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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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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 -유 ◇게시판 스크랩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산림녹화의 기적
증인 추천 0 조회 122 11.10.05 18: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치산녹화 사업에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부 공무원을 총동원하라!” (朴正熙 대통령)
⊙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인 1978년에 완료

[증언자]
金演表 전 산림청 차장
林鍾潤 전 산림청 조림국장
李柱聖 전 산림청 임업연수원장
安昇煥 전 산림청 동부산림청장

1980년 4월 5일 경기도 광릉에서 열린 제35회 식목일 행사 모습. 산림청은 산림녹화 제1차 10개년 계획을 4년이나 앞당기고 2차 10개년 계획(1979~1988)을 시작했다.
1964년 12월 중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대한해협을 건너 경북 포항의 영일만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파독(派獨)광부를 만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하는 길이었다. 대통령의 눈에 비친 영일 지구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뻘건 민둥산 천지를 내려다보던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헐벗은 산을 두고 조국의 근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밥 지어 먹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땔감조차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춘궁기 소나무 껍질로 죽을 만들어 연명하던, 두껍고 단단한 가난의 껍질을 어떻게 벗겨 낼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통령은 답답했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는 희망으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비행기의 좌석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앞날의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19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나무심기에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민둥산에 나무 심는 일을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로 만들었다. ‘치산녹화(治山綠化) 정책’이라 부르는 거대한 국책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해 6월 농림부 산림국은 ‘산림부’로 승격됐고 1966년 7월 ‘산림청’ 발족 법안이 임시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1월 마침내 산림청이 탄생했다.

초대 산림청장으로 김영진(金英鎭) 청장이 취임했다. 김 청장은 1월 9일 대대적인 개청식을 갖고 치산치수를 제1목표로 청와대와 핫라인을 구축, 본격적인 나무심기와 사방(砂防·산·바닷가·강가 등에서 모래나 흙이 비·바람에 씻기어 떠내려가는 것을 막는 일)사업에 돌입했다.

‘차관급’ 공무원이 수장인 ‘청(廳)’ 단위의 정부기구에서 청와대에 직통으로 업무현황을 보고하는 기관은 정보기관을 제외하고는 산림청이 유일했다. 산림청은 먼저 정부에서 시행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의 첫째 목표인 ‘식량을 자급하고 산림녹화와 수산개발에 주력한다’는 계획완수에 착수했다.

사방사업과 연료림(燃料林·땔감용 나무) 단기조성 등 산림녹화를 조식에 완수해 자연재해 때문에 해마다 겪는 흉년 농사를 치유하는 정책을 폈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에 땔감 나무의 반입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도입했고 수도권 가구에 무연탄 보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폈다. 또 농촌지역의 아궁이를 개량해 최소량의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힐 수 있게 할 방안도 추진했다.

어느덧 황량한 민둥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무심기 사업에 참여한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사업성과를 높이기 위해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깔았다. 심은 나무가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한 것이다.

작업인부로 참여한 마을 주민들의 임금은 정상 임금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밀가루로 노임을 지급했다. 그런데도 인부 동원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밀가루를 받는 일자리마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밀가루 한 됫박을 받아갈 때 발걸음이 날아가는 듯 가벼워지는 그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열심히 일했다.
1975년 4월 18일 경북 포항의 영일 사방사업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영일지역은 나쁜 토양 탓에 사방 4538ha가 폐허였으나 5년여 만인 1977년 대역사를 완료하고 푸른 숲으로 탈바꿈했다.


孫守益, 서울~춘천 국도를 1년 만에 정비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관한 연두기자회견에서 나무심기 성공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나무심기를 강도 높게 추진해 확실한 국토녹화를 이끌겠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전 국토를 녹화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워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국민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선언은 국토녹화의 전담부처인 산림청과 사전에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은 선언이었다. 산림청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언급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당장 만들어 국민 앞에 세부적인 추진내용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산림청 조림과장이었던 김연표(金演表) 산림청 차장은 대통령의 선언을 듣고 즉시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농림담당 비서실 직원들조차 “그 내용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기다려 보라”는 말뿐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대통령의 선언이 선포되고 사흘이 지난 1월 15일 산림청장 인사가 단행됐다. 당시 실세로 통했던 손수익(孫守益) 경기지사가 산림청장으로 부임했다. 김연표 과장은 이때야 비로소 ‘대통령의 약속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손 청장은 내무부 지방국장 시절, 새마을운동 창안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서울~춘천 간 국도변을 시범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1년 만에 대대적인 정비를 끝낸 불도저였다.

