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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동(宗民洞) 마을이름의 유래>
1)宗堂(종당)
종민동(宗民洞)은 종당(宗堂)에서 종(宗)자를 따고 민마루를 한자로 옮긴 민종(民宗)에서 민(民)자를 따서 합친 이름입니다. 이런 경우는 전국에 흔하고 보통 사람들이 많이 살고 세력이 있는 마을이름에서 첫글자를 따고 부르기에 좋은 마을이름 글자를 따서 뒤에 붙여 만듭니다.
종민동(宗民洞)에서 가장 큰마을인 宗堂(종당)은 지금 하종(下宗)마을을 일컫습니다. 토박이들은 <아랫종댕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지도에도 종당(宗堂)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오래전부터 종당(宗堂)이라고 썼습니다.
예전에 지금 상.하종에 사람들이 흩어져 살았을 때도 종당(宗堂)이라 했지만 차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상종과 하종마을로 분리되었습니다.
자연마을로 상종(上宗), 하종(下宗) 마을이 있고 평강전씨(平康全氏)(정선전씨 중 일파로 종당전씨라고도 함)집안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조선시대에 종당산(宗堂山)이 있었는데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단종2년))』: 종당산(宗堂山) :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빗돌)을 만들만 하다.
원문: 宗堂山 在州北十三里 産異石細密可作碑碣
이 부분은 자세한 해설이 필요합니다. 우선 지리지마다 다르게 나와 있는데 1리는 400m이고 13리면 5.2km가 됩니다.
지금 충주시 관아공원에서 도보로 구불구불한 길로 5.2km라는 거고 옛지도에는 남한강 건너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기이한 돌이고 세밀하다는 것은 암석입자가 작다는 것인데 비석에 쓰이는 돌은 화강암, 점판암, 대리석, 오석 등인데 확실히 단정짓지 못하지만 대리석인 것 같습니다. 기이한 돌이며 세밀한 돌은 여러 색이 있는 대리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리석은 흰색, 검정, 분홍색, 청색 등 다양합니다.
아무리 멀리 잡아도 지금 동량면 지역 같습니다. 지금 어디가 종당산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소실된 지명인데 그리 흔한 산이름도 아니다보면 종당(宗堂)이란 마을이름과 관련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상상을 더 넓혀보면 종당산(宗堂山)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이 종민동 종당(宗堂)에 자리잡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지명이 옮겨졌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 어디 사람이지?" "그 양반 종당(宗堂) 사람이지."
宗(마루 종), 堂(집 당): ‘마루’는 ‘큰, 높은, 평평한, 으뜸’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당(祠堂)을 달리 宗堂(종당)이라 하기도 하며, 宗(종)자의 유래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 - 조묘(祖廟)>의 뜻이라고 합니다.
주요한 지명으로 <심항산(봉우뚝산), 우암재, 왕골, 옻샘, 누루꾸지여울> 등이 있습니다.
심항산(心項山-봉우뚝산)의 심항(心項)은 마스막재를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입니다.
*마슴(心, 마음의 옛말) + 목(項, 목 항) ---> 심항(心項).
과거 청풍면 오티(오현봉수(吾峴烽燧))와 충주시 대소원면 마산(馬山)을 이어주던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산으로 충주목 관아가 있던 관아공원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있었던 곳을 <봉우뚝산>이라 흔히 부르고 있는데 <봉화독산, 봉화둑산>을 편히 발음하는 것입다. 요즘 재현된 봉수대의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우암재>는 상종마을에서 마스막재로 가는 길, 계명산휴양림 인근에 있는 고개를 말합니다. <재>란 높은 산의 고개를 말합니다. 근처에 있는 <왕골>의 영향을 받아 <왕(王)재>가 변하여 <왕재 ---> 왐재 ---> 오암재 ---> 우암재>로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상종마을에서 이 고개를 오르면 몹시 가파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로 우암치(牛岩峙)로 옮겨 족보에 쓰기도 합니다.
<왕골>은 지금 상종마을에서 도랑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왕이 피난왔던 골짜기>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풀이로는 왕(王)자가 들어가니 <크고 넓은 골짜기>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 왕거미, 말벌처럼 <왕, 말>자가 들어가는 땅이름은 <크다>는 뜻이 있습니다.
<삼승골>은 상종마을 앞 봉우뚝산 아래 골짜기를 말합니다.
과거 종당(宗堂)에 처음 자리 잡은 입향조 세 분이 이 골짜기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이 골짜기에 논과 밭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서깊은 집안에는 입향조(入鄕祖)에 대한 얘기가 전하는데 <삼승골, 삼성골>에 대한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세 성(性)을 가진 성인(聖人)이 처음 도착한 곳이 심항산 아래 <삼승골>이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옻샘>은 상종마을 아래 충주호 수몰선에 있는 샘으로 과거 옻이 오르면 바르고 먹던 약수입니다. 가물 때 볼 수 있고 지금은 그 자취가 희미합니다.
<누루꾸지여울>은 상종마을 앞강에 있었던 여울로 지금은 수몰되어 볼 수가 없습니다. 과거 이 여울을 거쳐 정선에서 강하류로 뗏목을 운반하고 강상류 단양까지 소금배가 다녔다고 합니다. 소금배로 강상류로 오르기 위해서는 강 양쪽으로 배에 줄을 매달고 사람들이 당겨 올렸다고 합니다.
누루꾸지여울 아래에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멋진 바위들이 강 중간중간 솟아 있었고 물이 맑아 소풍과 천렵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곤 하였습니다. <누루꾸지여울>과 같은 지명이 대전 신탄진에도 있었는데 황곶, 황호(黃湖)로 옮깁니다. 그 뜻은 <누런 흙탕물이 흐르는 여울>이라고 합니다.
