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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 : 신화
단군 신화
단군 신화(檀君神話)는 한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의 건국 신화이다. 상고자의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등 고려 시대에 저술된 역사서에 처음 나오며, 《조선왕조실록》, 《응제시주》 등 조선 시대 여러 문헌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단군신화의 내용
《삼국유사》(三國遺事)[2] 기이(紀異) 제1편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배경
단군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 사회는 선민 사상과 홍익 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건국하였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신앙을 가진 농경 사회였음이 인지되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곰’의 선택적 의미는 호랑이와 곰의 경쟁은 투쟁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리며 참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영웅성보다는 덕성(德性)을 상위의 가치(價値)로 두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동굴 속에서의 동면을 거쳐 봄에 다시 활동하는 곰을 통하여 자연의 순환과 재생력(再生力)이 인간에게도 파급되기를 희구하는 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곰’을 토템으로 삼았던 부족이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았던 부족과 경쟁으로 국가로의 통합에서 정통성을 획득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이것은 곰에 관련한 전설과 신화 그리고 이름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신단수(神壇樹)의 의미는 신령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에 서 있는 나무로 지상에 있으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지점의 표시하는 세계 중심, 또는 우주 중심의 ‘생명의 나무’로 나타내는데 ‘생명의 나무’는 우주의 기원과 만물의 탄생을 상징하는 나무로 수많은 종교에서 신적 존재 또는 신이나 현인들에게 지혜를 주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약쑥과 마늘의 의미는 곰이 ‘약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는 것은 지상적 존재가 그 세속성(世俗性)을 탈피하고 신성한 존재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금기(터부)이다. 즉,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버틴 곰은 용맹을 대표하는 호랑이를 제치고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것은 투쟁보다 인내를 선택한 한민족의 특성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이 여러 단계나 과정(상태)을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단계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시련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의식으로 채택된 것이 통과 의례이다. 단군신화의 쑥, 마늘, 어둠 등은 이러한 통과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는 보편적 인식을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웅은 이른바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 등의 주술사들을 통솔하여 곡식 · 생명 · 병 · 형벌 · 선악 등 인간사 360여가지를 주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왕국의 창시자가 비로소 문화를 창조한 주체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은 천왕이라 일컬어진 환웅의 아들이고, 단군에 앞서 환웅이 이미 신시를 열고 통치형태와 문화적 제도를 갖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또는 “홍익인간하였다.” 또는 “재세이화(在世理化)하였다.” 하는 등의 표현은 그가 이미 어떤 규모를 갖춘 통치단위의 지배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은 아버지 신인 환웅이 이미 이룩해놓은 터전 위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이 된다. 곧, 단군의 나라는 환웅의 나라에서 지향하는 국가이념과 제도를 계승하여 건국한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므로 따라서, 단군신화에서는 건국의 주체로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고, 한 사람이 보다 더 기초적인 객체를 성취한 뒤를 이어 다른 한 주체가 좀더 종교적인 객체를 성취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만, 제정일치로 대표되는 신권 정치(神權政治) 또는 신정 정치(神政政治)의 나라에서 인권 정치(人權政治), 민권 정치(民權政治)의 나라로 변해가듯이 환웅이라는 주체가 성취한 객체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상대적으로 강한 데 비하여, 단군이라는 주체가 성취한 객체는 정치 쪽에 기울어져 있다는 정도의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동명왕신화 (주몽신화)
고구려의 건국신화. 주인공인 동명왕의 이름을 따서 ‘주몽신화(朱蒙神話)’라고도 한다.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삼국유사》 ·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문의 서두, 《여지승람》의 평양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등에 수록되어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은 오언고시로서 ‘영웅서사시’라고 일컬어질만한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장편이어서 이 방면의 자료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하늘의 신인 해모수(解慕漱)를 아버지로, 강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을 어머니로 하여 알로 태어난다. 그 어머니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부여왕조의 금와왕은 그 큰 알을 버리게 하였지만 짐승과 새들이 알을 보호하였다. 왕이 직접 그것을 깨뜨리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그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알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매우 출중하고, 특히 활을 잘 쏘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활 잘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불렀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계략을 써서 주몽이 기르고 있던 왕실의 말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게 하고, 주몽에게 몸을 피하여 큰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주몽이 도망하여 엄수(淹水 : 혹은 개사수)에 도달하였으나 왕자들의 추격이 급박하였다. 주몽은 물을 향해서 “내가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강의 신의 손주(외손)인데 이제 이 추격을 어찌하리오.”하고 말하자 고기떼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추격을 면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달아나서 졸본(卒本)에 도착하여 작은 집을 엮어 나라의 기틀로 삼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비류국(沸流國) 바로 이웃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비류국의 송양왕과 주종관계를 결정짓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주몽은 활쏘기에 이기고 계략을 써서 북과 나팔을 빼앗고 마침내 주술로 비류땅이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송양왕의 항복을 얻게 되고 그뒤 그의 왕국은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와같은 내용의 동명왕신화는 동명왕의 부신(父神)과 그의 아들 유리에 관해서는 생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그리고 〈동명왕편〉의 기록을 절충한 것이다. 그러나 동명왕에 관한 문헌들의 기록에는 들고 남이 많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에서는 북부여의 천제를 해모수라 하고 그 아들을 해부루라고 한 뒤, 해부루가 상제(上帝)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옮겨가고 동명이 북부여를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북부여조의 바로 다음에 실린 동부여조에서와 북부여왕, 해부루의 재상인 아난불의 꿈에 천제가 현몽해서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해가라.”하니 이는 장차 동명왕이 일어날 징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해모수와 해부루로 이어지는 혈통과 동명왕의 혈통은 별개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해모수가 천제로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천제의 이름으로 해부루를 내쫓고자 하였다면 두 천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유사》는 동부여조의 바로 다음 조항인 고구려에서 해모수를 동명왕의 부신자리에 앉히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삼국유사》는 “단군기(檀君記)에 가로되, 단군은 서하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이를 낳으니 그 이름이 부루이다. 이제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생각컨대,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말로 해서 오히려 엇갈림이 더해지고 있다. 배다른 형제가 씨다른 형제로 바뀐다고 해도 서하백과 하백이 동일한 존재임을 확인하지 않고는 논리가 합당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유화 곧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숨지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태후 신묘(神廟)를 세우매 동명왕이 동부여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유화가 금와의 태후라면 해부루의 비(妃)가 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해부루와 동명이 씨다른 형제일 수도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유화가 금와왕에 의해서 태후의 대접을 받았다면 이것은 중요한 시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왕조에 있어서도 유화는 동명왕의 태후이기 때문이다.