신임청장 취임식이 있던 1월 16일은 때마침 농림부가 대통령에게 국정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취임식 전 손 청장은 농림부 보고회의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농림부 보고에서 산림녹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속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날벼락이 떨어졌다. 1월 22일의 일이다. 내무부 국정보고에 대통령으로부터 느닷없이 산림정책에 대해 신랄하고도 엄한 질책이 내려졌다. 산림행정의 주무부처는 산림청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이날 내무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구태의연한 정책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동안 산림청에 배정한 예산은 적었지만, 그 범위 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지도해 나갔다면 산은 푸르러지고 나무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또 산림을 연구하는 직원들의 자세도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양에 알맞은 수종을 연구개발해야 하고, 개발한 묘목을 많이 생산해 인근 부락에 공급해야 하는데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고쳐야 한다.”

손 청장은 물론 산림청 직원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산림청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68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나무를 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입안, 민둥산을 푸른숲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 테니 산림녹화하세요”
1970년대 강원도 인제군에서 줄을 띄워 나무를 심는 모습.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깔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흘렀다. 2월 13일 충청도 도정 순시차 충남도청에 들른 박 대통령이 갑자기 손 청장에게 도정보고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김연표 과장도 손 청장을 수행해 충남 도정보고에 부랴부랴 참석했다. 보고가 끝날 무렵 “산림청장 참석했소?” 하며 박 대통령이 확인까지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런 하문이나 지시가 없었다. 대통령의 귀경길에 손 청장도 따라나섰다.

대통령 차량 행렬이 도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손 청장의 차량도 그 행렬에 끼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의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비서진이 내려 손 청장이 탄 차량으로 다가와 그를 대통령 차로 옮겨 타게 했다. 대통령 차에는 김현옥(金玄玉) 내무부 장관이 동승하고 있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박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었다. 5분가량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이 차창 밖을 계속 내다보면서 뭔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듯했다. 손 청장은 오금이 저렸다.

이때 박 대통령이 “손 청장!” 하고 불렀다.

“네, 각하” 하고 대답하자 박 대통령은 무뚝뚝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 테니 최선을 다해 산림녹화를 이룩하세요. 김현옥 장관이 적극 나설 테니 강도 높게 진행하세요. 국무총리에게 바로 보고하여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고 김 장관과 협의해 산림녹화를 완수하세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지시가 내려졌다.

이튿날 손 청장은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에게 대통령 지시 내용을 보고하고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김 총리는 이때 “그럼 그렇지! 그래서 일 잘하던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발령했구먼”이라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리는 듯 손 청장을 격려했다.

김연표 과장은 이제야 확실한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국토녹화를 선포했던 것부터 산림청장을 새로 발령한 것, 농림부 국정보고 때 산림청 보고에 대해 언급이 없었던 것, 충청도 도정 순시에 느닷없이 산림청장을 불러들인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김연표·범택균 산림청 과장들이 녹화계획 마련
1967년 1월 9일 산림청 개청 현판식 장면. 당시 청사는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 삼영빌딩에 있었다.

산림청을 내무부 산하로 이관하는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산림청장이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지 일주일 후인 1973년 2월 23일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이 통과돼 3월 3일 공포와 동시에 발족 6년 만에 산림청의 운명은 바뀌었다.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치산녹화 10년 계획은 내무부에서 짜게 됐다. 산림청에서는 김연표 과장과 범택균(范澤均) 기술보급과장이 계획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은 당시 새마을국장이던 고건(高建) 전 총리가 전담했다. 산림청장과 협의해 기본 뼈대를 만들었고 주요내용은 10년 내에 국토를 완전히 녹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연표 과장, 범택균 과장을 중심으로 한 계획서 작성팀은 산림청에서 가까운 곳에 여관방을 빌려 야근 사무실을 차렸다. 물론 손 청장의 야간 집무실도 만들었다. 낮에는 청사에서, 밤에는 여관에서 작업이 열흘간 계속됐다. 이렇게 해서 ‘절대녹화, 절대보호’라는 전대미문의 치산녹화 10년 계획이 만들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기녹화를 속성수와 장기수 비율을 7대 3으로 하고 국민식수 편의를 위해 10대 수종을 표준화한다. 양묘는 마을 주민의 소득에 보탬을 주면서 협동심을 배양하기 위해 현사시나무(버드나뭇과), 이태리포플러 등 양묘를 전량 마을 주민들이 협동해 생산한다. 또 주민들에게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마을 양묘를 도입한다. ‘절대보호’지에 산불이 발생, 100ha 이상의 임야가 불타면 시장·군수를 면직한다.>

내무부 행정력의 초강권 위에 산림정책이 놓이게 된 것이다. 김현옥 내무장관은 10년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전국 각 도지사, 시장, 군수, 경찰서장, 산림관계관 등을 내무부로 불러 모았다. 그때가 3월 16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첫째도 산, 둘째도 산! 첫째도 새마을, 둘째도 새마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부터 치산녹화 사업은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부 공무원을 총동원하게 됐다. 박 대통령도 내무부, 산림청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해 식목일 행사가 열렸던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에서 기념식수를 한 뒤 “치산녹화 사업에 정부 각 부처의 행정력을 총력 지원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이날 식목행사에 참석한 재일본 거류민단 소속 청소년 100여 명에게 “여러분이 앞으로 10년 후에 고국에 오면 푸른 강산을 보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현옥 내무장관, “난 산림장관이야”