남한강에 있는 여울은 과거 뗏꾼과 뱃사람들의 생업(生業)과 밀접하므로 어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곳이 워낙 위험한 곳이라 이곳을 통과하면 한시름 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바람에 누룩냄새가 끊이질 않아 <누룩꾸지여울>이라고 불렀다고도 합니다.
누루꾸지여울 아래에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노적바위>, <문바위>, <삼형제바위>, <마당바위>, <책상바위>, <확바위>, <덤바위>가 있었으나 수몰되었습니다.
<노적바위>란 가을철 수확시기 곡식 따위를 한데에 수북이 쌓은 것을 노적(露積)이라 말하며 바위 생김새가 이와 비슷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식량이 모자라던 지난 시절에 풍년과 풍요를 비는 뜻에서 지었습니다.
<문바위>란 글씨가 희미하게 새겨있고 문(門)처럼 생긴 바위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 부근에 예전 <정문여울>이 있었습니다. <정문(正門)여울>과 관련 있을것 같습니다. <정문여울>은 어떤 책에 나오지만 상종앞에 있었다는 것밖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앞에 있는 여울이란 뜻같습니다.
<삼형제바위>는 바위 세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 마치 삼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라서 지은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 삼형제봉(三兄弟峰)이 있습니다.
<마당바위>는 바위 위가 평평하고 넓어 마치 마당처럼 생긴 바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전국에 많습니다. 한자로 장암(場岩)으로 옮깁니다. 가까운 동량면 동량대교 가까운 곳에도 있습니다.
<확바위>란 오랜 세월 모래와 자갈로 속이 파인 바위가 과거 방아를 찧던 <확>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말합니다. <확바위>는 <호박바위>라고도 하며 섬진강에는 <요강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덤바위>는 <포개진 바위 혹은 여러 개의 바위가 무더기로 모여있는 모양>에서 붙인 이름이 됩니다.
이외에도 코끼리바위, 기차바위 등 여러 바위이름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은 화강암 바위들이 만물상(萬物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까치여울>은 누루꾸지여울 위쪽에 있던 여울로, 가까운 원터마을에 <까치골>이 있어 유래한 것 같고 물이 얕고 작은 바위들이 많아 강물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고 합니다
<사우앙산(四雨央山)>은 봉우뚝산(심항산心項山) 맞은편 강 건네에 있는 산으로 주민들은 <사우랑산, 사호앙산, 사그락산>으로 부르며, 이는 우리말 지명 <사우랑산>을 한자로 소리를 옮겨 표기한 것입니다. 사우앙산(四雨央山)은 일제시대 작성된 지도에 처음 나오는데 뜻을 새기면 말이 안됩니다.
사우앙산은 몹시 가파르고 기반암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풍화된 흙과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을 과거에 볼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굵은 마사가 흘러내리는 것으로 봐서 사우앙산의 <사>자는 모래 사(沙)자로 생각됩니다.
구전에 의하면 사우앙산앞 강가에 모래가 많이 쌓여 있었고 사금을 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골안>이란 지명은 종민동에도 흔하고 많이 쓰는 말입니다. 골짜기 안쪽이란 뜻입니다. <사우앙산>은 <사(沙)골안산>이 되고 이 말이 변한 말 같습니다. 괴산군 괴산댐 부근에 <사오랑>마을이 있습니다. <사골안산> --> <사고란산> --> <사고랑산> --> <사오랑산> --> <사우앙산>으로 변한것 같습니다.
<절골>, <절터>는 하종마을 뒤편 골짜기에 있고 석탑이 있었으나 오래전에 외부로 반출되어 없어졌다고 합니다. 상종마을 왕골 위에도 <절터>가 있다고 합니다.
<병문거리>는 상종마을에서 도랑을 따라 왕골로 올라가기 전 부근을 말합니다. 한자로 쓰면 병문(兵門)거리가 될 것입니다. 왕골에 얽힌 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외에 <갈미기들>, <번디기들>, <망덕거리들>, <비내미들>, <못둔지> 등 여러 땅이름이 전하고 있으나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수몰되었습니다.
<갈미기들>은 <갈미기> 부근에 있는 들이고 예전 농촌에서는 산에 있는 갈잎을 뜯어다 퇴비를 많이 하였는데 갈참나무가 많은 곳을 <갈미기>라고 한 것 같습니다.
<번디기들>은 우선 <번디기>가 다른 고장에도 보이는데 <버덩>과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번디기>를 <번덕>으로 바꿔보면 <버덩>과 같은 뜻인 <번던>, <펀던>, <버던>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버덩>은 잡목이 우거지고 바위가 많은 거친 땅이란 뜻입니다.
상종마을에 <새번디기>란 지명이 보입니다. 산에 화전(火田)을 일구어 산전(山田)을 한 곳을 말한다는데 <번디기들>도 새로 일군 밭이 있는 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흔적을 보여주는 지명입니다.
<망덕거리들>의 <망덕> 또한 그 뜻이 불분명합니다. <거리>라는 말은 <어디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전라북도 남원시에도 <망덕거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한자로 망덕(望德)으로 쓰며 <덕을 소망을 한다, 덕을 비는 거리>라고 풀이합니다.
또한 전남 광양에는 망덕포구가 있는데 ‘망덕포구는 광양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망뎅이>라 이름 짓고, 한자로 망덕(望德)이라고 표기한다’고 합니다.
