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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종려주일 예배
○ 요한복음 12장 12-15절 나의 왕이 오셨다
나라가 혼탁하고 어려우면 국민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강한 나라로 일으켜 세울 강한 통치자를 원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런 통치자가 누구였을까요? 바로 다윗왕입니다. 다윗왕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기면서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주변국들을 평정해서 그들 나라들이 해마다 공물을 가져다 바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통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통치자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정부로부터 구원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어줄 그런 다윗과 같은 통치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그런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자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그런 통치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 사람이 민족 회복을 위해 일어나서 사람을 모으고 로마와 대항했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은 유대인들을 주변 나라로부터 건져낼 메시야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로마 군사들과 싸워이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규모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싸움이 커졌을 때 그들은 강력한 로마를 당하지 못하고 몰살되거나 겨우 몇 명은 도망치거나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간교한 헤롯이 유대인의 대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 입지를 얻은 후 로마에 찾아가 아부하면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받아가지고 유대땅으로 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족속 다윗이 후손이 아닌 에돔 족속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유대인의 영적인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할 수 없어서 가이사랴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기서 유대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이 통치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헤롯이나 총독이나 다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그렇지만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헤롯과 로마의 총독 앞에서 일단은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로마에 항거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지만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사람들을 모으고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인물과 동일하게 맞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만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모두다 메시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과 달랐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기 저기서 자기가 구원자라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 성경을 살펴보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여러분들의 신앙의 지침서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중요한 이유도 일어나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가까이 두고 항상 읽으시기 바랍니다. 읽으시면서 성령께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성령이 성경을 통해 조명하시고 말씀하시는 일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죄와 허물 가운데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온전한 신앙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도의 사회적인 혼란과 더불어 영적인 혼란이 일어나고 있을 때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면서 외쳤습니다. 마치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새벽닭의 울음처럼 영적인 잠을 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이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사역하는 요단강 근처의 광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설교했습니다.
그렇게 모여들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이 분이 그리스도인가?”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침례 요한의 차림새는 영락없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례 요한에게는 복음이 있었지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은 없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복음도 있고 권능도 있는 분이 곧 오셔서 성령을 주신다고 하면서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 분이 오시는데 오시면 그분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침례 요한은 제자들을 구별하였습니다. 그 구별된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나중에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 스승인 침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외치자 에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불어 열 명의 제자들을 더 구별하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기 위한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인간 구원자 이상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을 볼 때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께서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구원을 기다렸던 반면에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을 우선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전에 하나님이 정하시고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일꾼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영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구원 자체였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온전하게 치료가 되었고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매우 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남녀노소는 물론 온전한 사람과 장애인들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그가 누구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구원해야 할 사람들로서 받아들이셨고 존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나와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몸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영혼구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구원받지 못했지만 영혼은 구원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고자 하시는 구원은 온전한 구원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구원입니다. 그렇지만 그 몸은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몸과는 다른 형태의 몸을 갖게 됩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을 잠가 놓았는데도 그 방안에 들어와 계셨듯이 말입니다. 그 몸을 여러분들이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꾼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집에 오면 영접하고 잘 대접했던 가이오에게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영적인 복과 더불어 삶 전체가 온전하게 복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몇 차례 은밀하게 방문하시기는 하셨지만 유월절 명절을 앞둔 이번에는 새끼 나귀를 타고 공개적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스가랴서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예언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2장 10절을 보면 임마누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이것을 쉽게 풀어쓰면 “시온의 딸아 내가 네 가운데 머물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머무시는데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왕이시라고 소개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인 왕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2장 12-15절 가운데 13절을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시며, 또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들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래 선지자의 예언을 월절을 앞둔 종려주일에 이렇게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에수님은 한 아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가 자기 나라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백마를 타고 입성을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큰 자로 여기길 원하며 자기 민족의 유일한 구원자로 여기길 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나라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모닝을 끌고 서울로 들어간다면 누가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습니까? 사람들이 바라는 대통령은 자신감이 충만한 능력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모닝을 타고 들어가는 사람은 그런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해외에서 출시되는 비싼 차 정도는 타야 하며 강력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귀 새끼를 타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외모로 볼 때 전혀 두드러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그런 나귀를 타고 모닝을 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모닝을 탄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환영하는데 모닝에서 내리면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 높고 낮음과 크고 작음은 사람의 평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크다고 하시면 크고, 작다고 하시면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비할 것이 전혀 없는 가장 존귀한 자며 큰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들에게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히셨고 온 천지만물을 다스릴 주권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없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더없이 큰 자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겨우 나귀새끼나 타신 분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하늘 구름을 타셔야 하는 분이었고 하늘의 모든 천사들로부터 환영과 호위를 받아야 마땅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가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자 자기 옷을 길에 깔면서 경외심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땅에 펼쳐놓으면서 존경의 표시와 승리를 염원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환영과 존경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끼요? 예수님은 울고 계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베푸셨던 예루살렘, 그리고 수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지켜주셨던 예루살렘이었지만 정작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온갖 세상의 위험을 향해 나가고 또 나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실 때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물었던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시면서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을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예수님이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신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오늘 평화의 일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곧 다가올 멸망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보고 계게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 일에 대하여 똑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과 누가복음 13장 34절입니다만 마태복음 말씀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고 계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보다 오직 자기들의 처지만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시면서 우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오로지 자기들의 육신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구원해주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를 보시면서 뭐라도 하실 까요? 어쩌면 예루살렘을 바라보실 때처럼 울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오직 땅의 영광과 명예와 부귀를 구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탄식하시면서 울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겉모습은 날로 화려해져 가는 세상의 모습을 따라 화려하게 꾸미는데 속은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기는 교회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울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구하며 기다리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주는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대한민국만을 위해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해주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자원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겉옷을 길에다 깔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깔아놓는 헌신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할 헌신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진정한 자신과 온 세상의 왕으로 믿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등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 십자가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인지를 알게 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여러분들에게 지라고 주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알고 예수님을 따르며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