김현옥 장관은 불시에 산림청에 출근, 나무심기 추진상황을 확인하곤 했다. 그는 “나는 산림장관이고 정성모 차관(당시 내무부 차관)이 치안장관이야”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치산녹화사업에 열정을 보였다. 산림청이 내무부 소속이 되고 내무부 장관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면서 치산녹화 사업은 유신(維新) 과업으로 격상됐다. 따라서 비상 국무회의나 새마을 국무회의에 산림청장이 자연스럽게 배석했다. 당연히 예산문제 등 관계 부처와의 협조도 원활해졌다. 산림청에 막강한 힘이 실리면서 전국 각 도에 ‘산림국’이 신설됐고 각 시·군에 ‘산림과’가 신설됐다. 산림부서가 최고 인기 부서가 됐다.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경찰 자동전화’가 설치됐다. 당시만 해도 통신시설이 부족해 지방행정기관과 전화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별도의 결재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경찰 자동전화’가 생기면서 전화 다이얼만 돌리면 일선기관과 바로 통화가 가능해졌다.

산림청에서는 새 출발을 상징하는 새로운 표어를 내걸었다. 손수익 청장이 직접 만든 표어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현수막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내걸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대형 아치를 세웠다.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는 토씨도, 접속사도 없는 아리송한 표어였지만 많은 국민이 산사랑, 나무사랑, 나라사랑을 떠올리게 하였다.

새마을운동과 병행한 치산녹화 사업은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됐다. 세계은행(IBRD)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려 나무를 심는다는 사실이 세계적 뉴스거리로 등장했다.

1976년부터 77년까지 2년 동안 12만7000ha의 연료림을 조성했다는 점, 새마을사업 차관으로 416만3000달러를 빌려다 나무 심는 데 드는 비용과 인건비로 지불했다는 점이 외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미국 CNN 방송은 아예 취재팀을 파견했다. 1977년 봄이었다.

CNN은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들여다가 산에 나무를 심는 현장을 둘러보겠다고 밝혔다. CNN 기자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차관이 진짜 나무 심는데 투입되는지’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취재를 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농촌 마을에 찾아가 아궁이를 직접 들춰 보고 구들장과 온돌 중심의 난방구조도 세밀하게 취재했다. 나무 심는 이와 식재 현장을 지도하는 산림 담당 공직자와 만나 인터뷰를 했다. 사방사업 현장에서 조림하는 장면도 꼼꼼하게 촬영했다. 미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됐다. 물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부에서 부역(賦役)으로 출역하도록 종용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니까, 치산녹화 조림이 농촌주민들의 무보수로 봉사하는, ‘부역’으로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1963년 2월 9일 법률 제1266호로 제정한 ‘국토녹화촉진을 위한 임시조치법’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되 ‘부역’을 과(課)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CNN은 모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갔다. 정확한 보도내용은 알 수 없지만,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국가재건에 나선 한국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방영했다고 한다.

이후 유엔의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서 한국의 치산녹화 현장을 시찰하러 오겠다는 통보가 이어졌고 동남아 국가에서도 시찰단이 내한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CNN의 보도 덕분이었다.
산림녹화 증언자들. 오른쪽부터 김동호·임종윤·김연표·이주성·안승환.


박 전 대통령에 절망을 안겨줬던 영일만은 지금…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인 1978년에 완료됐다. 108만ha에 나무를 심었고 420만ha의 육림(숲을 가꾸는 일)을 조성했으며 4만2000ha의 사방사업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30억 그루의 양묘를 생산해 조림했다.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사업에는 전국 3만4000여 단위마을 전체가 총력을 쏟아 참여했다. 새벽종이 울리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뛰었던 덕분에 치산녹화에 성공한 것이다. 치산녹화는 조국 근대화의 중심사업으로 뿌리내리며 조국 근대화의 유지 계승 토대를 확고히 다졌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에게 절망감을 안겼던 포항 영일만 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 영일만은 나쁜 토양 탓에 산림이 훼손돼 사방 4538ha가 속살을 훤히 드러낸 폐허였다. 그러나 5년여 만인 1977년 대역사를 완료하고 푸른 숲으로 탈바꿈했다. 동원된 인력만 360만명, 석재 230만 점, 토지객토 313만t, 사방용 묘목 2400만 본이 소요됐다.

1979년은 우리나라 치산녹화 역사에 매우 뜻깊은 해다. 제1차 10개년 계획을 4년이나 앞당기고 2차 10개년 계획(1979~1988)을 시작한 원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은 박 대통령이 서거한 해이기도 하다. 그의 집념이 담긴 치산치수의 결실을 매듭짓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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