유화는 동부여와 고구려왕조 양쪽에 걸쳐 태후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추정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동명왕신화의 바닥에는 부계가 다르고 모계가 같은 존재들 사이의 갈등이 깔려 있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간의 갈등 내지 혈통내의 갈등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갈등은 가장 극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서사적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가계내의 갈등이 부여왕조에서 고구려왕조를 파생시켰다면 같은 형제에게서 백제왕조가 형성된 사례에서 그 파생의 대응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명왕신화는 추정될 수 있는 이같은 갈등으로 인하여 상고대 신화들 가운데서 가장 파란많은 신화로 남아 있다. 탄생에서부터 이미 장애와 난관을 겪은 한 인물이 박해를 이기는 과정이며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짓는 과정 끝에 드디어 한 왕조를 창건하는 줄거리로 해서 동명왕신화는 ‘영웅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동명왕은 기마술과 궁술에 능한 무장다운 면모와 함께 이른바 ‘주술적 탈주’를 감행하고, 또 방술을 부려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적 면모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주술사적 무장이자 왕인 동명왕에게서 상고대 왕권의 편모를 볼 수 있다.
박혁거세신화
상고대 왕국에 관한 건국신화의 하나이다. 이 신화가 수록되어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이다. 『제왕운기』에는 조금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는 합리주의 사관에 터전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신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은 아무래도 『삼국유사』를 으뜸으로 칠 수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 상류에 모였다. 군왕을 정하여 받들고자 하여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진 흰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찾아가서 그곳을 살폈더니 자줏빛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오매, 경이롭게 여기면서 동천 샘에 목욕시키니 온몸에서 빛살을 뿜는 것이었다. 이때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혁거세왕이라 이름을 짓고 위호(位號 :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는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그즈음에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드리며 배필을 구하라고 하였다. 같은 날에 사량리 알영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그 왼쪽 겨드랑이로 딸아이를 낳으니 그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입술이 꼭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내 월성의 북천에서 미역을 감기자 입부리가 떨어졌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세우고 두 신성스러운 아이를 봉양하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으되, 알이 박과 같으므로 그 성을 박씨로 삼았다.
딸아이는 그녀가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 그들 나이 열셋이 되매 각기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서벌·사라 혹은 사로라고 일컬었다.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더러 계림국이라고도 하였으나 뒤에 신라로 고쳐서 전하였다.
박혁거세왕은 예순한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에 올랐는데 칠 일 뒤에 그 주검이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또한 죽으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묻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쫓으면서 방해하였다. 따라서 5체(五體)를 다섯 능에 묻고 사릉(蛇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따른 것이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보다 훨씬 간략하다. 그러나 줄거리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두드러진 차이라면 전자가 알영을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에서 탄생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후자에서는 겨드랑이 바른쪽으로 되어 있는 정도이다.
이 같은 겨드랑이 밑 애기 탄생은 불교설화를 연상시키고 있으나 다만 왼쪽과 바른쪽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 여부를 판별하기는 힘들다.
「박혁거세신화」도 다른 건국신화 내지 건국시조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신(天神)이 강림하여 나라의 첫 기틀을 잡았다.’는 것을 기본적인 줄거리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고, 그 주체가 성취하는 객체는 건국이란 점에서 다른 건국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 밖에 그 주체가 탄생 내지 출현하기 이전에 전형적인 신비 체험의 징후들, 예컨대, 하늘이 내리뻗은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 백마, 자줏빛, 천지의 진동, 일월의 청명 등이 나타나고 있다든지 혹은 그 주체가 알에서 부화한다든지 하는 모티프에 있어서도 다른 건국신화와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전자의 모티프는 신라 왕권을 신성화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점은 혁거세라는 이름 자체가 ‘불거내(弗矩內)’ 곧 ‘세상 밝힘’을 의미하였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고조선의 시조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것으로 보인다.
「박혁거세신화」 자체의 특색으로는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이 신화는 씨족 사회가 연합되어 하나의 왕국으로 뭉쳐져 가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박혁거세신화」는 이미 하늘에서 강림한 여섯 촌장 위에 새로이 군림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통치자를 부각시키고 있다.
둘째, 천신이 강림하되 다른 신화와 같이 멧부리가 아닌 우물에 강림한 점이 특이하다. 신라 시조 탄생의 성역이 산기슭의 우물이란 것은 신라의 종교에 있어 우물이 성역이었음을 뜻하고 있다.
