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단리 법왕사
제대하고 싶다!
함영연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그곳을 떠올리면 고등학교 2학년 오월의 어느 날이 저수지 물결처럼 일렁인다.
우리 마을에는 법왕사라는 큰 절이 있다. 주위 풍경이 자연과 어우러져 아늑함과 웅장함을 자아내고 있는 절이다.
그 절에 딸린 선방에는 고시생들이 기거하며 풍운의 꿈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몇 명은 사법고시에 붙어서 금의환향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미래가 안개 같았던 고등학생 시절, 오로지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막연히 남산 목멱골에서 글만 읽는 선비를 떠올려보곤 했는데, 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월 어느 날, 그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생겼다.
동네 친구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서 법왕사 놀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다른 날 같으면 적당한 이유를 들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담을 타고 피어나는 장미 넝쿨 너머로 앞산을 보니 아카시아꽃이 지천으로 피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홀리듯 따라나섰다.
친구들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재잘 거렸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굴러가는 말똥구리를 보고도 웃어대는 때이니……. 그렇지만 난 엄마가 병원 신세를 자주 지고 있어서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껏 웃을 수 없었다.
절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단청의 화려함과 정교함은 여전했다. 그때 마주 오는 몇 명의 아저씨와 맞닥뜨렸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대학생이냐고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친구가 대뜸 대답했고, 몇 초의 침묵이 흐른 뒤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우린 선방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인데, 미팅하는 거 어때요?”
그들이 제안을 했다. 헉! 글만 읽는 선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날 친구들의 호기심에 덤으로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는 절 계곡으로 가서 파트너를 정했다. 당시 남자 손만 잡아도 큰일 나는 줄 알던 때라 어색하고 멋쩍고 수줍고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면서도 한 아저씨한테 시선이 갔다. 말이 없고 우수가 깃들어 있는 모습! 공부를 너무 해서 힘들어 그런가, 짐작하고 있는 동안 파트너가 정해지고 그 아저씨와 나만 남게 되어 자연스레 파트너가 되었다.
다른 팀들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호칭도 아저씨에서 오빠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입에 풀칠한 냥 묵묵히 걷기만 했다. 저수지까지 왔을 때 아저씨는 다리 아프지 않느냐며 잠시 쉬자고 했다. 우리는 저수지 둑에 나란히 앉았다. 물결을 따라 침묵이 흘렀다.
“제대하고 싶다.”
적막함을 깨고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슬그머니 쳐다보니 얼굴에 우수가 가득했다.
“난 제대가 필요해.”
또 그 말이었다.
“군인도 아닌데요.”
아저씨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난 여기보다 더 시골이 고향이야. 그곳에서 주목을 받으며 지냈고 내로라하는 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했어. 이제 부모님은 개천에서 용 나기를 고대하고 있지. 그런데…….”
아저씨는 잠시 저수지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난 언제나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어. 그래서 온전한 나로 살아본 적이 없어. 부모님은 뼈 빠지게 대학 뒷바라지를 하고 지금은 또 사시 준비하는 아들을 위해 고생고생하고 있지. 그 생각하면 얼른 사시 패스해서 부모님 고생을 덜어드려야 하는데, 이 길이 쉬운 길도 아니고……. 아, 제대하고 싶다!”
아저씨의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도 미래에 대해 불안했던 터라, 아저씨의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제대할 때는 하더라도, 먼저 아저씨가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뜻을 세우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잖아요.”
아저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에 잡히는 들풀을 천천히 뜯었다. 그리고 헤어져 집에 왔다.
세월이 흘러, 나는 영문학과에 합격하고도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등록을 못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서울로 유학 온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얘기할 때 난 그들의 커피 값을 내주곤 했다.
그런데 이 생활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이 유니폼은 내가 입고 있을 옷이 아니다! 는 생각이 몰려와 행복하지 않았다. 그 무렵 고등학교 시절 오월의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말하던 ‘제대’라는 말이 생각났다.
