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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춘에 웨이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 2
( 온 사실을 증명키 위해 입구에서 6명 전원이
좌로부터 부사 이규암 비장 김장호 정사 도재범 그리고 마부 조성원 역관 곽김구 화공 박근배)
'위만황궁박물관'(僞滿皇宮博物館)에 가면 집희루라는 곳 앞에 비석하나가 놓여 있다. 비석에는 쟝쩌민(江泽民) 전 주석이 쓴 <勿忘 “九,一八”>이란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뜻풀이 그대로 '9.18을 잊지 말자'란 말이다. ‘9.18’ 과연 그 날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큼지막한 돌에 뎅그러니 저 글자만 새겨놓았을까. 필시 그날은 그들에게 뼈저리게 아픈 날일 것이다. 이 건물이 생긴 연유와 맞닿았을 것 같은 뼈저린 느낌, 그 역사를 알아야 이 건물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않을까. 지나온 자취는 여행의 중요한 디딤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맞다. 일본의 관동군은 그날 그러니까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반, 봉천 교외의 류탸오거우에서 만주철도를 고의적으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군벌인 장학량 군대의 행위라는 구실로 군사행동을 일으켰던 날이다. 바로 만주사변이다. 일본군은 장학량의 군영인 북대영과 봉천성을 공격하였고, 다음날 봉천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또한 길림으로의 출병과 9월 21일 조선군(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인 하야시 센주로 중장에 의한 조선군의 독단 월경으로 전화는 남만주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정부는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함께 금후의 군사행동 불확대방침을 발표, 사건을 공인하였으나 육군은 이를 무시하고 전선을 확대해 만주를 계속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이 되자 일본은 청 최후의 황제이던 부의를 원수로 옹립해 새로운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바로 우리는 지금 그 만주국 정문에 서 있는 거다. 현재는 정식명칭이 '위만황궁박물관'(僞滿皇宮博物館)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개인을 위한 박물관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는 곳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흥미 있게 본 사람이라면 전시내용이 빠르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국제 정세 상 만주를 일본의 영토나 식민지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제가 잔대가리를 굴려 편법으로 한 짓이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것이다. 만주국은 일단 표면상으로는(법적으로는) 정식 독립 국가였으므로 통화 발행과 헌법을 공포한데다, 서구열강 심지어는 교황의 인가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만주족이었던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하여 정통성 확립까지 꾀하였다.
당시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부의'는 1912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자리에서 밀려난 후, 만주족 국가의 부흥을 꿈꾸기만 할 뿐 별 볼일 없는 백수가 되어 천진의 일본조계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만주국 황제자리 제의를 하다니 그는 아마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름뿐인 허수아비 황제에 종전 후에는 전범으로 몰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의는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의 '황제'로 스카우트되어 오면서 궁전(통칭 지질궁)의 완성까지 임시 궁이었던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정식 궁전의 공사가 흐지부지되면서 부의는 결국 재임기간 대부분을 이곳에서 거처하는데 1934년 3월 1일에는 이곳에서 만주국 황제즉위식이 열리기도 했다. 위만(僞滿)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가짜 만주라는 말이다.
우리는 내궁이라 쓴 건물로 들어섰다. 황궁으로 쓰던 건물이긴 해도 급조된 때문인지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건물마다 일본 스타일 그대로 오밀조밀하게 가꿔져 있고 소박하기 까지 하다. 제일 처음 마주한 것이 푸이의 집무실, 현대식 책상에 의자 그리고 책장, 황제자리 치고는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기 까지 하다. 옆방은 내무군신 자리, 그런데 끝 방이 흥미롭다. 일본 부 대사 자리라는데 마치 그들을 감시하고 호령하는 듯 널직하고 은밀하다.