셋째, 동명왕이나 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다 같은 난생(卵生)인데, 박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져 있는 점이 이 신화의 특색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 같은 알과 박 사이의 뒤섞임은 혁거세가 ‘불거내’ 내지 ‘ᄇᆞᆰ내’로 읽혀지면서 그 불 또는 ᄇᆞᆰ이 박(朴)과 비슷한 소리였다는 데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박이 알과 마찬가지로 ‘신령의 집’ 또는 ‘넋의 그릇’이 될 수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두 거룩한 아이가 같은 날에 신비롭게 태어나 배필로서 짝지어졌다는 점도 「박혁거세신화」의 특색이다. 이것은 후대의 별신굿의 원류가 상고대 신화임을 생각할 때, 별신굿에서 남녀 신령의 강림과 그 짝지어짐이 일어나는 사례를 연상시켜 주고 있다.
별신굿의 짝지어줌이 이른바 신성혼(神聖婚) 또는 신들의 혼례라면, 가장 오래된 선례를 「박혁거세신화」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까지 전해진 별신굿에서도 신내림에 수반된 신들의 혼례가 굿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다섯째, 알영이 탄생할 때 입술이 닭의 부리처럼 길었다가 뒤늦게 떨어진다는 모티프는 「동명왕신화」에 등장하는 유화를 연상시키고 있어 매우 흥미롭고, 그만큼 이 신화의 특색 있는 부분을 이루고 있다.
알영의 경우는 계룡 탄생의 모티프와 대응되는 것이지만, 「동명왕신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의 입사식(入社式)’ 절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박혁거세 주검의 산락(散落 : 사방으로 흩어져 떨어짐.)은 괴기하다고 할 만큼, 다른 건국신화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신화의 특색이다.
해석하기 대단히 어려우나, 이 부분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성무식(成巫式)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체 분리의 모티프와 대응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고증이 요망된다.
가락국 수로왕 신화
시조 신화이며 건국신화로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에 전하는데, 건국자인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김수로왕신화」는 「단군신화」나 「박혁거세신화」 혹은 「동명왕신화」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건국 시조신화로서 「김수로왕신화」는 왕국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아울러 왕권 자체를 신성화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리는 첫 군왕이 곧 김수로왕이고, 그러한 왕을 받들고 있는 거룩한 왕국이 곧 금관가야라는 이념이 다른 건국 시조신화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몇 가지 점에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여러 씨족이 연합되어 이룩된 통합적인 왕국의 창건에 관한 신화라는 점에서 각별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개벽한 뒤로 국호도 없이 다만 아도간(我刀干) · 여도간(汝刀干) 등 아홉 사람의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는 땅에 김수로왕은 하늘의 신으로서 강림하였다. 주인공이 이 같이 씨족연합사회의 통합된 군장으로서 하강했다는 점에서는 「박혁거세신화」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신화 내용이 직접 신에게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3월 계욕일에 즈음하여 구지봉에 2백∼3백 인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인 구간(九干)은 직접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였고, 그 결과 신의 내림을 받았다. 그 목소리는 “황천(皇天)이 나로 하여금 이곳을 다스려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기에, 내 여기에 내리고자 하노라.”고 하면서 구간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며 그를 맞이하기를 요구했고, 하늘의 신이 시키는 대로 실행하여 신을 맞이한 부분이 「김수로왕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이 직접 인간에게 한 말을 신탁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는 그것을 ‘ 공수’라고 부른다.
「김수로왕신화」는 공수와 공수의 내용대로 사람이 실천한 행동을 중핵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신화의 신화다움은 신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이 직접 이야기한 신 자신에 관한 얘기가 곧 이 신화의 핵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서 옮긴 것뿐이다. 신화의 공수다움은 우리 신화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이나, 그것을 문헌에서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김수로왕신화」이다. 그런 뜻에서 이 신화는 한국신화가 지닌 기본적인 성격을 성문화(成文化)해서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셋째, 이 신화는 ‘신맞이 신화’라는 것이다. 신내림을 받드는 신맞이 신화라는 성격은 「박혁거세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공수다움과 신맞이라는 두 요소가 어울림으로써 한국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을 얻게 된다. 공수를 받들어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이 신내림을 받은 얘기라는 한국신화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 신맞이 신화는 당연히 신맞이굿과 겹쳐져 있다. 실제로 「김수로왕신화」는 신이 하늘에서 소리하면서부터 지상에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이란 사람들이 공수를 받들어 노래하고 춤춘 부분이자 육체로 연행된 신화란 점에서, 이 신화는 굿과 짝지어져 있다. 신화가 말로써 하는 풀이라면, 그 풀이가 사실은 말에 담겨 표현되기 이전에 행동에 담겨 표현되어 있었다.
「김수로왕신화」가 지닌 구술적인 서사진행은 먼저 육체에 의거해 있었다. 이 사실은 우리 신화의 기원에 관한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른바 제의학파적(祭儀學派的)인 신화기원론이 적용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이 신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김수로왕신화」가 곧 굿이었다는 명제는 오늘날에까지 남겨져 있는 굿을 신화와 연관지어서 바라볼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실제로 이 신화의 줄거리, 특히 신맞이 부분은 오늘날의 별신굿의 신맞이 절차를 연상시켜 주기에 알맞다. 그런 뜻에서 고구려의 수신제(隧神祭)의 기록과 함께 「김수로왕신화」는 한국 민속종교를 통시적으로 부감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서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에 남겨진 별신굿과 도당굿은 「가락국기」의 신맞이 부분과 수신제를 재현하고 있다. 별신굿은 상고대 신화가 오늘에 남겨진 모습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별신굿의 원류로서 부각되는 「김수로왕신화」는 한국인의 신명 내지 신바람의 원형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신명이 신이 지펴서 나타나는 앙분상태와 도취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당 개인의 종교적 체험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집단적으로 겪는 종교적 체험이기도 하다.