과거 하종마을에서 정월달에 동신제를 마을 앞 숲 속의 마을 수호신, 즉 성황당에서 지냈다고 하니 <망덕거리들>은 이 부근에 있는 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임동주씨가 쓴 [남한강의 어제와 오늘]이란 책을 보면
'또한 정이 담겼던 느티나무 아래 서낭당이 있었으며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이면 제주(祭主)를 정해 마을 곳곳에 복이 깃들어지길 빌던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내미들>은 앙성면에 <비내>란 지명이 보이는데 한자로 <벌천伐川>으로 옮깁니다. 지금은 <비내섬>이 유명합니다. 벌천(伐川)은 한자 그대로 새기면 넓은 벌에 흐르는 내입니다. <비내>가 벌(伐)과 관련있다는 뜻인데 한번 <비너미들>로 바꿔보면 <비만 오면 강물이 넘치는 들>이 됩니다. 넓은 벌판에 있는 들이며 근처에 큰강이 있어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넘칠 겁니다. 이와 다른 해석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흐르는 내 아래에 있는 들>입니다.
<못둔지>는 <못>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텃골마을과 하종마을 사이 강가에 있었다고 합니다. 전국엔 못이 있어 <못골>이란 지명이 흔합니다. <못둔지>도 <못뚠지>, <못둔>이 되고 강가에 가까운 곳에 몇가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떡갈봉>은 계명산 남쪽 아래로 솟은 작은 봉우리를 말하며 떡갈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정월 보름날 달이 봉우리 밑으로 뜨면 흉년이 들고 봉우리 위로 뜨면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차돌양지>는 차돌이 많이 있는 양지바른 곳이란 뜻인데 하종 메골에서 텃골마을로 돌아가는 산모퉁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곳 외에도 차돌이 많은 양지바른 곳에 이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큰낭박골>은 계명산에 있는 골짜기로 <가장골>과 <작은 낭박골> 사이에 위치한 큰 골짜기라고 합니다. 원터마을은 대부분 수몰되었으나 일부 가구가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가장골은 지금 원터마을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여기서 <낭박골>이 무슨 뜻인가가 문제인데 동량면 화암리 <낭골>은 <나무가 울창한 골짜기>란 뜻입니다. 하지만 <낭박>은 <낭떠러지 바위>란 뜻으로 <깎아지른 낭떠러지 바위가 있는 골짜기>라서 <낭박골>이라 한것 같습니다.
<매봉재>는 달리 매붕재라고 부르며 하종 메골에서 텃골마을로 넘어가는 산고개를 말하며 이 부근 산에 정선전씨 집안에서 묘를 많이 썼습니다. 매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동량면 장선리에 <매지방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매주봉골>의 방언으로 <매가 사는 봉우리가 있는 골짜기>란 뜻입니다.
<메골>은 묏골이라 하며 정선전씨 선대조상 묘가 있어 유래한 것으로 지금 충북교원복지회관 뒤편 골짜기를 말합니다.
이외에도 계명산에 있었던 지명으로 나무꾼들이 쉬고 놀았다는 <노는바위>, 늑대가 살았다는 <늑대굴>, 맷돌처럼 생겼다는 <맷돌바위>, 명맥이가 집을 짓고 살았다는 <명맥이바위>, 멍석처럼 생긴 <멍석바위>, 쇠코처럼 생긴 <쇠코바위>, 싸리나무가 많았다는 <싸리봉>, 계명산 동남쪽으로 있는 큰 바위너설인 <왕서들>, 지네가 많았다는 <지네골>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숲이 울창하여 접근하기 어려운데 오래전 사라진 지명들입니다.
2)基洞(기동) 텃골
基(터 기), 洞(마을 동): 基洞(기동)이란 마을이름을 달리 풀이하기도 하나, 기동(基洞)이란 뜻은 오래전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면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됩니다. 基洞(기동) 즉 ‘터골’이란 마을이름은 전국에 많이 있는데, 대부분 어느 집안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유래한 경우가 많습니다.
달리 ‘토골, 턱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 생김새를 의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에도 <턱골>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기동(基洞)에는 평택임씨(平澤林氏) 집안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도랑>이라고 부르는 곳에 근래 전원주택과 별장이 들어서서 <호반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 도랑 위 계명산쪽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바위너설(돌서랑) 부근의 골짜기는 <막골>, 혹은 <막골청서렁>이라 부르며 <사방이 막힌 막다른 골짜기>란 뜻입니다.
<막골>로 올라가기전 텃골마을 위 골짜기에 <불당골>이라 부르던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부처님을 모신 작은 불당이 있던 골짜기>란 뜻입니다. <불당골>은 흔한 지명입니다. 때로 북당골이라고 하는데 작은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입니다.
지금은 수몰되었지만 밤나무골도랑 아래 강가에는 <용수꾸미>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강상류로 올라가면 문지(文旨)강변에도 <용수꾸미>가 있었고 조선시대 읍지(邑誌)를 보면 가뭄이 크게 들 때 호랑이 머리를 넣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忠州牧) 산천(山川) 항목을 보면
진포(辰浦)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 넣으면 징험이 있다. 라고 쓰여 있고,
정조 4년(1780)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진포탄(津浦灘) 항목을 보면
진포(辰浦): 주의 동북쪽 5리인 포탄진(浦灘津)의 하류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용연(龍淵-용못)이라고 하며, 가물 때에 호랑이의 머리를 던져 넣으면 징험(徵驗)이 있다" 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용수꾸미>는 <용소구미>로 <용소굼이>로 쓸 수 있고 달리 <용구멍>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구멍>의 옛말 <굼>이 용소(龍沼)에 붙은 말로 생각됩니다.
때로 <구미>는 지명에서 용탄동 사래실마을 <사개구미 --- 불암정사 인근>처럼 '안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땅'을 말하기도 합니다.
<텃골광산>은 텃골마을에서 범동마을로 가는 산모롱이에 있었던 백운석광산입니다. 예전에 심항산(心項山) 너머 밍개에 활석광산이 유명했다고 합니다. 종민동 일대에는 석회석의 일종인 백운석 즉 차돌이 흔합니다. 예전에 여러곳에서 채굴하였습니다.
