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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2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1 -19,42)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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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전한다. 그 종은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간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주님께서는 그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놓았다(제1독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눈물로 탄원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시며 숨을 거두신다. 이로써 예수님의 긴 수난의 고통도 끝이 난다. 온 생애를 걸쳐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완성하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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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그 모습 보입니다. /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처절히 찢긴 몸 / 헐떡이는 목숨 하나 걸려 있습니다. / 허허한 하늘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 들립니다. /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고통의 신음 소리 / 핏빛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바람 일고 / 그 목소리 흩어져 세상을 떠돌더니 / 2천년 역사를 넘어 여기, / 침묵 속에 잠깁니다.
세상의 실패는 골고타 언덕 조롱과 비웃음이 되고 / 세상의 절망은 십자가에 못 박혀 침묵이 되고 / 세상의 고통은 찢기운 살, 흐르는 피가 되더니 / 비로소 세상은 숨을 쉽니다.
골고타 언덕 그 목소리 / 생명을 건네 주는 펠리칸의 신음이며 / 피의 잔을 건네 주는 손길이기에 / 생명은 고통의 심연에서 차오르고 / 세상은 그 살과 피를 먹고 부활합니다. / 가슴 벅찬 사랑으로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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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장엄한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무죄한 분이 억울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을 가시는 장면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분께서 맞이하시는 죽음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류의 죄 때문에 그 길을 가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은 어떠합니까?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여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미 보았던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는 기분으로 수난 복음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인류를 위하여 죽는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다면 나에게 가까운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던 예수님께서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십니다. 베로니카와 예루살렘 부인들도 만나십니다. 당신을 비웃던 청중들과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병사들도 만나십니다. 그분만이 그들을 만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우리 역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님을 만납니다.
“다 이루어졌다.
-양승국신부-
<종결자 중의 종결자, 죽음>
아직 떠나기엔 이른 선배 사제가 아쉬워하며 세상을 떴습니다. 아직 노모도 살아계시는데, 아직 하고 싶은 일이 그리 많았는데, 아직 작별하기에 아쉬운 인연들이 저리도 많은데...
보는 사람들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예술적인 ‘끼’가 많았는데, 시며, 그림이며, 다양한 아이디어며...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하고 싶은 미술공부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행복해했었는데, 사람을 그리 좋아해 늘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행복해보였는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었는데, 예술과 인생과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얼마나 많았는데...
마치 꽃잎 하나 떨어지듯 너무나 쉽게, 너무도 빨리 떠나버려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이럴 때 제일 힘든 게 밥숟가락 뜨는 일이더군요. 밥알들이 마치 모래알 같습니다.
참으로 아쉽고, 때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죽음이 분명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길을 걸어갔고, 갖은 희로애락을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더 이상 그란 존재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더 이상 그 다정한 눈빛, 그 환한 미소, 그 타오르던 열정을 이 세상 그 어디서도 볼수 없다는 것, 참으로 너무나 큰 상실이며 슬픔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음이야말로 해결사중의 해결사이더군요. 요즘 즐겨 쓰는 단어 ‘종결자’가 분명합니다.
선배 사제는 죽음을 통해 그 끔찍하던 통증에서 완전한 벗어났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로병사의 사슬을 끊고 한 인생을 종결지었습니다. 이제 그는 편안한 얼굴로 우리 앞에 누워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자비의 품에 편안히 안겨있습니다.
오늘 성 금요일,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혹독한, 그래서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께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었기에,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큰 의미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고통을 통해 우리의 작은 고통을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가볍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끔찍한 죽음을 통해 우리 죽음의 고통을 경감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 죽음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그 죽음을 쳐부수셨습니다.
영광스런 당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아니요,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이제 어둠의 땅에서 광명의 땅으로, 눈물과 슬픔의 땅에서 하느님 아버지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우리 안에 생생히 살아계시듯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랑했던 형제자매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영광된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랑의 쓰나미
-정영숙 수녀-
오늘 복음 앞에서 몇 해 전 스리랑카,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등 남아시아를
휩쓸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쓰나미를 떠올리게 됩니다.
