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 낯선 나
익숙한 낯설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익숙한 낯설음이란 단어를 보고 모순적인 단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했다. 익숙한 낯설음, 그것은 바로 ‘나‘와 가장 닮아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삶 속,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인간의 욕구에 충실하며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동을 하다가도 문득 내가 있는 공간, 현재,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낯설게 느껴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라는 나의 물음에 ‘부모님이 나를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답이 되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잉태했을 때에 아무도 ’나‘라는 자아가 탄생할지는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나는 왜 태어났는가?‘ 라는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의문이 들 때 나는 생일마저도 낯설게 느끼고는 한다. 나의 생일에 사람들은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행위를 한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내가 태어났음을 축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년 생일마다 축하를 받으면서도, 나는 아직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도 못했는데 왜 내가 태어났음을 축복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잉태했던 것과 나의 탄생, 그 때문에 ‘나’라는 자아가 생겨나는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하는 물음도 가질 수 없었을 테니 그런 의문은 금방 내 생각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아버리고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 의문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끝없는 물음이었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나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의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것은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것에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내 삶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랑이나 술, 담배 같은 한낱 유흥거리도 내 삶의 이유는 아니었다. 내 의문은 삶의 근원, 즉 ‘나‘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나는 이따금 잠이 오지 않는 밤, 삶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적인 생각을 하며 끝없는 우울함에 빠질 때는 입맛이 없어진다거나, 잠을 자는 게 싫어진다거나 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밥을 먹는다거나, 잠을 자는 게 즐겁다는 것은 사소한 이유더라도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삶의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상기할 때 내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실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낯설음이란 단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장자가 나비가 되어서 날아다닌 꿈의 이야기인 <호접몽>을 읽고 삶의 덧없음에 공감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이유란 것은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어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비이면 어떻고, 나비가 나이면 어떤가? 어쨌든 ‘나’는 지금 살아있는데 말이다.
낯선철학하기-익숙한낯설음.hwp
첫댓글 철학적인 경험을 일상에서 하고 있군요. 그런데 아직 호접몽을 보면서 삶의 덧없음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해요. 물론 그런 때가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지만요. 왜 나는 호접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 내가 나비면 어떻고 나비가 나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도 생각해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