3)凡洞(범동) 범골
凡(무릇 범), 洞(마을 동) : 凡洞(범동)은 우리말 지명 '범골'을 '범(虎)'자는 <음옮김> 즉 우리말과 음이 같은 한자중 쉬운 한자 '무릇 범 凡 '자를, '골'은 한자로 '마을 동(洞)'으로 <뜻옮김>한 표기입니다. 달리 '봉골'이라 하는데 이는 '범골'을 편히 발음하는 것입니다. <봉골>을 실제로 길게 빼어 발음하는데 산쪽으로 치우치고 봉우리로 둘러싸인 마을이다보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것같습니다.
‘범골’이란 마을이름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과거 ‘범’이 살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가까운 안림동 '범의(凡衣)마을'과 호암동 ‘범바위'도 ‘범 '과 관련된 마을이름입니다.
마을 앞쪽 산에 있는 밭 부근을 <봄밧뜽>이라 하는데, 여기서 <봄밧>은 우리말 <범박> 즉 <범 모양의 바위>를 편히 부르는 것으로 <범바우>란 바위가 현재 숲속에 있으며 <봄밧등>은 <범바위가 있는 등성이>의 뜻이 됩니다.
이 또한 마을이름 <범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오랜 옛날 범동마을에서 텃골마을로 농기구를 빌리러 가면 호랑이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현재 기계유씨(杞溪兪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 집안이 살고 있습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듬박께>는 새로 생긴 집너메마을 가는 모퉁이 성황당 부근에 있는 <듬방말래> 혹은 <듬방마루> 너머의 밭을 말하며 '듬박'이란 석회석이 풍화된 이 바위 모습이 아래에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생겨, 마치 바위가 들린 바위 즉 <든박>의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명에서 <박>은 <바위>의 뜻으로 다른 지역에 <듬박골>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장승배기>는 앤들로 가는 성황당옆 지금 카페가 들어선 곳을 말하며 지난 시절 나쁜 액운이 마을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장승(長丞)을 세운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떡바우>는 앤드래 가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 신작로를 닦는 바람에 일부 파괴되었으나, 그 모습이 남아있고 동네에 전염병이 돌 때 제사음식을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왼들에 혹은 앤드래>는 범동마을 서낭당을 지나 산모롱이에서 충주댐 전망대 일대를 말하며 <앵돌아가는 곳에 있는 들(밭)>을 말합니다.
<왼들에>라는 지명은 지금 모카페가 들어선 서낭당부터 도로를 따라 충주댐전망대를 돌아 예전 강수달아저씨가 살던 곳 가기전까지 일대에 있던 밭과 숲을 가리킬때 쓰는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썼기 때문인데, 지명(地名)이란 것이 어느 일정한 지점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그 근방을 가리키고 때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불근데기(붉은데기)>는 현 충주댐 전망대 부근을 말하며 석회암이 풍화되어 <땅색깔이 붉은 땅>이란 뜻입니다. 석회석이 풍화된 땅은 철분(Fe)이 산화가 되어 붉은색의 토양이 되는데, 충주댐 전망대 아래에는 백운석 광산이 있었습니다. 지명에서 <데기나 더기>는 <작은 언덕>의 뜻으로 땅이름 끝에 흔히 붙습니다.
<부석케(부석에)>는 듬박께 아래 과거 산업기지개발공사 사무실 위쪽이 되며 한씨집안 말림아래 골짜기를 말합니다. 풍화된 석회석 바위 위에 하나의 바위가 얹힌 모습에서 '뜰 부(浮)자, 돌석(石)자'를 써서 부석(浮石)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석이바위>는 달리 <섹유바우>라 부르며 옆으로 균열이 생긴 큰 바위로 범동마을에서 계명산쪽 봉골재 위에 있으며, 이 바위에는 잔치국수에 꾸미(고명)로 쓰던 석이(石耳)버섯이 나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계명산 일대의 바위가 그렇듯 편마암의 일종이며, 멀리 용탄동 쪽에서 보았을 때 독특한 경관을 이루며 범동마을 일대에서는 가장 큰 바위입니다. 예전에 줄을 타고 내려가 석이버섯을 땄다고 합니다.
<고등치장(곧은치장)>은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졌고 충주댐 잔디광장 강쪽으로 있었습니다. <곧은치장>은 <곧게 벋어 내린 산줄기가 작은 등성이를 이루고 있는 평평한 곳>이
란 뜻입니다. 이 부근에 논과 밭이 있었으며 과거 담배와 고추농사를 많이 지을 때 배로 석탄을 이 부근 강까지 싣고 와서 동네분들이 손수 마을까지 지게로 운반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잊혀진 일이지만 여름철에는 강으로 멱을 감거나 고기를 잡으러 갔고, 겨울철에는 물건너 동량면 지등산(地登山) 일대로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이곳 집앞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고, 인근 산자락에서 가을철 깨금을 땄으며 강으로 뾰죽하게 나있는 산모롱이에는 봄에 참꽃(창꽃 --- 진달래)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고등치장으로 해서 강쪽으로 내려가 상류로 조금 가면 바위 절벽에 도장나무(회양목)가 많이 자생하여 캐서 집에 심곤 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파괴되었습니다.
<여우박골>은 숯돌메기 아래를 말하며, <여우가 살던 바위가 있는 골짜기>란 뜻입니다. 부근의 농토도 <여우박골>이라고 하며 골짜기에 흐르는 도랑을 <여우박골도랑>이라고 합니다. <여우박골도랑> 위에는 푸석바위에 6.25 난리때 피난하기 위해 판 굴이 지금도 있습니다. <여우박골>은 흔한 지명으로 <박>은 <바위의 뜻>입니다.
