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방벽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잉글랜드 북부의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약 120km에 걸쳐 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호전적인 픽트족을 로마 제국의 영토 밖으로 몰아내고 국경선을 확실히 표시할 목적으로 이 벽을 쌓았다. 고대의 방위, 주거 시설로는 가장 규모가 컸던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로마 군대가 철수한 뒤에도 17세기 초반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사용되었다.
120km에 이르는 방벽
로마 황제 직할 속주에 상주하고 있던 레기온은 직업 군인으로 이루어진 정규 군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레기온 병사들은 칙칙한 날씨와 자신들이 직접 심은 포도의 시큼한 맛에는 익숙해졌지만, 호전적인 픽트족은 로마 제국 최북단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병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22년에 변방 시찰을 한 뒤, 픽트족의 습격에서 병사와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튼튼한 방벽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1세기 중반에 스코틀랜드인이 침공하자 이그리콜라 장군은 타인 강과 솔웨이 만 사이에 요새를 구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변경을 지키는 강력한 수단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의 지휘 아래, 동해안의 뉴캐슬에서 서해안의 보네스까지 약 120km에 이르는 흙보루를 쌓았다. 이는 앞뒤에 흙과 토탄으로 제방을 쌓고, 그 사이에 밑바닥이 평평한 넓은 도랑을 만들어 놓았다.
동쪽 끝 구간을 제외한 흙보루의 대부분은 2년 만에 완성되었고, 석재는 일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80개나 되는 성문을 갖추고 있던 흙보루는 가공석으로 대체되었다. 가공석을 2줄로 나란히 쌓아올린 다음, 그 사이에 돌과 자갈을 섞은 혼합물을 잔뜩 집어넣었던 것이다.
방벽의 변천
이 장대한 방벽이 완성되자 방벽에 있던 17개 요새에서 약 1만 명의 군사들이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영국에 있던 정예부대는 비상사태가 아니면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예비 병사였다.
이 방벽과 나란히 뻗어 있는 군용도로 주변에는 가게, 여인숙, 성당 등을 갖춘 거리가 많이 들어섰다. 또한 1로얄마일(약 1482m)마다 2개소의 작은 망루를 설치하고, 망루마다 병사를 각각 20명씩 배치했다.
138~139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새로운 북방 정벌을 위한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레기온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병사들은 방벽까지 후퇴해 그 곳에서 스코틀랜드인에게 3차례나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197년에 픽트족의 공세가 있었지만, 3세기부터는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100년 뒤인 296년에 픽트족이 다시 쳐들어왔다. 367년부터 다음해까지 스코틀랜드인이 계속 방벽을 파괴해 368년에 마지막으로 방벽을 보수했다. 383년에 로마 수비대는 영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로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것은 적군이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이 방벽은 채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 때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 기능을 유지했다. 스코틀랜드는 18세기 초까지 잉글랜드에 통합되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현존하는 로마 시대의 중요한 유적
1688년에 일어난 명예 혁명으로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제임스 2세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자코바이트(제임스 2세의 지지파)는 1715년에 반란을 일으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잉글랜드의 조지 웨이드 장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려고 방벽의 석재를 뜯어내 군용도로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벽은 오늘날까지 방어와 주거 기능을 갖춘 고대 건축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페나인 산맥의 구릉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가는 하우스스테즈 부근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로마 제국의 방벽 가운데에서 건축 기술의 완벽성뿐만 아니라 국경 지대의 취락 배치 상태를 가장 잘 보여 준다.
현재까지 방벽 둘레에서 발굴 작업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기병 수비대의 기지였던 체스터에서는 병영 등의 유적과 로마 목욕탕을 발견했다. 오늘날 세례반으로 사용하고 있는 로마식 원주와 제단도 촐러턴 성당의 호화로움을 더해준다. 캐로버러 성채에는 브로콜리티아 기병 수비대의 기지 흔적이 남아 있는데, 특히 이 곳에서 발견된 미트라 신에게 바친 관은 레기온 병사들이 지켜 왔던 소아시아의 신앙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사우스실즈에서는 아베아 요새가 보인다. 고대사 박물관에는 로마의 칼 같은 귀중한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체스터홀름 지역에 있는 빈돌랜다 요새에는 본영 일부와 로마 이정표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옛 본영의 배치를 보면,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시대에 병사들이 가족과 함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보행자 전용 도로
이민족에게 난공불락의 방벽으로 군림했던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오늘날 관광 자원이 되었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45km에 걸친 ‘국민적 순례길’에서 망루 25개소, 요새 19개소, 작은 요새 3개소를 둘러본다면 그 엄청난 규모에 놀랄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보행자 전용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방벽에 대해 보호조치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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