‘제대하고 싶다! 제대하고 싶다!’
그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그런데 마법이라도 걸린 듯 의욕이 솟구쳤다. 그래서 배부른 돼지는 되지 않겠다, 배고픈 문학도가 되겠다! 는 결심으로 제대를 선언했다.
그리고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 후로 좌절도 많이 하며 문청시절을 보냈고 마침내 문학상을 받고 작가가 되었다. 그때 과감히 제대를 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열등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작가가 되어 책이 출간되고, 도서관에 ‘작가와의 만남’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도서관 담당자가 내 약력을 보더니 강릉 출생이면 혹시 강릉여고를 졸업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했다.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강릉여고하면 친근하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셨는데요?”
“그 자식, 법대를 나와서 강릉에 있는 절에 들어가 사시 준비를 했거든요.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데 사시를 세 번이나 떨어지니 절망스러워 당장 접고 싶었대요. 그때 만난 강릉여고 학생이 저수지 둑에서 해 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입지(立志)를 했다는 거예요.”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아, 세상이 이리도 좁다니! 그런데 강릉여고 학생이란 걸 어떻게 알았지?
“버스 타고 가다가 강릉여고 교복 입은 그 학생을 봤는데, 대학생이 아니란 게 탄로 나서 무안해 할까 봐 아는 척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더군요.”
도서관 담당자는 내 궁금증도 해소해주었다. 나는 그 아저씨가 제대로 제대를 한 것에 박수를 보냈다. 그 뒤로 나는 몇 번의 제대를 더 해야 했다. 불안, 원망, 게으름……. 그 중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서 열등감으로부터 제대한 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에 있는 법왕사와 저수지 둑은 제대라는 말과 함께 여고시절 한 장의 수채화로 남아 있다.
함영연(咸泳蓮)
강릉의 산과 들, 바다를 품으며 자란 어린 시절이 참으로 보배롭다. 내 글 정서의 8할이 강릉의 자연이 준 정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강릉에 보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영상 시나리오와 소설 전공임에도 운명처럼 다가온 동화! 소명의식을 갖고 호흡하듯이 동화를 쓰고 있다.『회장이면 다야?』『돌아온 독도대왕』『꿈을 향해 스타오디션』『명심보감 따라가기』 등 다수를 출간했다. 현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1983년도 강릉지역 고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83포럼에서
<<대관령 동쪽으로 떠나는 추억여행>>이라는 수필집을 냈답니다.
거기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솔향 님도 같은 필진이니, 올려 주세요.
ㅎㅎ 네네.
두분 선생님 글 이곳에서 읽었으니 책은 구입하지 않아도 될려나. ㅎ 보기 좋아요.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제대!
선생님~제대로하셨네요.
고등학생이 법학도의 마음을 다잡아주다니.
당찹니다.
그 당참이 지금의 자리에 계신거죠.
오늘 다시 읽었습니다.
마음의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조언으로 한 법학도가 흙속에 묻칠뻔 했는데 보석이 되었네요.
그 분의 가슴속에는 갈래머리 여학생으로 소중이 간직 될겁니다
멋진글 가슴속에 새기며 제가 제대해야 할것이 무엇인지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가에게 있어서는 작은 추억도 작품으로 탄생되는 군요.다발요
읽는 내내 꿈틀거리며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멋진 작품집을 내셨군요.
제대하고 싶다! 좋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일, 참 쉽지 않는데 제때에 제대 잘 하셧습니다. ㅎㅎ
모두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지금도 제대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대라는 말이 이렇게 다가올 수 있네요. 남성들의 전유 말인 줄 알았는데...
감동깊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아름다운 수채화 한 편이 두 눈에서 잠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글에서 힘을 얻습니다.
제대하고 싶다!
나의 단어가 여기서 숨바꼭질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사법고시 합격이면 개천에서 용난다가 아니라 용을 잡아 개천에 빠뜨려야 할 정도인데...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추억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