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 싸우고 가슴으로 이겨야 진정한 승리입니다. 적을 만들거나 원수가 되는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원수를 만들려고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파멸을 불러오게 되고 나라는 불행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싸우지요? 싸움이 목적인가요? 그야말로 인생도 역사도 비극일 뿐입니다. 의미 없는 낭비입니다. 다 차지한다고 해도 얼마를 누리겠습니까? 한 세기? 반세기? 그러고 나서 가져가겠습니까? 어디로? 그 몇 년을 누리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겁니까?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불행이지만 우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의미를 만들며 역사를 만들고 이어갑니다. 개인의 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학비 전액 장학금에 옥스퍼드 대학 입학 허락 통지를 받았습니다. 멋진 장래가 그려집니다. 그런데 기꺼이 포기합니다. 그리고 어렵고도 긴 투쟁이 기다리는 그야말로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향해 발을 돌립니다. 보장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 않고 폭풍 몰아칠 먹구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일까요? 하기야 오늘 파란 하늘이 내일도 파란 하늘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운명은 스스로 만들기 나름입니다. 파란 하늘 아래서도 곡소리 날 수 있는 일이고 먹구름 아래서도 웃음소리 날 수 있습니다. 사실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옆에 같이 가는 사람입니다. ‘너는 나의 운명’은 아니더라도 함께 일궈나가는 목적이 보다 위대하다면 인생을 걸만하지 않겠습니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곧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납니다. 기숙사 있는 학교로 들어가지만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독일인들 가운데 껴든 영국인입니다. 마침 나치 독일이 위세를 떨치고 있던 시기이니 아이들까지 덩달아 위세 등등합니다. 어린 나이에 기댈 곳도 없이 당하다가 겁에 질려 오줌싸개가 됩니다. 집에 도망치듯 돌아와 유모의 주선으로 원주민 주루족의 주술사를 만나서 용기를 배우고 고칩니다. 그 후 ‘피케이’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로 돌아가 거기서 할아버지의 지인인 독일인 피아노 선생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연을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쌓고 자연에서 지혜를 배우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영국의 영지에서 독일인이라고 선생님이 교도소로 잡혀 갑니다. 단지 그 능력을 인정은 받아 달리 대우를 받습니다.
교도소를 드나들며 선생님과 같이 일하고 지냅니다. 작아도 똑똑하면 이기는 거야. 가르치던 선생님은 흑인 수감자 중 권투를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줍니다. 권투를 배우지요. 정말 열심히 배워 실력이 자랍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처참한 현실을 봅니다. 자기만 당한 차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국인이기에 당했던 그 차별을 이제는 영국인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흑인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뭐가 다르지요? 똑같이 먹고 싸고 자고 하는데 말입니다. 교도소 안에서 흑인들과 지내며 그들의 말을 합니다. 흑인들도 그의 호의적 태도에 마음을 엽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 신화에 나오는 ‘레인 메이커’(화해자라고나 할까요?)로 인정받습니다. 흑인들 속에서도 부족 간의 갈등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피케이는 음악을 통해 하나로 화합시키는데 성공을 합니다.
어느덧 자라 18살이 된 피케이는 소년 체급의 챔피언이 됩니다. 그리고 흑인 구역까지 들어가 시합을 합니다. 사실 백인들은 감히 드나들지 않는 곳입니다. 유독 피케이는 그런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우려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이 교육입니다. 일단 그 사회 통용어인 영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내가 맞아야 하는지,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의식이 깨어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물론 대단한 노력과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돕는 자가 꼭 필요합니다. 피케이는 그야말로 그 시기에 맞는 사람이지요.
권투시합 중 한 여자가 눈에 띕니다. 결국 알게 되지만 독일인 유명 교수의 딸입니다. 서로 좋아하게 되고 피케이의 일에 동조하며 돕다가 그만 자기네 수사대의 강력단속에 희생당합니다. 모두에게 아픔이지요. 그 아버지를 비롯하여 피케이 그리고 도움을 받던 흑인들, 모두에게 슬픔이고 고통입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서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바로 독일인 그 녀석이 경찰 수색대원이 되어 나타나 다시 또 그다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흑인 사회가 자기를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들어온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커다란 폭포도 한 방울 물로 출발합니다. 역사의 획기적 변화도 한 사람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시작하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 할 것인가?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 : 7) 사랑했던 ‘마리아’도 분명 그 길을 같이 갔으리라 믿습니다. 영화 ‘파워 오브 원’(The Power Of One)을 보았습니다. 1992년 작입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파워 오브 원
대단하시네요
혹 영화 평론가일을
하시는지
날카롭게 콕 집어내는게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냥 취미로 긁적거리는 거지요. 보고만 끝나면 아쉬워서 글로 남겨보는 겁니다.
암튼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요,,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복된 주말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