별신굿에서 신내림은 원칙적으로 무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별신굿이 진행되면서 무당이 겪은 신지핌의 상태는 마을 안에 번져간다. 접신 상태의 집단적 감염현상이 일어나고, 거기에 춤과 노래와 더불어 흥이 더해지면 별신굿판의 신명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김수로왕신화」는 춤과 노래로 받든 신내림 부분을 통해 가장 오래된 신바람의 현장을 오늘에 전해 주고 있다. 「김수로왕신화」는 결국 건국 시조신화라는 골격 속에서 다른 신화들에서 볼 수 없거나, 볼 수 있다고 해도 단편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한국 종교사적인 의미를 가장 풍족하게 간직하고 있다. 신화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된다.
제주도 삼성신화(고, 양, 부씨)
고·양·부(高·良/梁·夫) 세 성씨의 시조 출현과 정착 내력 그리고 고대 탐라의 역사적 경험을 전승하는 제주도 신화.
줄거리
그들의 옛 기록에 이르기를, 태곳적에는 (어떠한) 사람과 물상(物象)도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 제일 큰 사람이 양을나(梁乙那)요, 다음이 고을나(高乙那)요, 셋째가 부을나(夫乙那)이다. 세 사람은 황량한 들판으로 다니면서 사냥을 했는데,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고 고기는 먹었다. 하루는 인(印)을 찍어 봉한 나무 궤짝이 동쪽 바닷가에 닿는 것을 보았다. 좇아가서 열어 보니 그 궤짝 속에는 돌함이 들어 있었으며, 동시에 붉은 띠에 자주색 옷을 입은 사신이 따라왔다. 돌함을 열어 보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 씨앗이 나왔다.
그제야 사신이 “나는 일본국의 사신이오. 우리 임금이 세 따님을 낳아 놓고 말씀하시기를, ‘서해 복판에 있는 멧부리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을 내려 보내 나라를 이룩하려고 하나 배필이 없느니라.’ 하면서 이에 나더러 세 따님을 모시고 가라고 하여 모시고 왔으니 그대들은 짝을 이루어 큰일을 성취하시오.”라고 한 다음 갑자기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장가를 들고, 샘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고장으로 가서 화살을 따라 각기 자리를 잡았다. 양을나가 사는 고장을 첫째 도읍, 고을나가 사는 고장을 둘째 도읍, 부을나가 사는 고장을 셋째 도읍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심고 망아지와 송아지도 길러서 날로 번창하였다.
분석
이 신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태초에 사람과 물상이 전혀 없었다는 배경 설정이 초두에 등장하지만 이에 관한 서사가 단절되고 곧이어 세 성씨의 시조가 출현한다고 하는 점에 있다. 창세신화의 기본 설정에서 출발했다가 갑작스럽게 시조 출현 신화로 전환되는 양상은 제주도 고유 창세신화의 특별한 내력이 기록으로 전승되기에 불편한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땅에서 솟아나온 세 신인이 태초에 이미 성씨를 갖고 있었다는 설정은 옛 탐라국 건국시조 세 영웅이 특별한 역사적 요인에 의하여 성씨시조의 지위로 확정되는 신화 재편의 과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세 과정에 관한 상세한 부분은 <초감제>와 <천지왕본풀이> 같은 무속신화에 전승되고 있지만 기록 전승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세 신인의 출현 양상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고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육지 신화에서 찾을 수 없는 개별적 성격이다. 세 신인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일본국에서 온 세 처녀와 혼인하여 수렵에서 목축으로 그리고 농경생활로 전환하였다는 설정은 제주도의 경제적 토대의 변화를 신화적 서사로 드러낸 것이다. 세 신인이 각기 활을 쏘아 각자의 영역을 확정한 것은 제주도의 전통적 신앙권역, 곧 송당계(松堂系), 칠일당계(七日堂系), 팔일당계(八日堂系)라는 세 권역과 특별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세 처녀의 출자처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일본국으로 설정되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역사상의 국가가 아닌 벽랑국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공식 역사서의 기록에서 일본이라는 실재 국가가 신빙성을 더해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특징
창세신화의 서두가 제시되었다가 급격하게 성씨시조신화로 전환된 점이 주목된다. 또 성씨를 보면 고대 부여, 고구려계 왕성(王性)인 부 씨와 고 씨로 확정되어 있는 것도 특별하다. ‘을나’라는 칭호 역시 『고려사』 「세가(世家)」 권4 현종 9년 8월 조 기사에 여진(女眞)의 추장 이름에 서을나(徐乙那)가 보이고, 현종 21년 1월 조 기사에 동여진(東女眞)의 오을나(烏乙那)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 탐라의 세 신인이 북방계통과 연관성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외에 여진의 추장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요을내(要乙乃), 알나(閼那)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탐라 관련 기사에서 탐라와 부여, 고구려와의 긴밀한 관련성이 확인되어 고을나, 부을나의 출자처에 대해 단서를 제공한다. 용담동 제사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초기 철기 유물이나 고구려 계통의 무기단 적석 양식의 묘제(墓制) 그리고 초감제에서 “우리나라 고구려 신(臣) 베포도업 제이르자. 왕이 나사 국입고, 국이 나 왕입네다.”(정주병본) 등의 근거는 현전 <삼을나전승>에 녹아 있는 부여, 고구려계 집단과의 관련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초감제>에서 영평(永平) 8년 곧 기원후 1세기경에 삼 을나가 출현했다 하고, 고대 탐라 관련 문헌 기록들과 유물 등을 포괄하여 연대를 비정하면 대체로 고대 탐라국의 역사적 출발이 기원후 1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여러 가지 근거를 포괄적으로 해석해 보면, 현전 <삼을나전승>의 삼 을나 가운데 고을나와 부을나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아니라 부여와 고구려에 족원을 둔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양을나의 성씨가 본디 ‘양(梁)’이 아니라 ‘양(良)’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으나 육지의 중앙정부에 대항한 양이목사 전승을 고려할 때 토착 세력일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본래의 탐라국 건국시조전승은 오랜 기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탐라국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공식적 노선을 표방한 고려에 완전히 복속된 1105년을 기점으로, 어느 시기에 탐라국의 건국시조전승이었던 신화가 일개 군현이 되어 버린 탐라의 성씨시조전승으로 한 단계 격이 낮아진 형태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가 현재의 <삼을나전승>이라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려가 고구려를 공식적으로 계승한 국가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부여, 고구려계 집단의 입도 사실을 견인하여 세 신인의 성씨를 확정함으로써 고려와 탐라의 혈통상 동질성을 부각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이 지역 <구농아방본풀이>의 내용이 고려 태조 왕건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삼을나전승>의 재편 과정에 고려 중앙정부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하게 한다. 