단 육적인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도 똑같은 역사가 예고되어 있습니다. 살후 2 : 3 - 4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시작은 하나님 백성의 배도 즉 반역으로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당연히 심판이 따라옵니다. 옛날에는 주변 이방나라를 들어서 치셨습니다. 이제는 사단의 밥으로 내주십니다. 멸망의 아들이 집어 삼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잘 아는 대로 주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로 앞의 살후 2 : 1 - 2절에서 경고하는 것은 주님의 강림 곧 재림에 대해서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3 - 4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으니 잘 새겨서 흔들리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 순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즉 반역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면 멸망자가 나타나겠지요.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이 멸망당하면 그 때 비로소 구원자이신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재림 곧 마지막 때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배도)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멸망자가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어야 주의 재림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해주지도 못하면서 주의 재림을 말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나아가 마귀 사단의 증거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고 재림과 심판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마귀의 뜻입니까?
이제 이러한 재림의 사건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정리해봅니다. 자, 3 가지 가마가 등장합니다. 녹슨 가마와 끓는 가마 그리고 성결의 가마입니다. 말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입니다. 하나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녹이 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끓는 가마로 심판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성결의 가마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받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 24 :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어떻게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 백성이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나님 자리에 앉은 것이지요. 하나님 백성이 모두 마귀의 밥이 된 것입니다. 초림 때 그렇게 된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이 침노를 당해 빼앗겼습니다. 마귀의 자식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차지한 것입니다.(요 8 : 44)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니엘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사실 재림 때의 일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재림 때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미리 탄식하기도 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 때에도 믿음이 없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등진다는 것이지요. 이제 경각심을 가지고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때 어떤 가마에 있는지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 백성이라면 성도로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느 가마에 담겨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녹슨 가마인지, 끓는 가마에서 멸망당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구원의 가마에 담겨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행여 자신만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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