<버던 혹은 버던에>는 여우박골 아래 <땅이 비스듬히 벋어 내린 곳>을 말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번던, 펀던, 번덕, 버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 뜻은 각종 잡목이 우거진 거친 땅을 말하는데, 실제로 이곳은 잡목과 바위가 많습니다.
<영산나무께>는 집너메도랑에서 큰골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고 그 유래는 이웃 원주시와 다른 지역의 지명을 참고해 보면, 과거 어느 시기 <동네를 지켜주던 신성한 수살(水殺)나무, 즉 위(爲)하던 나무>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이 나무(영산靈山나무)가 있는 땅'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산(靈山)이란 ‘신령스러운 산, 즉 위하는 산을 말하고 <영산나무>란 신령스러운 산에 있는 나무, 산제당에 신체로 모시는 나무‘ 정도로 추측되는데 신목(身木)이라고 여겨집니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과거 어느 때 산제당이 마을과 숲의 경계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등어리짓께>는 봉골재에서 산제당으로 가는 길 아래 밭 일대를 말합니다. 사람 몸의 등과 허리를 함께 일러 <등허리>라 하므로 <동네 뒤편 등허리를 이루는 부근의 땅>이란 뜻입니다.
<봉골재>는 범동과 기동을 잇는 작은 산고개를 말합니다. 과거 신작로가 없던 시절에는 이 고개를 통해서 이웃마을(기동)로 가던 지름길이었으나 지금은 농로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잿배기>는 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라고 하는데 왼들로 가는 길에 있었다고 합니다.
<양지끝>은 마을앞 봄밧등 너머 기계유씨 집안 말림 일대로 <햇볕이 잘 드는 등성이>란 뜻입니다. 족보를 보면 양지말(陽地末)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곳은 사시사철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고 충주호와 멀리 월악산이 보입니다. 앞이 탁트이고 전망이 좋아 몇몇 집안에서 산소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장작골>은 봉골재 너머 텃골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큰 산등성이(텃골 뒷산) 전에 있는 작은 등성이 사이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장작골은 100여년 전 충주군 광무양안(光武量案)에 장자곡(長子谷)으로 나오는데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전에 큰부자 장자(長者)가 살았다고 합니다.
후에 <땔감으로 쓰는 장작(長斫)을 해오던 골짜기>의 뜻으로 새겨서 <장작골>로 바꿔 불렀습니다. 이곳의 물은 차가워서 여름에도 손발을 오래 담그기가 어렵습니다.
<으름밭골>은 장작골 위 막골 가기전에 있으며 산열매 <으름이 많은 골짜기>란 뜻입니다.
<동산골>은 범동마을 앞산(기계 유씨 종중산)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과거에 밭을 경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산골은 야트막한 산을 동산이라 하는데서 붙은 이름입니다. 즉 <동산골>은 ‘작은 골짜기, 동네에서 가까운 산골짜기’란 뜻입니다.
<큰골>은 산제당이 있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주변 골짜기보다 크다는 것이지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도 큰 골짜기라는 건 아닙니다. <큰골>에서 조금 올라가면 양지바른 돌서렁이 나오는데 이 곳을 <큰골양지>라고 합니다.
<산지당골>은 집너메도랑 위 큰골에 있는 산제당(山祭堂>에서 유래한 골짜기 이름이며, 사시사철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기동, 범동, 민마루 주민들이 여름철(7월초 택일하여) 산제(山祭)를 지냈으며 흔히 <산짓고사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지내지 않습니다.
산지당골에서 흐르는 도랑을 <집너메도랑>이라고 합니다.
산지당골 위에는 예전에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해서 <절터>라고 부르나 지금은 그 흔적이 희미합니다.
<숫돌메기>는 전주이씨 종중 묘가 있는 부근을 말하며 그 뜻은 이곳에 있는 돌색깔이 마치 불에 그을린 숯처럼 거무스름하기 때문에 <숯돌메기>라고 부른 듯합니다.
이 부근의 돌은 철분(Fe)을 많이 함유한 편마암으로 검은 편입니다. <메기>는 땅이름에서 뒤에 붙는 말입니다.
최근에 이곳 숯돌메기는 계명산을 찾는 등산객이 지나는 통로가 되었는데 산능선으로 올라가다보면 도중에 평택임씨 집안 묘가 길가에 있습니다. 꽤 높은 곳에 묘가 있는데 예전에는 풍수를 생각해서 높은 산에 묘를 쓴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마을에 있는 추억이 서린 장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뒷동산>은 마을 뒤편에 있는 산을 말합니다. 지금은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예전에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낙엽송으로 조림하였었고 TV안테나를 세웠고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망우리를 돌리곤 하였습니다. 대개 어느 동네나 마을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뒷동산이라 일컫습니다.
이곳에서 가까운 집너메 도랑에는 <빨래터>가 있었습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산지당골에서 내려오는 맑은 도랑물로 빨래를 하여 <빨래터>라고 하였는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물움벙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대리석광산이 생기는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명배나무>는 예전 마을회관(지금은 사라짐) 옆에 있던 돌배나무 고목을 말합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밍배나무>라 하였는데 맛이 좋은 배라서 <명배나무>라 부른 듯 하며, 나무속이 썩어서 넘어질 우려가 있어 베어 버렸습니다. 봄철 배꽃이 하얗게 피면 그 운치가 장관을 이루었고 깊은 밤 소쩍새가 이 나무에 와서 울곤 하였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노랗고 단 배가 주렁주렁 열려 따먹은 기억이 납니다.
<곳집>은 상여를 보관하던 집으로 <곳집 혹은 꽃집>으로 불렀으며 마을에서 충주댐잔디광장으로 나있는 마을진입로 옆에 있었습니다. 마을 앞에 있어 외관상 좋지 않고 여러 가지로 이유로 철거하였습니다.범동, 민동, 기동 삼동네 사람들이 초상이 나면 상여를 쓰곤 하였습니다.