勤民樓(군민루)는 푸이가 황제 취임 의식을 가졌던 곳이며, 외국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이고 회원루의 1층은 황궁근시처(近侍處), 시종무관처 등과 2층엔 尙書府(상서부), 시위처 그리고 중형의 연회장인 연회청으로 되어 있다. 嘉樂殿(가락전)은 대형 연회장소다.
집희루(緝熙樓)1932~45년까지 부의와 그의 부인 원용(媛容)과 문수(文秀)가 생활했던 곳이다.
부의가 집무를 보던 서재. 방에는 관동군사령관을 회견하는 부의가 재현되어있다.
원용의 방2층 서편. 오랜 기간 자유가 없는 궁전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고민을 풀기위해 원용은 매일 아편을 피웠다. 나중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이던 그녀는 부의에게도 버림받고 아편중독자가 되고 만다.
부의의 침실
2층 동편. 1932년 4월 3일부터 1945년 8월 11일까지 부의가 묵었던 침실. 그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이불대신 타월을 덮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담옥령의 침실영화 '마지막 황제'에는 안 나오는 내용이지만 부의에게는 3번째 부인 담옥령(譚玉齡)이 있었다. 담옥령은 부의를 정치와 정권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하기 위해 관동군사령관 요시오카가 붙여준 여인이었다. 당시 나이 15세로 상냥하고 사려 깊고 애교가 있어서 부의의 사랑을 독차지해 '상귀인'(祥貴人)으로 책봉되나 1942년 불과 22살의 나이에 병으로 급사하고 만다.
緝熙樓(집희루)는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와 마지막 황후 완롱(婉容)이 기거하던 곳이다. 건물 동편에는 완롱, 서편에는 푸이가 각각 사용했다. 집희(缉熙) 두 글자는 푸이가 직접 명명했고 그 의미가 바로 강희(康熙) 황제를 되살려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으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회복한다는 의지를 담았을 것이다. 이는 푸이를 활용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의도에도 꼭 맞았다. 그 집회루 앞에 쟝쩌민(江泽民) 전 주석이 쓴 <勿忘 “九,一八”>이란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
동덕전(同德殿)이 건물은 일본인 기사에 의해 설계된 건물로 1938년에 낙성되었다. 부의와 그의 마지막 부인 이옥금(李玉琴)의 거처로 이용될 예정이었다.同德殿(동덕전)은 황금색 유리기와로 지은 푸이의 "日滿一心一德" 을 보여줄 사무실로 사용하려다가 내부의 도청시설이 두려워 사용을 하지 않았던 곳이라고 한다.
일본간(日本間)일본과 만주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일제는 동덕전 안에 일본전통양식의 방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요시오카(吉岡) 관동군사령관과 부의는 회견을 하기도 하고 일본요리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옥금(李玉琴)의 방원래는 정부인 원용의 방으로 설계되었으나, 원용은 부의에게 버림받다시피 하여 동덕전 낙성후인 이 방은 빈방으로 남게 되었다.
푸이의 거처에 많은 방들, 많은 여인들이 기거하던 방들이다. 도데체 푸이는 여인이 몇 명이나 되는 걸까. 남의 가정사 알 것은 아닌데 부득 들쳐는 봐야겠다. 청나라 황제라 많은 여인을 한꺼번에 두고 산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 물결에 맞춰 황제이면서도 이혼이라는 것을 했고 또 여인들을 숫하게 만난 것인지 내심 궁금하다.
푸이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후 마지막 황제로서 자금성에서 거주하는 동안 완롱을 황후로, 원슈(文绣)를 황비로 맞아들인다. 마지막황비 완롱은 원슈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가 심했으며 저주했다고 한다. 게다가 푸이에 대해 반감을 일으키게 되는데 사적으로 통정을 해 딸을 낳기조차 한다. 대노한 푸이는 이 신생아를 끓는 화로에 던져 죽여 버린다.
