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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전차전(戰車戰)
Mark Ⅳ 중전차
독일 전차 A7V
르노 FT-17 생샤몽(Saint Chamond)
르노 FT-17은 내부구조면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러한 생각을 실제화한 차량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만든 장갑 차량이다. 이름의 유래는 최초의 전차로 꼽히는, 영국에서 만든 Mk 시리즈의 암호명 ‘Tank’. 이 단어는 나중에 확립되었고, 현대 ‘전차’의 대표적 특징인 ‘강한 직사포와 일반적인 장갑차에 비해 매우 튼튼한 장갑판을 가졌으며, 무한궤도를 장비해 험지 돌파력이 뛰어난 장갑차량’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사실 처음 생각한 암호명은 ‘Water Carrier’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약자로 줄이면 W.C.(화장실)가 되는데?”라고 반문해 부랴부랴 Tank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한국어로는 고대 전차와 이름이 같으나 사실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런데 다른 언어권에서도 ‘Tank’를 ‘Chariot’에 빗대어서 말하는 사례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그러하며, 이스라엘의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는 성서에도 나오는 ‘병거(兵車) 메르카바’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대 기병사단의 직계 조상이 기병, 더 나아가 채리엇(Chariot)이라고 부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독일군과 프랑스군, 영국군은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곧 진흙탕 속으로 빠져든다. 전쟁이 기동전에서 참호전으로 변화되면서, 철조망, 참호, 기관총이라는 악마 3총사가 군인들 앞을 막아선 것이다. 절대로 뚫리지 않는 이 악마 3총사 앞에서 군인들은 속절없이 죽어갔고,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국, 프랑스, 독일은 해결책 마련에 골몰했다.
이때 영국군 공병장교인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Ernest Dunlop Swinton)이 무한궤도를 이용한 장갑차량을 새로 개발해서 참호를 돌파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육군성에서는 이 의견에 퇴짜를 놓았으므로 스윈튼의 야심찬 아이디어는 그대로 사장되는 듯했지만,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이 아이디어를 채용, 육상전함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리틀 윌리다. 리틀 윌리는 무한궤도가 달려있는 철판으로 둘러싸인 모양을 한 일종의 장갑차 같이 생긴 놈이다. 하지만 이 전차가 참호를 넘지 못해 좀 더 실용적으로 바뀌면서 나온 물건이 바로 Water Carrier라는 이름의 장갑차량으로, 이것이 현대 전차의 조상인 Mk 시리즈다. 단지 이름은 Tank로 바뀌었다. Water Carrier를 약자로 쓰면 W.C.(Water Closet)가 되는데, 화장실이라는 뜻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책임자인 윈스턴 처칠의 이니셜과 같기 때문이다.
1916년 9월 15일 아침, 프랑스 솜 지역의 참호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군들은 전방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영국군의 함성에 놀라 참호 바닥에서 뛰쳐나와 망원경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통상 짧게는 30분, 길게는 며칠 동안 준비 포격을 한 뒤에 공격을 시작하던 당시의 상식에 반하는 영국군의 돌격함성 소리에 당황하던 독일군은 이내 공포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돌격하는 영국군 사이사이 굉음을 내며 전진해오는 쇳덩어리들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다. 독일군이 기관총탄을 미친 듯이 쏴대도 모두 튕겨내며 천천히 전진하면서, 포화를 뿜는 쇳덩어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지상의 전함’ 이었고, 이 괴물의 등장에 기겁한 독일군들이 패닉상태로 패주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날 영국군은 8km x 2km의 지역을 전진하였고, 이는 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첫 데뷔전이 되었다.
소총은 18세기 이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병사들의 제식무기로 채택되었으며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18세기∼19세기 초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표준화기로 사용했던 전장식 머스켓 소총은 분당 사격횟수가 1발이 될까 말까 했었고 그나마 명중률마저 형편없는 관계로 병사들이 집단대형을 이루어 일제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이루어 졌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사격술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수 십, 수 백 명이 대형을 이루어 동시에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19세기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후장식 소총(드라이제 니들건)이 처음 등장 하면서 전장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보병은 분당 30발이 넘는 속도로 사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강선형 총열의 도입으로 명중률 및 유효사거리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탄띠로 이어져 분당 300발 이상의 고속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기관총 역시 등장하면서 전투의 양상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변모하게 되었다. 보병 밀집대형은 살아있는 이동표적에 불과하였고, 기관총으로 잘 방어된 적 진지로의 착검돌격은 더 이상 용기와 패기에 찬 행동이 아닌 집단 자살행위가 되어버렸다. 기관총 1∼2정이 600∼700 명 규모의 한 개 대대를 몰살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하게 벌어지자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는 대서양에서부터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수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철조망과 참호를 구축하고 그 안에 틀어박혔다.