범동마을에는 동네 양편으로 서낭당이 있었습니다. 민마루 방향 즉 우측에 있는 성황당을 <할머니성황당>이라 하였고, 텃골방향 즉 좌측에 있는 성황당을 <할아버지성황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성황당>은 말채기나무(마차나무), 팽나무, 쉬나무(소등나무)와 오래된 머루덩굴을 신체로 모셨고, <할아버지성황당>은 느릅나무, 말채기나무, 살구나무, 오래된 노박덩굴을 신체로 모셨는데 그리 오래된 나무가 아닌 것으로 보아 원래 나무는 고사(枯死)하여 없어진 듯합니다.
매년 정월 초에 날을 잡아 제를 올렸습니다. 예전에 초상이 나면 할머니성황당을 피해 상여를 메고 빙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할머니성황당은 2021년 여름에 파괴되었습니다. 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성황당이라 했는데 실지로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고 보통 서낭당이라 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길 위치에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구분한다는 거지 실제 주민들은 별생각 없이 서낭당이라 했습니다.
4)民宗(민종) 민마루
民(백성 민), 宗(마루 종): '마루’는‘큰, 높은, 평평한, 으뜸’등의 의미이나, 여기서는 마을이름 끝에 쓰여 '마을'의 뜻이 있습니다. 민종(民宗)은 우리말 마을이름 '민마루'를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민(民)은 우리말 <아래>의 뜻을 가진 말을 쉬운 한자 민(民)자로 <음옮김>하고, <마루>는 '마을'의 뜻이며 한자 종(宗)으로 <뜻옮김>한 것입니다. 대소원면 장성리 성종(城宗)마을은 본래 <성마루>이며 이곳 또한 <마루>를 <宗>으로 옮겼으며 그 뜻은 <마을>의 뜻입니다.
'종민동에서 남한강 하류(下流) 즉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란 의미에서 유래하였고, <웃말>, <아랫말-아름말>로 나누어지는데, 한자로 민동(民洞)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민동(民洞)마을에는 청주한씨(淸州韓氏), 밀양박씨가 많이 살았습니다.
주요한 지명으로는 <아름말등갱이, 잿마당, 마릿들, 봄데미, 꽃등마루, 삼박골>이 있습니다.
<아름말등갱이>는 범동과 민마루 경계를 이루는 작은 등성이입니다. 청주한씨 집안 종중산으로 묘를 많이 썼고 예전에 소풍을 가던 곳이기도 합니다.
<등갱이>는 산능선, 산등성이란 뜻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전봇대를 옮기기 위해 헬기장이 있었고, 잔솔들이 있었으나 머나먼 기억속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잿마당>은 <웃말> 전나무가 있는 곳 주변으로 <재 즉 작은 고개 등성이가 평평한 곳>이란 뜻입니다. 이 곳 아래에 대리석광산이 있었으며, 현재는 택지개발후 전원주택이 여러채 들어서는 바람에 주변 지형이 크게 변했습니다.
<마릿들>은 다른 지방에도 많이 나타나는 지명으로 마루처럼 평평하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랫말 앞쪽에 있는 들로 논과 밭이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과정에서 지형이 크게 변했습니다.
<봄데미>는 충주댐 진입로 건설과정에서 파괴되었고 같은 지명이 충주시 앙성면에도 있습니다. 과거 용탄동 사래실로 가는 길 옆 강가에 높은 절벽을 이루는 큰 바위가 있었으며, 그 뜻은 <높은 바위절벽에서 보는 강가 풍경이 아름다워 주변 경치를 보는 바위더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경기도 구리시의 <범데미, 범더미>를 <범이 자주 나타났다>고 풀이하는 걸 볼 때 범과 연관된 이름 같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강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작은 전망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바위 아래에는 옻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꽃등마루>는 민마루와 용탄동 사래실과 경계를 이루는 산등성이로 송전탑 부근을 말하며 <참꽃 혹은 철쭉꽃이 피는 산등성이 혹은 산마루>의 뜻입니다.
<삼박골>은 윗말 위편 골짜기를 말하며 전국에 흔한 지명입니다. <산쪽에 있는 밭 혹은 산을 개간하여 붙여먹던 산전(山田)>이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삼박골을 베를 만드는 대마를 심던 밭이나 산삼(山蔘)과 연관짓는데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족보에는 삼전곡(三田谷)으로 옮깁니다.
민마루는 아름말이나 웃말이나 최근에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전원주택을 지었고, 충원교 부근은 대형 음식점과 펜션단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하종마을에 이어 크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 밖의 지명들1
민마루 충원교를 지나 강건너편에 있는 <갈미봉> 아래 골짜기를 <높은벼랑골>이라 하고, 충원교에서 충주댐으로 조금 지나면 있는 골짜기를 <철철바위골>이라 합니다. 비가 많이 올 때 <철철바위골>은 멋진 폭포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이틀 지나면 폭포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높은벼랑골>은 벼랑이 높고 험한 비탈을 이룬 것에서, <철철바위골>은 골짜기가 급하여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한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치마벼루 혹은 치메벼로>는 충원교에서 충주댐까지 지등산(地登山) 자락이 마치 여인이 입는 치마를 펼쳐놓은 모습같다고 이름 지었고, <며느리소>란 전설이 있습니다.
민동마을 맞은편 건지마을(건잣)에서 지등산으로 오르는 봉우리를 <갈미봉>이라 부르고, 범동마을 맞은편 지등산에 있었던 마을을 <갈모실>이라고 하며 이 갈모실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을 <개차구렁>이라고 합니다.