구농아방 왕 장군이 동해 용왕을 도와 서해 용왕을 없애고, 그 딸인 용녀와 결혼하여 왕근·왕빈·왕사랑 삼 형제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때 등장하는 ‘구농어멍은 희속에낭’이라는 대목에서 ‘희속에낭’은 고려 태조 왕건의 모친인 위숙왕후(威肅王后)의 와음(訛音)으로 볼 수 있으며, 맏아들인 왕근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일치한다. 결국 이 신화는 고려 왕실의 신화적 전승을 무속신화로 옮겨 노래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제주도에 왕건의 가계와 관련된 중요한 신화를 무속신화로 전승하는 이면에는 고대 탐라국의 고려 복속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원래의 탐라국 건국시조신화에 있던 창세신화적 요소 가운데 그 서두만 살려 두고 세 신인의 성을 확정하는 성씨시조전승이 급격하게 결합하는 양상으로 <삼을나전승>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재편된 <삼을나전승>이 4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탐라의 성씨시조전승으로 자리 잡아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이 정이오(鄭以吾)에 의해 편찬되고, 1454년에 이르러 『고려사』 「지리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할 것이다.
평강채씨시조신화
정의
평강 채씨 시조의 탄생과 득성(得姓)에 관한 신화.
줄거리
1898년(광무 2)에 간행한 『평강채씨족보(平康蔡氏族譜)』에는 “영롱한 거북이가 평강에서 나와 사람으로 변하니 왕이 이를 듣고 채성(蔡姓)을 하사하고 평강백(平康伯)에 봉했다.”라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거북이가 직접 현신하여 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발행한 족보에서 시조 탄생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강에 사는 대갓집 규수가 혼전에 잉태를 하였다. 부모가 연유를 물으니 밤마다 미소년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명주실을 꿴 바늘을 미소년의 옷깃에 달아 뒤를 쫓아가니, 미소년은 다름 아닌 집 앞 연못 속의 오색영롱한 거북이의 화신이었다. 그 후 규수가 옥동자를 낳자 임금이 성을 채(蔡)로, 본관을 평강(平康)으로 사성하였다. 지금도 거북이는 채씨의 상징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분석
<평강채씨시조신화>의 핵심은 시조의 탄생 과정이다. 거북이와의 이류교혼(異類交婚)에 의해 채씨 시조가 탄생한 것은 비일상적인 탄생으로, 그 신성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밤이면 처녀의 방에 들어와서 자고 간다는 모티프는 전형적인 야래자설화 유형이다. 그리고 야래자인 미소년의 정체가 다름 아닌 거북이라는 점은 <창녕조씨시조신화>의 용, <충주어씨시조신화>의 잉어와 마찬가지로 신화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거북 역시 용속(龍屬)에 해당하므로 수신적(水神的)인 질서체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규수가 낳은 옥동자에게 임금이 평강을 본관으로 한 채씨 성을 사성한 것은 사회적 공신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신이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성씨인 ‘채’는 거북이를 뜻하는 것으로, 이 글자는 이러한 신화를 온전히 수용하고 있으며 이류인 거북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함의를 내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
이와 같이 <평강채씨시조신화>는 규수와 미소년으로 화신(化身)한 거북이와의 교구(交媾)에 의해 시조가 탄생하고, 임금의 사성을 통해 채씨 성을 갖게 되는 내용이 핵심이다. 여느 신화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지모신(地母神)과 수부신(水父神)의 결합으로 시조가 출생하는 신화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창녕 조씨 시조신화
정의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득성(得姓)에 관한 신화.
줄거리
<창녕조씨시조신화>는 여느 시조신화에 비해, 시조 조계룡의 신이한 탄생 과정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특히 창녕 조씨 족보를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창녕조씨충간공파보(昌寧曺氏忠簡公派譜)』, 『창녕조씨장양공파보(昌寧曺氏莊襄公派譜)』, 『창녕조씨시중공파보(昌寧曺氏侍中公派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때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인 예향(禮香)이 청룡질(靑龍疾)을 얻어 화왕산에 있는 용담에서 목욕하다가 청룡의 아들 옥결(玉玦)과 만났다. 그리고 계룡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옆구리 밑에 ‘조(曺)’ 자가 새겨져 있는지라 성을 조씨(曺氏)라 하였다고 한다. 또 세속에 전해 내려오는 바로는, 조씨의 시조모 예향은 나면서부터 복질(腹疾)이 있어 고생하던 중 어떤 사람이 화왕산에 있는 못이 매우 영험하니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말에 길일을 택하여 못으로 올라가 목욕하고 기도하려고 하는 참에, 갑자기 못 속에서 운무가 자욱하게 솟아올라 컴컴해지며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잠시 후에 운무가 개면서 예향은 못 속에서 솟아 나왔다. 그 뒤로 병이 씻은 듯이 낫은 동시에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다. 꿈에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화왕산 큰 연못의 신룡(神龍)의 아들 옥결인데, 내가 아이의 아버지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공후에서 경상에 이르기까지 자손만대가 끊임없이 번창할 것이라.” 하였다.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자세히 듣고서 조계룡(曺繼龍)이라는 성명을 주었다. 장성하여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는데, 이 사람이 창녕 조씨의 시조라고 한다.