후일 완롱은 아편에 빠진 채 심약한 생활을 하다가 만주국 황후가 되었다가 1946년 병사한다. 원슈는 14살에 푸이의 황비로 들어온 후 자금성을 나와 생활의 곤란을 겪다가 황제와 이혼소송을 제기한다. 이러한 일은 봉건황제의 나라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된다. 원슈는 1950년에 병사한다. 푸이는 완롱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슈로 부터도 이혼 당하게 되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황제라 할 수 있다.
푸이는 만주국 황제가 된 후 새롭게 귀인(贵人)을 맞이하게 된다. 귀인이란 황후(皇后), 황비(皇贵妃), 귀비(贵妃), 비(妃), 빈(嫔), 귀인(贵人), 상재(常在), 답응(答应)으로 나누어지는 청나라 황제의 부인 서열의 여섯째 등급의 신분을 가리킨다. 1937년에 푸이는 완롱을 못마땅하게 여겨 귀족 출신의 탄위링(谭玉龄)을 귀인으로 맞는다. 탄위링은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푸이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1942년에 돌연 병사하게 되는데 실제로 알려진 대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관동군이 살해한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푸이는 자서전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내 인생의 전반부(我的全半生)>에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링이라고 토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혈통의 여자를 푸이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푸이는 결국 1943년에 평민 출신의 리위친(李玉琴)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한다. 일본 관동군이 붕괴할 때 민중 봉기군을 피해 푸이와 리위친은 함께 도망친다. 이후 전범으로 체포된 푸이가 있는 여순감옥에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 차례 서신 왕래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리위친 또한 푸이와 이혼의사를 밝힌다.
이후 푸이는 특사로 석방된 후 평민으로 돌아와 중국인민정부의 소개로 항저우(杭州) 출신의 간호사인 리슈씨엔(李淑贤)과 1962년 4월 30일 결혼한다. 1967년에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망인 리슈씨엔은 1997년 사망했다.
그런데 전시 내용을 보면서 영화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도 몇 군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 스토리 전개상 임의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면 3, 4번째 부인에 관한 것과 그의 만년에 관한 것인데, 영화에서 본 것이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로는 그가 쓸쓸하게 정원사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전범관리소 출소 이후 그가 정원사로 일한 기간은 불과 몇 년뿐이었고 역사집필위원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지냈다는 것과 1967년에 암으로 사망한 이후 1995년에 선조 황제/황후들이 잠들고 있는 북경 근교의 청동릉으로 (선조들의 능묘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소하지만) 이장되어 결국은 황제로서의 명예회복을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데 실제 이야기보다 영화 이미지에 더 애착이 간다. 패망한 청나라 마지막 황제답게 더 비참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관적 입장에서 보아도 그 영화가 주는 의미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귀뚜라미와 아이, 자금성에 외톨이 아이가 바로 푸이였다. 3살 때 어머니의 곁을 떠나 자금성으로 와, 서태후를 대면하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청나라의 황제가 된 푸이. 황제가 되기에 너무 어렸던 푸이는 즉위식 때도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과 신하가 가지고 있는 ‘귀뚜라미’와 보모에만 관심이 있다. 세월이 흐르고 그가 조금 더 컸을 때, 자금성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푸이 황제의 동생인, 부체경.
오랜만에 동생을 만난 푸이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 날 부체경이 오직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황색의 옷을 입고 있자 푸이는 화를 낸다. 부체경의 대답은 푸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더 이상 형은 황제가 아니야.” 신해혁명 시기이다, 두 눈으로 그것을 직접 확인한 푸이는 큰 혼란을 느낀다. 푸이가 청소년이 되었을 무렵, 외국인 가정교사가 등장한다. 레지노 플레밍 존슨트 그는 자금성 내에서 유일하게 푸이 황제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더 나아가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르고 결혼을 한 푸이 황제는 여전히 자금성 밖을 나가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청나라의 전통인 변발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른다. 그러던 어느 날, 푸이 황제는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푸이 황제는 자유를 만끽하며 톈진으로 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다. 그런 그는 일본군과 협력해 자신의 조국인 만주를 비롯해 중국본토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하지만 이미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이 크나큰 영향력을 끼치던 때다, 그는 일본군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자 했지만, 일본군들은 역으로 푸이 황제를 이용하여 만주국을 설립해 그를 만주로 데려간다.
