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 언론]
●히틀러 직접 개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와 사관학교 통폐합? 2026.09.21.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어 파멸을 초래해 뒤늦게 통탄한 제2의 '파울루스'가 되지 않기를-
[김영교 예비역 육군준장(공학박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 패퇴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베를린 함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이다.
현장의 전문성을 무시한 히틀러의 직접 개입은 현재 유사하게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육·해·공사 통합론'에 유의미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의 전투 상황을 요약한다.
1940년 독일군은 서부전선인 유럽을 휩쓸고, 이후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초기 전쟁에서 뛰어난 작전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히틀러의 군사작전에 대한 직접 개입이 확대되었다.
1942년 8월 독일 파울루스 사령관 지휘 하의 제6군은 여름 공세인 '청색작전(Operation Blue)'을 실시했다. 최초 전략 목표는 코카서스의 유전 확보, 볼가강의 교통차단, 소련 남부의 경제·군사기반 약화였다. 볼가강은 남북으로 연결된 강으로 당시 미국 및 소련 남부의 군수물자 지원의 수송로였다.
파울루스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신속히 진격했다. 도시에 대한 집중 항공포격으로 폐허가 되면서 9월에는 시가지 근접전이 시작되었다.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좌·우 측면은 루마니아 등의 동맹군이 맡았다.
11월에는 거의 도시 90%를 점령하고 볼가강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스탈린에 의해 '민간인 소개령'까지 금지된 상태에서 소련군·시민이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전장이 확대된 북쪽 종심에서는 대규모 소련군이 '천왕성작전(Operation Uranus)'에 따라 내려오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루마아니의 남북 양 측방을 공격해 연결하면서 독일 제6군 30만여 명이 포위망에 갇혔다.
파울루스는 포위된 후 철수를 건의 했으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군수 물자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괴링이 지원을 장담했던 공중 보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만슈타인 돈 집단군은 포위된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겨울폭풍작전(Operation Winter Storm)'을 실시하여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진격했으나, 제6군은 안에서 포위망을 뚫고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 사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고리작전(Operation Ring)'으로 독일군 포위망을 축소해 들어갔다. 히틀러는 '원수(별 다섯 개)는 절대 항복하지 않고 자결한다'는 의미로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으나, 파울루스는 뒤늦게 후회하며 1월 31일 자신이 먼저 항복하고, 이어 잔류병 9만여 명이 2월 2일 전원 항복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다. 이후 소련 주코프 총사령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2년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가 작전적·전술적 수준에서 과도하게 개입하여 전문적인 군사 지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파울루스는 포위망을 돌파하거나 철수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수 차례 건의하였다. 히틀러는 정치적·상징적인 이유로 현 위치를 고수하도록 명령했고, 만슈타인이 구출작전을 시도하는 동안에도 제6군의 독자적인 돌파·철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을 연하여 있는 도시이다. 도시명은 원래 '차리친'이었으나, 스탈린이 이 곳에서 '적백 내전'을 승리한 후 자신을 '혁명 영웅화' 하기 위해 개명한 도시이다. 히틀러는 이런 도시명에 빠져 군의 전략적인 목표가 정치적·상징적인 목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략적인 목적인 '볼가강을 차단하고 소련 남부를 압박'하는 것에서 전투가 진행되면서 “스탈린그라드를 반드시 점령한다”로, 결국에는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로 변질되었다.
다음은 독일군에게 유리한 기동전이란 전쟁수행방식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불리한 소모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독일군은 항공 집중포격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시가지 안에서 건물 하나하나를 소탕하는 동안, 북쪽과 남쪽 방향에서 좁혀오는 대규모 병력을 차단하지 못했다. 포위된 이후에도 구원군인 만슈타인과 협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하여 뚫고 연결하는 작전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적인 직접 개입이 있었다 하더라도 파울루스도 책임이 크다. 파울루스는 참모로서는 '천재'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지휘관 경력이 별로 없이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예스맨 스타일'로 평가된다. 정치지도자의 잘못된 지시를 현장에서 수정하지 못한 지휘체계의 결함이다.
결국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파울루스 제 6군 32만여 명이 궤멸되고 살아남은 9만여 명이 결국 포로가 되어 겨우 6,000여 명만 돌아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단일 전투로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로 독일·추축군 85만 명을 포함 전체 200만여 명의 사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베를린 함락과 연결되는 역사적인 대전환점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제6군의 파울루스와 대비되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롬멜과 비교는 또 다른 교훈을 주고 있다. 1941년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이후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의 롬멜은 전술적으로 승리를 계속 이어가면서 1942년 토브룩을 함락시키고 이집트까지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작전선이 길어지면서 군수문제로 1942년 10월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배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상당히 간섭했으며 롬멜에게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파울루스가 지나치게 명령에 종속한 반면, 롬멜은 전황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자 후퇴를 명령했다. 북아프리카군을 상당히 보존하면서 튀니지로 철수했다. 롬멜은 상급자의 전략목표에는 복종하되,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현장 지휘관의 독립적인 판단과 이견을 제시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했다는 교훈이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지휘체계'의 문제를 '사관학교의 통합·이전' 문제로 직결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의사결정 구조에서 유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은 처음부터 모든 판단을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황이 변화하고 기존 판단의 문제가 드러난 이후에도 전략적·정치적인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정치적인 목표에 종속되어 현장 지휘관으로서 파울루스는 철수·돌파·연결 같은 작전으로 전투력을 보존하면서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 대응하지 못한 문제점이 더욱 크다.
'사관학교 통합·이전' 문제도 비슷하게 유추할 수 있다. 미래전에 대비하여 '합동성 강화'가 아닌 사관학교 통합으로 목표가 출발되었다. 최초에는 국민들이 잘 모르고 정치권에서도 크게 관심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현 시국의 쟁점 이슈로 부상하였다.
이재명 정부는 '육·해·공사 통합'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합동성, 전작권 전환, 미래 전, 다영역작전, 규모의 경제 효율성, 인재육성, 한솥밥 식구론, 인구감소, 지원율 하락, 다양성, 주변 첨단인프라 지역 등 다양한 논리 아닌 궤변을 지어내고 있다.
합동 및 연합작전은 통상 작전-전술급 이상 제대에서 실시하는 것이다. 육·해·공중, 우주·AI·사이버·전자전 등의 다양한 전력 요소를 다영역에서 통합(Synchronization)하는 것으로, 이는 사전에 혼합(Mixture)하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미래 전은 하나의 전쟁수행 방법이 아니라 과학기술이나 전장환경의 변화가 전쟁 수행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통상적인 개념이다.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이론은 규모가 커지면 '단위 당 생산량 증대'라는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이론이나, '생산조건이나 환경'이 동일한 경우에만 적용된다. '바다가 없고, 활주로가 없는 또 기존의 6~7개 부대를 해체·이전'해야 하는 대전 자운대의 환경 조건은 오히려 '규모의 불경제'가 발생해 더 큰 손해를 끼친다.
국방부장관은 스탈린그라드 교훈에서 봤듯이 현장 상황을 판단하여 주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계속 밀어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