<갈모실>에서 지등산 정상쪽 봉우리를 <관모봉>이라 하고 이 봉우리너머 선착장방향으로 예전에 있었던 마을을 <거무뜽이 혹은 거무실>이라하고, 충주댐 우안(右岸) 물레방아가 있는 공원 부근에 있었던 마을을 <지대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갈미봉>은 예전에 비가 올 때 쓰던 모자인 <갈모처럼 생긴 봉우리>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달리 <관모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갈모실>도 위 <갈미봉>과 같은 뜻에서 나왔고, <관모봉>은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인 <관모(冠帽)처럼 생긴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 됩니다.
<갈모실>, <관모봉>, <갈미봉>은 서로 연관된 이름이며, 동량면 소재지 관암마을(갓바위)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랜 옛날 조상들이 머리에 쓰는 <갓>, <갈모>, <관모>를 바위나 봉우리의 모습을 보고 연상하여 이름지어 불렀습니다.
<개차구렁>의 <개>는 <강>의 뜻이고 <개차>는 개천(開川)의 방언 같습니다. 지도에는 <개차골>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강을 예전에는 흔히 <개>라 불렀는데 이곳에서 상류 쪽으로 포탄(浦灘)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가여울, 개여울>이라 불렀습니다.
<개차구렁> 부근에는 <저녁바우>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숲이 울창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과거 농사일을 하다가 해거름에 햇볕이 이 바위에 비칠 무렵이면 저녁식사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저녁바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일종의 해시계인 셈인데 옛분들의 소박한 삶이 서려있습니다.
<지데이>란 마을이름은 <지등산地登山>의 <지등地登>을 편히 발음한 이름이고 <거무실 혹은 거무뜽이>는 한자로 <흑곡黑谷, 흑동黑洞>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서 이 곳 <땅이 검어서 즉 흙빛깔을 따서 마을이름을 지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일대는 구들을 놓던 돌인 구들장(구들삐)에 쓰이던 점판암(粘板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암석이 풍화된 토양은 검고 충주댐 공사전 점판암을 캐던 광산이 지금 본댐 막은 자리 위에 있었습니다. 현재 충주댐 우안 물레방아가 있는 곳은 유원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 이곳에서 선착장으로 조금 올라가면 휴양림인 드림숲이 있습니다.
그 밖의 지명들2
<토끼벼루>는 봄데미에서 사래실 사개구미전 덤바위통까지 신작로가 나기전 강으로 난 좁은 길을 말합니다. 강가에 작은 길이 벼랑 위에 있다고 <토끼벼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벼루>는 벼랑의 옛말입니다. 문경지방에도 <토끼벼루>가 있었습니다.
민마루에서 사래실로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강가에 점점이 있는 바위들을 <덤바우통>이라 부르는데 <덤바위>란 여러 바위가 무더기로 널려 있는 곳이나 얹힌 바위를 말합니다.
<얼갤>은 불암정사 인근 규석광산을 말하며 '돌이 얼기설기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얼갤'은 '얼개'가 변한 말로, 바위가 얼기설기 놓여 있는 곳을 '돌너설, 돌서렁, 너덜강'이라고 합니다.
<사개구미>는 <사근이,사근개,사갤>라 부르며 사래실 원대가든(지금은 사라지고 상호가 바뀜) 일대를 말하며, <사沙> 즉 모래가 많은 우묵하게 들어간 땅이란 뜻입니다. 개는 여기서 강(江)의 뜻이고 예전에는 개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구미>는 땅이 굼턱지거나 우묵하게 들어간 땅이나, 강이 휘어져 들어간 곳에 붙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과거 충주댐 건설전에는 지금보다 강 수위가 높았고, 홍수가 지면 강상류에서 모래가 쓸려 내려와 쌓이곤 하였습니다.
<애그방구뜽>은 사래실 마을 앞 야트막한 산 능선에 있는 바위를 말합니다. <애그방구뜽>이란 '애기바위가 있는 등성이'란 말의 방언입니다. 애기를 낳아 달라고 소원을 빌던 바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담>은 벌판(버레)에 딸린 마을이었으나 1972년 수해로 사라졌습니다. 과거 이곳으로 충주시내에 있는 학교에서 도 막은대미를 넘어 소풍을 오곤 하였다고 합니다. 신담이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이름 지은 듯합니다. 여기서 <담>이란 앙지뜸, 셋집땀이라 할때 <뜸, 땀>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충청북도 내수면연구소> 인근을 말합니다.
<뱃터거리>는 사래실 벌판(버레)에서 동량면 조돈으로 배를 타던 나루터를 말합니다. 건너편 <조돈나루>와 함께 40여 년 전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조돈나루에서 강상류로 조금 위에 동량대교가 놓였습니다. 예전 나루터가 다리가 놓인 곳이 많은데 최단거리이고 주요 길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터골 혹은 작은골>은 현재 법정사가 있는 곳을 말한답니다. 어릴 적 사월 초파일에 어머님을 따라 간 적이 있습니다. 작고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한 절이었는데 나중에 찾아가니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금 법정사 건물은 그새 몇번 주인이 바뀌고 새건물로 깔끔하게 단장하였습니다.
<물방아터골>은 용골에서 절골로 올라가는 길 도랑에 있는 옛날 물레방아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말합니다. 예전에 직접 찾아가보니 바위에 새긴 방아확이 개울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래 다시 찾아가보니 흔적없이 사라졌습니다. 이곳은 계명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워낙 많기에 도랑에 보(작은 저수지)를 만들면 물레방아를 충분히 돌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쉽게 볼 수 없는 흔적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도 강원도 지방에 물방아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충주 인근에서 이러한 흔적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절골>은 용골 위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현재는 몇 가구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마을 위쪽으로 계명산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한자로 사동(寺洞)으로 표기합니다.
