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성시간 묵상 자료
믿음을 더하는 삶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가 17 ,5)
이는 제자들이 비탄에 잠겨서 청한 기도입니다. 제자들 역시 방황하며 흔들렸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그들을 몇 번이나 꾸짖으셨습니다(마태 8, 26 ; 16, 8 ; 17, 20 참조). 예수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건설하실 ‘반석’인 베드로 역시 ‘믿음이 약한 인간’으로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이 더욱 더 강해지기를 청하는 이 기도는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구하는 것으로, 우리 각자의 삶에는 흔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리지외의 아기 예수의 성녀 또한 비록 온 일생 동안 자녀로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삶의 마지막 18개월 동안 “믿음을 거슬러가는 시련”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녀는 이를 마치 하늘로 치솟아 별들을 덮어버리는 벽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비록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고 있지만, 이 땅 위에서 혼자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헤아리시고, 우리가 하는 선한 일들과 우리가 거쳐 가는 시련들,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는 천상 아버지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가 “우리는 사람을 믿습니다”(1요한 4, 16)라고 말한 것처럼 이를 되풀이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며,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도, 말, 행동, 슬프거나 기쁘거나 또는 우리와 관련이 없는 모든 사건과 질병, 우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 사소한 행위, 생각, 감정 등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면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주 그분과 대화하게 하고,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 계획들과 제안들을 보여드리게 하는 신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 맡길 수 있고, 이해와 위안과 도움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의 이 기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여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루가 17, 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겨자씨 한 알.. 예수님께서는 큰 믿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바탕을 두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참된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 모든 불가능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자주 우리를 둘러싸고, 또한 우리 안에 자리 잡는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뿌리째 뽑힐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가정 안의 불일치를 해결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대들, 사회 계층들, 세기에 걸쳐 갈라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 인종들 사이에, 백성들 사이에 보편적인 형제애가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평활고이 살게 된다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시고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느님,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고 믿음 안에서 자라날 수 있게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기도하면서, 특별히 어려움과 의문이 닥칠 때, 기도하면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주님, 당신의 사랑 안에 남아 있게 해 주소서. 믿음으로 혹은 경험으로 인해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단 한 순간도 느끼지 않고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한 채 살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고 굳건해 질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 안에서 생생하게 이 사랑을 느낄 것이며 우리 주위에 기적이 일어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묵상 2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시 반사되어 갔다가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습니다.
이웃을 엄하게 비판하게 되는가요? 우리도 엄격한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자비로 대하는가요? 우리도 자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책임을 과소평가하면서 그들을 저울질하는가요?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용서하며, 이웃이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가 심판관처럼 처신하지 않고 하느님께 모든 판단을 맡겨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웃뿐 아니라,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알게되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든 공인이든 모든 사람들과 이렇게 처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저울질을 당할 것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저 세상의 문턱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은 존재합니다. 또 다른 삶이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때가 오기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계속해 가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나날을 그분 사랑의 손길로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마치 허공 속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오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이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도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 뿐만 아니라, 육신적 고통을 느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손과 발 등 온 몸에 상처를 입으셨으며, 그 밖에도 많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는미께서 이렇듯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서로 상대방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미든 s사랑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하여 어느 날엔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실 최후의 심판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할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종종 쓴 맛을 지니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이며,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어느 면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제약을 가할 수도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지금부터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잠시 쉬었다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 속에 고통을 지니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고통을 끌어안기를 바라시며, 즉시 사랑하기 시작할 것을 바라십니다. 모든 시련은, 특히 영신적인 시련은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완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과 단련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튼튼하게 살이 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지근하거나 높낮이가 있어서는 안되므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죽음에서 생명에로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짧은 시간 안에 영적으로 아주 먼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휠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의 고통을 끌어 안고, 즉시 사랑의 삶을 시작할 것을 바라시며 사랑의 삶에로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