분석
<창녕조씨시조신화>는 시조인 조계룡의 탄생과 득성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화의 핵심은 시조의 신비로운탄생으로, 시조가 예향과 신룡(神龍)인 옥결과의 교구(交媾)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그 신이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옆구리 밑에 ‘조’ 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성으로 삼은 것은, 남평 문씨 시조가 석함에 문자가 새겨져 이를 성으로 삼은 것과 같다. 또한 ‘조계룡’이라는 성명을 통해 용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씨족집단이 새롭게 출현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의의
이 신화는 용지(龍池)와 같은 특정한 공간에서 인간과 용의 교혼으로 아이가 잉태되어 태어나서는, 특출한 인물이 되어 이후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시조의 부모는 인간과 이류인 동물로 여성과 남성의 이원적 대립구조를 가진다. 시조를 출산한 여성은 물과 대지, 풍요를 상징하고 다산을 관장하는 지모신이며, 이류인 남성은 수부신으로, 지모신과 수부신의 결합으로 시조가 출생하는 신화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대표 영웅신화로 3대신화
해모수
개요
漢神雀三年 孟夏斗立巳
한나라 신작 3년, 첫 여름 북두가 사방(巳方)을 향해 비추고
海東解慕漱 眞是天之子
해동에 해모수가 오셨으니 진실로 천제의 아드님이시로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한국 신화의 등장인물.
그러나 당대의 기록인 《위서》(魏書)나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등에는 해모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북부여를 건국한 부여의 시조이며, 동시에 동부여의 시조인 해부루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아버지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해씨 가문에서 부여계인 가문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가공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록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2]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한서》에는 저런 내용이 없다. 추가적으로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의 탄생년도는 기원전 58년으로, 해모수가 강림한 기원전 59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이를 동명성왕이 수태된 년도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 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 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했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동부여-조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북부여왕 해부루가 먼저 피해 간 땅이 동부여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고구려-조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扶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이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 5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종자(從者) 100여 인은 모두 백곡(白鵠, 흰 고니)을 탔는데, 채색 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 소리가 구름 가운데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 10여 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평양부>편
이후에 하백의 세 딸 중 유화와 정을 통해 결혼하고자 했으며, 하백과 재주를 겨루어 승리했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자 수달로 변해 잡고, 사슴에는 승냥이로, 꿩에는 매가 되어 내리쳤다고 <동명왕>편에 묘사되었다. 그런데 해모수가 혼자 승천해버려서 가문을 욕되게 했다고 화가 난 하백은 유화를 추방했다.
어떤 기록에서는 천제(天帝) 본인이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천제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쪽이든 신적인 존재로 여겨진 듯하며, 고구려와 부여 일대에서 시조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는 단군과 동일시되어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해부루를 단군의 장남, 동명성왕을 단군의 차남이라고 기록했다. 보통 이 부분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있다.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간다든가, 유화부인이 햇빛으로 임신 / 혹은 임신 중에 햇빛이 배를 비추는 상황, 오룡거를 몰고 다닌다든가 하는 것에서 태양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속일본기》 엔랴쿠 8년에 백제인들이 직접 전한 백제 부여씨 왕실의 출자에서는 라는 대목으로 적혀 있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한다. 《위서》에서도 我是日子, 河伯外孫이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해모수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동일 인물로 봤다. 해모수는 신화적 존재에 가까우므로 부여의 동명왕을 모델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해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는데, 황태후는 곧 그의 후손이다."
주몽
주몽에 관한 신화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타나지만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고 풍부한 신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주몽에 관한 여러 구전이 종합되어 새롭고도 장엄한 건국 이야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로 출생한다. 천제가 태자 해모수를 부여의 옛 도읍지로 보낸다. 옛 도읍지는 천제의 명에 따라 동해 가섭원으로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운 부루왕의 땅이었다. 오룡거에 탄 해모수는 고니를 탄 백여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강했는데, 머리에는 까마귀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을 차고 있었다. 아침에 정사를 보고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천왕랑이라고 불렀다.
해모수는 웅심연 물가에 놀러 나온 하백의 세 딸을 아름다운 구리집으로 유혹하여 그 가운데 맏이인 유화와 억지로 통정한다. 해모수가 용수레를 따라 하백의 나라에 이르러 유화와의 혼인을 요청한다. 해모수와의 변신술 대결에서 패한 하백은 혼인을 허락한 뒤, 해모수가 유화를 버리고 갈까 걱정하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둘을 함께 가죽수레에 넣어 용수레에 싣는다. 하지만 술이 깬 해모수는 유화의 금비녀로 가죽수레를 뚫고 홀로 승천한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유화를 우발수로 추방한다.
유화는 어부의 그물에 걸려 동부여의 금와왕에게 갔는데, 금와왕은 유화가 천자의 비라는 걸 알고 별궁에 둔다. 그 뒤 유화는 햇빛이 몸을 비추어 임신을 하고 왼쪽 겨드랑이에서 큰 알을 낳는다. 왕이 알을 버렸으나 우마(牛馬)가 피해가고 새가 깃으로 품어 어쩔 수 없이 유화에게 돌려주었더니 마침내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온다. 한 달이 지나 말을 하였는데,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자 백발백중으로 파리를 잡았다. 그래서 이름을 주몽이라고 했다. 성장하면서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사냥을 다녔는데 너무 뛰어나서 항상 질시를 받는다.