<셋집담>은 용골마을에서 목행방향으로 가는 도로옆 <한국필터> 인근을 말하며, 세집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전에 이곳을 통해서 철길을 건너 목행동 목수로 작은 신작로가 나 있었습니다. 지금 충북선 옆을 따라 신작로가 나 있었는데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도로가 옮겨졌습니다.
<양챙이 혹은 양천이>는 <알바니> 인근에 있던 마을로 한자로 양촌(陽村)으로 옮깁니다. 이곳은 충주댐 공사 진입로가 마을을 가르고 나 있었습니다. 교회와 과수원 그리고 고압철탑이 있었고 둔지벌로 올라가는 소로가 있었는데 나중에 산업단지에 수용되어 흔적이 없어졌습니다.
<둔지벌>은 양챙이 위 계명산쪽으로 있던 마을로 둔지는 <평평한 언덕을 이루는 곳>을 말합니다.
<학골>은 지금 동화약품 공장에서 계명산쪽으로 있던 마을로 확(방아를 찧을 때 사용하는 돌절구)을 닮은 확샘이 있다고 <확골>로 부르다가 현재는 <학골>로 바꾸어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구동(臼洞)으로 표기합니다.
<바깥말>은 <학골>에서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 붙인 이름으로 한자로 외촌(外村)으로 표기합니다.
<참나무정>은 확골 서쪽에 있었고 참나무 숲이 우거진 둔덕을 말합니다. 달리 <왱메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가린여울>은 한국폴리텍대학 가기전 구름다리 동쪽에 있었던 마을입니다. 가린여울은 강바닥에 바위가 있어 물이 적을 때에는 한줄기로 흐르지만, 물이 많을 때는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진다고 <가릿여울, 가린여울>이라고 붙인 이름으로 한자로 기탄(岐灘)으로 옮기고, 용탄동(龍灘洞)의 탄(灘,여울 탄)자는 가린여울의 탄(灘)자에서 따왔으나 오래전에 모조리 충주산업단지로 편입되었습니다.
<옹기점>은 가린여울 마을에서 충북선 철길따라 강상류로 조금 위에 있던 옹기를 굽던 곳을 말합니다. 부근에 있는 좋은 질흙과 남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뗏목을 인근 강에서 사서 옹기를 구웠다고 하는데 지금 목행동 미륵이 한국트랜스 공장인근으로 옮겼고 80년대 중반 사라졌습니다.
주인은 염모씨라하며 가린여울 위에서 옹기점을 열 때는 부근 남한강에 뗏꾼들이 뗏목을 세워 놓고 하룻밤 숙박했다고 합니다. 60년대 중반까지 떼배가 다녔다고 하니 이 무렵까지 옹기점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가린여울에서 계명산 도랑 위쪽으로 <재넘이>라 했고, 재넘이에서 시작되는 양쪽 골은 <큰골>, <작은골>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곳이 지금 어디쯤인가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용탄동은 충주산업단지 조성으로 사래실과 용골마을을 제외하면 모조리 없어진거나 다름없습니다. 학골과 외촌마을도 충주5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최근래 없어졌습니다. 학골, 외촌마을 일부 농가가 산비탈에서 과수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동량면과 사래실 사이에 동량대교가 놓이면서 장차 용탄동에서 연수동으로 터널이 뚫릴 예정이라고 하니 용탄동은 앞으로 더 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량면 조둔 뱃터 느티나무, 오래전 사진임,
인터넷자료>
<동량면 조둔 남한강변 마당바위, 건너편이 사래실 사개구미, 오래전 사진임, 인터넷자료>
<용탄동 가릿여울 부근 도로, 지금 구름다리 조금 지나 찍은 사진, 인터넷자료>
<위 세 사진은 용탄동 둔지벌 일대 모습으로 용탄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 모습임, 인터넷자료>
<학골, 외촌마을 표지석, 2021년 10월 15일.
현대엘리베이터 뒤편에 있다.>
첫댓글 위 글은 2012년 9월달에 쓴 것으로 지금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한 것도 있고 부정확한 것도 눈에 뜨입니다. 이는 2018년 12월말에서 2019년 1월초에 여러 어르신들을 방문하고 구술내용을 최근에 정리하다보니 새삼 느낀 것입니다. 물론 최근에 정리한 내용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름 현지조사를 한셈으로 가치가 있고 내가 막연히 책을 보고 쓴 것 중 많은 부분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쓴걸 많이 고쳐 새로 썼습니다.
이 점 감안하고 양쪽자료를 보면 종민동 마을유래와 마을 곳곳의 땅이름은 완성(完成)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종민동의 마을이름과 작은 땅이름을 정리하면서 이제 한세대가 확실이 저문 것을 실감합니다. 물건이든 땅이름이든 그걸 쓰던 사람들이 사라지면 외면받고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현실은 점점 각박해지고 이제 중요한 지명은 그렇다치고 작은 지명을 찾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수몰이 되거나 매립되고 개발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했고 수많은 지역이 사람들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고 직업이 바뀌며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외면받게 되었습니다
계명산 골짜기 골짜기마다 있었던 이름들과 유래들도 우선 사람들이 접근할 일이 없어지면서 태반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동에 <호반마을>이 생겨났고 앞으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날 것입니다.
의외로 조회수가 많습니다. 종민동은 자그마한 지역이고 예나 지금이나 그리 주목받은 지역이 아닙니다.
1)종민동 범동(凡洞)의 땅이름
2)종민동 민마루(民洞)의 땅이름
3)종민동 텃골(基洞)의 땅이름<1>
4)종민동 텃골(基洞)의 땅이름<2>
5)종민동 하종(下宗)의 땅이름<1>
6)종민동 하종(下宗)의 땅이름<2>
7)종민동 상종(上宗)의 땅이름<1>
8)종민동 상종(上宗)의 땅이름<2>
9)종민동 상종(上宗)의 땅이름<3>
을 검색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