세월이 지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에서는 대대적으로 반동세력들을 숙청한다. 그중 푸이 황제도 일본군들과 지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된다. 수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이후, 그는 평범한 정원사로 살다가 거리에서 데모하는 홍위병들을 보고 늦은 오후 자금성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한때는 자금성에서 호화롭게 살았던 푸이. 하지만 지금은 여느 관광객과 똑같이 표를 끊고 자금성으로 향한다. 자신이 즉위했던 의자 위에 올라가려던 중,
“거기는 출입금지 구역인데 왜 들어가세요? 들어가면 안돼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자금성 야간 경비원의 아들로, 푸이는 “넌 누구니? 나는 예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이란다.”라는 회답을 한다. 믿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서 푸이는 어릴 적 자신이 신하에게 받아 몰래 숨겨둔 귀뚜라미를 그 아이에게 주고는 영화가 끝난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푸이(부의)라는 사람의 인생은, 어려서부터 타의에 의해서 황제가 되고, 타의에 의해서 살아가고, 타의에 의해서 망명하고, 돌아보면 자기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찾는 데에 일평생을 고뇌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어머니가 죽었던 때까지 그가 외치던 말은 “집에 가고 싶어.”였다. 그에게 있어 자금성은 집이 아니었고, 그곳에는 따뜻함이 없었다. “문을 열어라.” 언제나 바깥을 나가고 싶어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노년에 평범한 시민이 되었고, 정원사가 되었다.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홀로 남은 그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회상하는 옛 장면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겨졌다. 다시 오지 않는 과거,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과거,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아마도, 진정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황제 푸이의 유일한 친구는 귀뚜라미였다.
마지막 황제, 푸이/ 상징성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꽤 긴 시간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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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붕어하자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서태후가 푸이를 동치제와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 지 2년 10개월 만에 청나라 12대 황제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청 왕조의 가법(家法)에 따르면 동치제가 죽었을 때, 항렬이 부(溥)자인 자손들이 황위를 계승해야만 했지만 서태후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광서제로 황위를 승계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푸이는 동치제와 광서제를 겸조하여 대를 잇게 되었다. 서태후는 푸이의 생부인 순친왕을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으로 임명하여 정치의 실권을 위임하였고 광서제가 붕어한 다음날인 11월 5일에 붕어하였다.
즉위식은 1908년 12월 2일 베이징의 자금성 태화전에서 봉행되었다. 즉위식에서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순친왕은 "울지 마라, 곧 끝날 거야!"라고 말하였고, 대신들은 대청제국의 불길한 징조라고들 하였다. 1909년 순친왕은 형인 광서제를 배반하고 무술변법을 실패하게 만든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 위안스카이를 실각시키고, 위안스카이는 허난성 펑더(彰徳)에 칩거한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가 발생하자 위안스카이는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를 총리대신에 임명하였고, 순친왕은 섭정에서 물러나야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孫文)으로부터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적극적으로 청 왕조 타도에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 1868 ~1913)에게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협박을 하였고 황족회의에서는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숙친왕(粛親王 善耆)과 공친왕(恭親王 溥偉, 1880~ 1936)은 푸이의 퇴위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황태후는 황제의 퇴위를 결단하였다. 1월 30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난징 임시정부 측과 퇴위 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 2월 9일 황제에 대한 퇴위 후 조항을 비롯해 황족에 대한 우대, 만주족·몽고족·회족·장족에 대한 우대 조항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된다. 2월 11일 황태후가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2월 12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의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의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퇴위조서를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에서 퇴위하였고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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