그래서 주몽은 유화가 준비해 준 준마를 타고 세 벗과 더불어 동부여를 떠난다. 압록강 동북쪽 엄체수에 이르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자의 손자, 하백의 외손을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말하면서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뒤쫓는 군사들을 따돌리고 무사히 강을 건넌다. 졸본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뒤 비류왕 송양과의 대결에서 크게 승리한다.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에 하늘에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아서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용산(龍山)에 묻고 장사를 지낸다.
분석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 배다른 형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동부여를 떠나 남하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 비류국을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간 인물이다. 그러나 주몽의 신화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주몽의 혈통과 능력을 신성화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부여계 민족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천신의 권위와 혈통을 끌어들인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를 아버지로 삼는다.
해씨는 주몽의 성인 고씨와 혈통이 다른 고구려 지배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 된 것은 천제의 권위와 해씨 집단의 힘을 동시에 끌어들이려는 계책에 따른 것이다. 주몽은 해모수만이 아니라 하백계 집단도 끌어들인다. 왕의 시비가 빛에 의해 임신을 한다는 부여계 전승이 있지만, 유화는 단지 시비가 아니라 하백의 딸로 자리매김 되어 압록강의 수신을 숭배하는 또 하나의 세력을 신화를 통해 통합한다. 천신과 지신(수신)의 결합에 의해 건국주가 탄생했다는 신화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주몽의 신성한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주몽신화>는 몇 가지 점을 더 부각시킨다. 무엇보다 주몽은 명사수이다. 원시, 고대사회에서 활쏘기 능력은 영웅의 핵심적 징표였다. 주몽은 어려서는 파리를 쏘아 명사수, 곧 주몽이란 이름을 얻었고, 성장기에는 동부여 왕자들의 질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탁월한 사냥 능력을 뽐냈으며, 동부여를 탈출해서는 유화가 보낸 비둘기를 쏘아 보리 종자를 얻었고, 나라를 세운 뒤에는 백 보 밖에 옥가락지를 놓고 쏘아 비류국 왕 송양을 굴복시켰다. 주몽의 활은 그의 군사적 능력의 상징이다.
활은 군사적 능력만이 아니라 종교적 능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주몽은 위기 상황에서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라는 일종의 주문을 외우면서 활로 물을 쳐서 어별교를 만든다. 이때의 활은 주술적 도구이기도 하다. 주몽의 이런 행위가 말해 주듯이 주몽은 군사적 영웅이면서 종교적 영웅, 다시 말해 주술사이기도 하다. 주몽은 죽은 비둘기에게 물을 뿜어 되살린다. 유화가 보낸 비둘기 한 쌍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뒤 보여준 신이한 능력이다. 주몽은 비류국 왕 송양과의 싸움 과정에서 사슴을 거꾸로 매달고 위협하며 주문을 외운다. 이 주문이 효력을 발휘하여 큰 비가 내려 송양의 도읍을 물에 잠기게 한다. <주몽신화>는 주몽을 군사적 영웅이자 종교적 영웅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주몽은 또 지혜로운 사람이다. 주몽은 일찍이 준마를 알아보고 그 말의 혀뿌리에 바늘을 꽂아 여위게 하여 금와왕으로부터 그 말을 얻는다. 주몽은 신하 부분노로 하여금 비류국의 고각(鼓角)을 몰래 가져오게 한 뒤 색을 검게 칠하여 오래된 것처럼 만들고, 궁실을 썩은 나무로 지어 오래 묵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도읍의 선후를 따지는 비류국왕의 입을 막는다. 영웅이 가진 꾀쟁이(트릭스터)의 형상이 주몽에게도 보인다. 이 같이 여러 국면에서 주몽이 신성화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은 종교적, 역사적 정당성을 얻는다.
또, 고구려 건국영웅 주몽은 후대에 한반도 고대국가들의 역사가 고조선을 기원으로 삼아 통합되는 과정에서 단군과 관계를 맺고 부루의 형제가 되기도 한다. 『단군기(檀君記)』라는 문헌에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관계를 맺어 아들 부루를 낳았는데, 해모수가 또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주몽을 낳았으니 주몽은 부루와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는 것이다. 주몽은 어머니 유화를 통해 단군과 연결된다. 단군은 주몽의 이모부가 되는 셈이다. 목적에 따라 혈통이 통합되면서 주몽과 관련된 다양한 신화들이 형성된 것이다.
특징
<주몽신화>는 건국신화가 재구성되는 양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주몽신화>에는 부여계 <동명왕신화>만이 아니라 해부루 등의 <해씨계신화>, 하백으로 대표되는 <수신계신화>, 송양으로 대표되는 <고조선신화> 등이 종합되어 있다. 또 <주몽신화>에는 다른 건국신화에는 잘 보이지 않는 수신계 집단이 드러난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유화의 아버지 하백 집단이 그들이다. 하백은 압록강의 신으로 수신이다. 동부여의 금와왕 탄생신화, 연개소문의 탄생담이나 그 아들들의 묘지명에도 수신신화의 특징과 흔적이 나타난다.
의의
<주몽신화>는 건국서사시로서 건국신화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기록된 건국신화는 본래 국가의 제전에서 불리던 건국서사시가 역사 기록으로 정착된 것이다. 『구삼국사』에 기록되었던 <주몽신화>는 서사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 하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북방계 유목민들이 정착민이 되고 농업생산을 시작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신화로서의 의의도 가지고 있다.
유리
줄거리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주몽이 떠난 뒤 유리가 태어난다. 유리가 어릴 때 새를 쏘며 놀다가 실수로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깨뜨린다. 그 부인이 “아비가 없어 미련한 짓을 한다.”라고 꾸짖자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와 어머니에게 부친의 일을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는 유리에게 아버지가 남쪽 땅으로 가 나라를 세웠다면서 부친이 남긴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감춘 물건을 찾으라.”라는 말을 전한다.
