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토마스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의 해, 청양 다락골 지금 풍경..
2021년, 한국 천주교회는 첫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탄생 200주년 기념일인 3월 1일에
그분의 사목 거점이었던 배티성지 대성당에서
청주교구장인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외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기념 미사와 행사를 진행했다.
장 주교는 강론에서
"최 신부님은 사람들이 저마다 갈구하는 참된 영광이 십자가의 능력 안에 있음을,
순교야말로 참된 영광인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가르쳐 줬다"며
"최 신부님의 가르침은 믿음의 기초와 삶의 방향이 됐다.
최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충남 청양 다락골 인근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복자 이성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 최초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 신부는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1850년 초부터 11년 6개월간 전국을 돌며 미사를 집전했다.
최 신부는 1861년 6월15일 경남지방 사목 활동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에게
결과를 보고하러 상경하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경북 문경에서 선종했다.
'피의 순교자'로 1984년 성인에 시성된 김대건 신부와 달리
최 신부는 순직이어서 시성 명단에 들지 못했다.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조선 팔도를 발로 누빈 최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불렀고,
2004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을 청원했다.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는 6촌지간이다.
두 사람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837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설치된 ‘조선신학교’에 입학한 한국 최초 신학생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제품을 받고
그해 10월 12일 조선에 들어왔으나, 관헌에 붙잡혀 다음 해 9월 16일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아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됐다.
7년 6개월 동안 6번의 시도 끝에 어렵게 조선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밤낮으로 사목 활동을 펼치다 1861년 병을 얻어 선종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는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성지에 있다.
김대건 신부가 ‘피’로 신앙을 지켰다면,
최양업 신부는 길 위에서 ‘땀’으로 신앙을 퍼뜨렸다.
1849년 12월 3일 조선에 들어온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 먼저 들어온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다.
당시 두 선교사가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돌봤는데
서양 선교사의 사목 활동에 제약이 많았기에,
서울과 인근 지역을 제외한 5개 도(충청, 전라, 경상, 강원, 경기 일부)의 사목을
최양업 신부에게 위임했다.
1850년 초부터 최양업 신부는 산간벽지에 숨어 사는 신자를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100개가 넘는 공소를 해마다 2750㎞를 걷거나 말을 타고 방문했다.
그가 포교하는 곳에서는 가족 전체 또는 마을 전체가 입교하는 등 성과가 컸다.
그가 쓴 연례 사목 보고서를 보면 조선교구 신자 수가
1850년 1만1000명에서 1855년 1만3638명, 1859년에는 1만6700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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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가 한글로 번역한 한국 천주교 최초 공식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목판. |
최양업 신부는 장마철 휴식 기간을 이용해 사목 보고서 작성과
각종 전례서 번역에 열성을 다했다.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천주가사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