이렇듯 화기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과를 확대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은 결국 보병들의 돌격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당시 참호전의 양상은 마치 공식과도 같았다. 짧게는 수 십분 길게는 며칠 동안 지속되는 준비 포격이 끝나면 압도적인 숫자의 공격부대가 장교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돌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잘 은엄폐된 방어진지의 병력들은 엄청난 포화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마련이었고 공격부대가 양측이 설치한 철조망 사이의 무인지대를 넘어서자마자 기관총과 박격포를 총 동원해서 화력을 쏟아 부었다.
결국 공격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이번에는 방어하던 측에서 다시 역습을 가하고 역시 공격이 실패하기를 반복 하였다. 이러한 전투 양상 때문에 불과 2∼3km를 전진하는데 수만∼수십만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공격이 성공해봐야 확보한 땅에 전사자를 묻기도 모자란다고 한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무의미한 비극이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도저히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연합국과 추축국 지휘부가 깨닫게 되는 데는 2년이라는 시간과 3백만 명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러한 지루한 참호전을 타개할 묘안을 강구 한 것은 영국의 종군기자인 어네스트 스윈튼 소령이었다. 농촌에서 흔히 쓰던 트랙터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스윈튼은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포로 무장한 장갑차를 고안 했으나, 과거 나폴레옹 시대의 보병 돌격전만을 고집하던 육군수뇌부에서는 애들 장난감으로 치부하고 이 제안을 무시했다. 하지만 당시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이 장갑차량의 실전 투입이 결정 되었다. 당시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이 병기의 암호명은 물탱크(W.C, Water Carrier)였다.
하지만 약자인 W.C가 수세식 변기라는 중의적(重意的)인 의미도 있었던 관계로 최전선에 갑자기 수십 대의 수세식변기가 공수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는 의견 때문에 암호명은 그냥 탱크(Tank)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솜 지역 전선에 첫 투입된 49량의‘탱크’가 기관총탄을 튕겨내면서 독일군의 철조망을 짓밟는 모습이 주는 공포감은 대단했지만, 처음으로 실전 투입된 실험적 병기의 기계적 신뢰도는 기대 이하였다.
투입된 49량의 전차 중에 전선 돌파에 성공한 전차는 불과 23대였으며, 이날 무사히 귀환한 전차의 숫자는 9대였다. 이 때문에 전차 무용론까지 대두 되었으나 전차의 잠재력을 꿰뚫어본 영국군 사령관인 헤이그 장군의 적극적인 지지로 결국 전차의 대량 생산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캉브레 전투에서 400량이 넘는 전차가 처음으로 집중 운용되어 전과를 올리면서 전장에서 전차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영국군의 전차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군도 1918년 A7V 전차를 개발하여 영국군의 Mk.4 전차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미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대전 말기에 접어든 관계로 당초 계획처럼 대량 생산을 하지는 못했다.
참고로 초기 전차의 개발에 미국이 의외로 큰 기여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궤도차량에 익숙하지 않던 유럽에 미제 트랙터(특히 홀트 트랙터)가 대량으로 보급되어 무한궤도의 우수성을 알렸고, 전쟁이 발발하자 이 트랙터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CA1, 생 샤몽 그리고 독일의 A7V가 만들어졌다.
1916년에 출현한 영국의 MK I은 최초의 전차로 기록되었는데, 사실은 프랑스에서도 같은 시기에 슈나이더(Schneider) CA1, 생샤몽(Saint Chamond)이라는 전차를 만들기는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두 전차는 개발은 MK I보다 빠르나 실전투입이 늦은 데다 실패작이므로, 최초의 전차라는 영광은 MK I에게 빼앗겼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선회식 포탑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현대 전차의 기계적 구성요소를 처음으로 완성한 르노 FT-17를 만들었다. 그 전까지의 전차는 움직이는 토치카에 가깝지만, 르노 FT-17은 선회식 포탑 사용, 하나의 주포, 후방 엔진 구조를 지님으로써, 이전의 전차와는 다르게 현대 전차의 정의(定義)의 하나인 강한 직사포를 원활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전차의 시작은 MK I, 전차의 아버지는 르노 FT-17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2차 세계대전 때에도 폴란드 침공 때 폴란드군이 운용했으며 중국 국민당군과 일본군이 중국 전선에서 운용했고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때, 이탈리아군이 이걸 끌고 나와 맞서기도 했고 베를린 공방전 때도 소련군이 노획해 모아 놓은 독일군 전차 사이에 독일 측에서 급한 대로 끌고 온 이 녀석이 사진으로 남았다. 2003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근처에서도 기동 가능한 FT-17 2대가 목격되었다. 다만 인터넷 검색으로 기동 가능한 르노 전차의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다만 2000년대 들어 발견된 르노 전차들을 아프간이 각국에 선물한 것은 사실이다. 아프간의 FT-17들은 원래 폴란드군 소속이던 것을 소련군이 뺏어 아프간에 기증한 것이라 그 중 1대는 폴란드로, 2대는 미국으로 보내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차들은 하나같이 문제점이 심했다. 장갑이 상당히 빈약한 편이라 일반 대포나 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물론 대전차 소총이나 집속 수류탄, 기관총 난사 등으로도 격파 내지는 승무원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차를 “철의 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또 이 ‘철관’이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인츠 구데리안의 저서인 "Achtung, Panzer"를 읽어보면 책 내용의 반 이상이 전차 때문에 독일 제국이 전쟁에서 진 것이다라는 내용들이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참전용사들을 보면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연합국의 전차’ 때문이라고 답을 했다는 말도 있다. 그들도 굴러다니는 자동차야 본 적이 있었겠지만, 전면이 강철로 뒤덮여서 어지간한 구경의 총 따위는 씹어 삼키는 강철기동요새는 역사의 첫 번째가 되어 처음 봤을 테니 말이다.