유리는 부친이 남긴 물건을 찾으려고 산골짜기를 헤매다 돌아왔는데 집안의 주춧돌 사이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을 찾는다. 그것을 가지고 옥지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단검을 맞추자 갈라진 자리에서 피가 나면서 둘이 연결되어 하나의 칼이 된다. 부왕이 진짜 내 아들이라면 신성함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유리는 곧 공중으로 몸을 날려 창구멍으로 새어드는 햇빛을 타는 신이한 능력을 보인다. 부왕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분석
<유리왕신화>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에서 <주몽신화>에 이어 기록되어 있다. <유리왕신화>는 건국신화가 아니라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결혼하여 낳은 아들 유리가 새로 나라를 세운 부친 주몽왕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능력을 인정받아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을 다룬 왕권신화이다. 이 왕권신화의 핵심은 유리가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고 부러진 칼을 찾아 아버지의 단검과 서로 맞추어 보는 이야기이면서도 공중으로 솟구쳐 햇빛을 타는 능력을 보이는 이야기이다. 전자는 『삼국사기』에, 후자는 「동명왕편」(곧 『구삼국사(舊三國史)』 「고구려본기」)에 전하고 있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유리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씨(解氏)계의 첫 번째 왕으로, 신화 속의 아버지와는 성씨가 다르다. 따라서 유리의 시조신화가 당연히 전승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신화는 고씨인 주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유리의 신이한 탄생담이나 결연담은 생략되고 왕권계승담만 남은 것이다. 고구려 건국신화나 그와 깊은 관계가 있는 무속신화의 화소를 <유리왕신화>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무속신화 <제석본풀이>는 중의 형상으로 찾아온 제석신(혹은 석가모니불)과 당금애기의 결연담으로 시작된다. 결연 후 중은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약속의 징표를 남긴 채 떠나고 당금애기는 홀로 남아 아들 삼 형제를 낳는다. 이 아들들이 성장하여 서당에 가서 공부를 할 때 삼천 선비로 상징되는 적대적 인물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린다. 이 말을 들은 삼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당금애기에게 부친의 행방을 묻는다. 모친이 응하지 않자 협박을 하여 결국은 부친을 찾아가는 징표인 박씨를 얻는다. 하루 만에 하늘까지 닿은 박 넝쿨을 타고 올라가 부친을 만난 삼 형제는 그릇에 각자의 피를 담아 그 피가 서로 합쳐지는 것으로 부자 관계를 확인한다. 부친을 확인한 삼 형제는 신직을 받아 신이 된다.
<제석본풀이>와 <유리왕신화>를 견주어 보면 아버지의 부재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은 주인공의 아버지 탐색, 정체 확인 과정에 등장하는 피 등의 화소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근거를 통해 판단해 보면 <유리왕신화> 역시 <주몽신화>처럼 천부지모(天父地母)의 결합에 의한 영웅의 탄생이라는 이야기가 그 전반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왕신화>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몽신화>의 일부로, 왕위계승담으로만 존재한다. 그 결과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부자 관계 확인담과 천신의 혈통으로서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신이담만 남고 나머지는 소거된 것이다.
특징
『삼국사기』와 「동명왕편」 가운데서는 후자가 더 신화적이다. 부여계 신화의 핵심 신화소의 하나가 선사(善射)이다. 주몽도 명사수이고 유리도 명사수이다. 「동명왕편」에서 유리는 단지 활을 쏘아서 물동이를 깬 정도가 아니라 구멍 뚫린 물동이에 진흙 탄환을 쏘아 이전처럼 다시 막는다. 파리를 쏘아 떨어뜨린 주몽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활쏘기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선사 화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명왕편」에는 무속신화처럼 유혈화소가 나타난다. 서로의 피를 합쳐 합혈(合血) 여부로 부자 또는 모자 관계를 확인하는 화소는 여러 무속신화에 보이는 바 부러진 칼을 합쳤는데 피가 흘렀다는 것은 이 신화소가 수용된 결과이다.
햇빛타기화소 역시 부여계 신화소이다. 주몽왕의 다른 이름인 동명왕과 그의 아버지 해모수, 북부여 신화의 해모수와 해부루, 그리고 유리명왕은 모두 해[日], 빛[光], 밝음[明]과 관계가 있다. 유리가 공중으로 솟구쳐 햇빛을 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여계 신화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신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진흙탄 화소, 유혈 혹은 합혈 화소나 햇빛타기의 화소를 삭제한다. 역사적 인물인 유리왕의 영웅성, 그리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표현하는 데 이런 신화적 요소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부여에서 태어나 성장한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졸본에 찾아왔을 때 주몽왕에게는 왕비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 온조가 있었다. 전·후처의 아들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갈등은 불가피했다. 이 갈등에서 승리한 쪽이 유리 집단이다. 패배한 비류, 온조 집단은 졸본을 떠나 남하하여 각각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유리왕신화>는 이 사건 이후 유리 집단이 자신들의 왕위 계승 정당성을 신화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고구려 건국신화인 <주몽신화>에 <유리왕신화>를 끼워 넣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리왕신화>는 시조신화가 아니라 왕위계승담, 왕권신화로 정착되었다.
의의
<유리왕신화>의 가장 큰 의의는 이 신화가 건국신화와 무속신화의 관련성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당금애기>라고도 불리는 <제석본풀이>와 <유리왕신화>의 유사성은 건국신화 또는 왕권신화가 본래 무당에 의해 구연되던 서사시였으며, 이 서사시가 한문 기록으로 정착된 것이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문헌신화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