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첫째 공동체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아주 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다. 어부였던 이들이 배와 그물을 버렸고, 세리였던 이는 좋은 직장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과 이념을 버렸다. 그리고 가족도 떠났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과정을 아주 단순하게 보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큰 결정을 내린 건 그들의 숙고와 고민의 결과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넘치는 카리스마 때문이었을 거다. 예수님의 매력에 빠진 거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공동체에 속한다. 가족, 직장, 교회, 이런저런 모임과 후원하는 단체 등에 소속되어 있다. 그중에 내가 가장 깊숙이 또는 가깝게 속해 있는 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대부분 가족이 첫째일 테고 수도자와 성직자는 교회와 수도회가 될 거다. 그 첫째 공동체가 내 마음이 있고, 내 영혼이 제일 오래 머무는 곳이다. 그 외 다른 공동체는 언제든지 또는 상황이 바뀌면 탈퇴하거나 내 마음에서 끊어버릴 수 있다. 열두 제자는 그 첫째 공동체를 예수님의 공동체로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인생을 걸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오는 사람, 매일 나오는 사람, 일 년 또는 평생 한두 번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자주 나온다고 꼭 하느님과 가까운 건 아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셨으니(마태 6,21), 하느님과 가까울수록 성당에 자주 나오거나 하느님 말씀에 마음이 움직이고 교회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될 거다.
오늘 독서 집회서는 말한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집회 35,6).” 헌금과 교무금을 많이 바치라는 뜻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집회 35,1-5).” 돈은 성당 살림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원하신다. 사제나 전교 수도자는 성당에서 살고, 다른 교우는 세속에서 산다. 성당에 산다고 다 하느님과 가까운 게 아니고, 세속에 산다고 하느님과 먼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과 회당, 시장과 집 그리고 이방인 지역까지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가셨다. 기도하실 때만 산속에 홀로 계셨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특히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열두 제자처럼 정말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건 아니지만, 그분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내가 행하는 모든 게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나의 첫째 공동체도 서서히 바뀌어 간다.
예수님, 여기저기에 속하고 연결되어 있어도 나중에는 다 끊어지고, 오직 주님께만 속하게 됩니다. 그걸 알고 있으니 다른 것들에 마음을 주거나 한눈팔지 않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을 통해서 제가 영원히 속하게 될 공동체에 마음을 두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