또한 실제 사례를 들어보면, 1918년 춘계 공세 때에 후티어 전술(Oscar von Hutier)을 앞세운 독일 제국군이 해안가의 영국군과 내륙의 프랑스군을 서로 갈라놓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앵에서 파리 근교를 코앞에 둔 독일군에게 느닷없이 프랑스군이 슈나이더나 생 샤몽, FT-17 같은 전차들을 모아 한번에 반격을 행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자 바로 독일군의 공세여력이 사라지고 독일군은 퇴각하였으며 다시는 공세를 취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또 다른 사례로 백일 전투 당시에 프랑스군의 FT-17 3대가 침투해 들어오자 독일군 사단 하나가 기동을 멈추고 돌격대 4개 대대가 붙어서 수백 명의 병사들이 다치고 실종된 다음에야 겨우 다 잡았다. FT-17 전차가 그리 크지도 않은 경전차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3대만으로 알보병 사단 하나를 멘붕에 빠뜨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 당시 현실이다. 사람 숫자로 따지면 르노 FT-17에는 전차장, 조종수 2명만 타므로 단 6명이 다루는 3대의 전차 때문에 1개 사단이 망가졌다는 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은 장갑화된 전력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그 때문에 전쟁 직후 전차의 종주국이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전차 발전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둘의 발전 방향은 상당히 달랐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전차인 보병과 같이 돌진하는 개념의 초중다포탑전차인 Char 2C와 1인승 포탑을 가진 FT-17의 발전형을 만들었지만, 영국은 독립적인 전차부대 창설을 위한 “실험적 전차부대”를 창설하여 선진적인 전차 연구에 중점을 두면서 빅커스 미디엄 MK 1, 2호전차를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기 기간동안 130∼300대나 만들어 낸다. 특히 이 빅커스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탄약수를 분리한 3인용 포탑, 제대로 된 서스팬션, 차체 기관총, 동축 기관총, 무전기 등 사실상 혼자서 2차대전 전차의 구성을 정립하였고 해당 전차는 마틸다 전차의 차대로 활용되게 된다.
이후 이 3인포탑은 영국의 인디펜던트 전차의 주포탑에 계승되어 다포탑 전차 붐 당시에 생산된 다포탑 전차들에 3인용 포탑이 장착되게 하였다. 때문에 독일, 소련, 영국 등은 전간기동안 자국의 전차들에 3인용 포탑을 장착하게 된다. 반대로 인디펜던트를 참조한 다포탑 전차를 만든 적이 없는 국가들은 전간기 동안 2인용 포탑을 채용한 전차만을 생산했다.
다포탑 전차 붐이 발생한 이유는 전간기에서 2차대전 중기까지는 대전차포(Hard Target)와 대보병포(Soft Target)가 이원화 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인디펜던트 전차를 본 독일과 소련이 이를 해답으로 여기고 인디펜던트 전차를 본받은 다포탑 전차들을 만들어 대전차포와 대보병포를 같이 장착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동안 전차들에 대구경 주포가 장착되면서 이원화는 끝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포탑 중(中, 重)전차는 당시의 기술로 실현이 가능할지 불확실한데다 비싸기까지 했기 때문에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던 국가들은, 영국의 카든-로이드 탱켓과 빅커스 6톤, 프랑스의 FT-17을 수입해와 자국 전차 산업의 기반으로 삼으며 비교적 경(輕)장갑인 경전차 위주로 개발했고, 강대국들 또한 경전차를 중(重)전차 완성의 공백을 매우는 방식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경전차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독일 전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일의 1호 전차 A형. 대전간기(大戰間期)에 개발된 대표적인 과도기적 경전차이다. 독일도 대공황의 여파 및 다포탑 중전차의 실패로 전쟁중반 까지 중형전차 대신 경전차를 대량으로 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