죽음의 쓰나미와 사랑의 쓰나미! 이천 년 전 나자렛이라는 이름 없는 마을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쓰나미처럼 온 세상을 덮을 줄 누가
예상했을까요? 군인 하나가 예수님 옆구리에 창을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내려 온 이스라엘을 덮습니다. 곧 이어 유럽, 남미, 아시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덮치더니 오늘까지도 우리 존재 깊은 곳을 덮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야말로 더 이상 피가 통하지 않는 굳은 마음속까지 흘러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의 샘입니다. 거짓과 불의의 먼지로 가득한 마음을
씻어 내리는 생명의 물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목마르다.” 사랑과
정의가 목마른 세상입니다. 땅, 강, 피조물을 함부로 하는 이들의 오만이,
경쟁의식과 위선에 찬 말과 행동이 주님 옆구리를 찔러댑니다. 자기과시 욕구에 사로잡힌 이들이 돈으로 주님 옆구리를 찌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당신 사랑의 피와 물을 쏟습니다. 굳어지고 굳어진 마음들 위로 생명수를 쏟으시어 거듭 태어나라 하십니다. 마음핏줄 타고 흘러 막힌 곳 뚫어 생명을 귀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되라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쓰나미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굳어진 머리와 가슴속으로 흘러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나’ 요
- 여진천-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 공동체는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모셔 왔습니다. 역관 출신 순교자 최인길(마티아) 은 서울 북악산 아래 계동에 집을 마련한 후 신부님을 모시고 우리말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입국 소식이 알려지자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강완숙 (골롬바) 의 집으로 신부님을 피신시켰습니다. 그는 신부님이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집에 남아 머리를 잘라 모양을 바꾼 후 중국인 행세를 했습니다.
최인길은 신부님을 찾는 포졸들한테, ‘찾는 이가 바로 나요.’ 라고 침착하게 대답하고 끌려갔습니다. 중국어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위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부님과 그의 턱수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포도대장은 신부님의 입국을 앞장서서 도와준 윤유일 (바오로) 과 지황 (사바) 도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을 증거할 뿐, 다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참 천주님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고 했습니다. 그들은 1795년 5월 12일 밤에 포도청에서 참수되어 강에 버려졌습니다.
그는 목자인 신부님을 양떼들한테 남겨두기 위해 목자 대신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처럼 그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예수님의 영예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자와 예수님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금요일이었으면 합니다.
물음표를 달지 마십시오
- 김종성 신부-
작년 전국 성지담당 사제들 모임이 솔뫼에서 있었다. 솔뫼 교육관 2층,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쪽 눈높이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어놓으신 곳에 물음표를 달지 마십시오.” 너무 단도직입으로 된 문구라 반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거다 싶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 모양이지만, 우리의 십자가는 ‘물음표’ 모양이 아닐까 싶다. 왜?? 왜 나에게?? 왜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갖가지 의문부호를 안고 가는 게 십자가의 길이라면 과연 예수님은 십자가 길 위에서 무슨 물음표를 갖고 계셨을까??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포함한 그분의 고통 중 큰 부분은 아마도 유다가 아니었을까 싶다.(복음사가들의 말대로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고도 제자로 뽑으셨다면 너무 슬픈 일이고, 예수님의 직무유기 아닐까??) 그분의 의도도 모르겠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이해 못할 상황 전체가 십자가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성지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에 물음표를 커다랗게 만들어 붙였다. 적어도 우리가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예수님 십자가와의 교집합이 물음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물음표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방법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나서든지, 아니면 내 이해의 폭을 넓히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것이 내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고 맡겨두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5살 정도 된 딸이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아빠에게 내밀며 다가갑니다. 그러자 아빠는 컵 안을 보고는 “우유가 아직 남았잖아. 다 마시고 오면 더 줄게.”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제 딸은 엄마에게 다가갑니다. 엄마는 “컵 바꿔 달라고?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냥 마셔.”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딸은 자기 오빠에게 다가갑니다. 그러자 오빠는 자신이 들고 있던 물건을 동생의 컵에 부딪치면서 “건배!”를 외치고 함께 마시는 시늉을 합니다. 그제야 5살 꼬마는 환하게 웃습니다.
이 아이의 속마음을 오빠만 제대로 읽은 것이지요. 즉, 이 아이는 우유가 든 컵을 부딪치며 ‘건배’하기를 원했지만 엄마 아빠는 그렇게 해주지 않지요. 단지 오빠만이 그 마음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빠만이 동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동생에 대한 이해와 눈높이를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이해와 상대방에 대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기만을 원하고, 또한 내가 눈높이를 맞추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의 눈높이에만 맞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소외되고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주님이 말씀하셨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 점점 사라지기만 합니다.
이렇게 나에게만 기준을 맞추다보니 주님께 대한 눈높이도 맞추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지요. 그래서 어제는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닦아주시는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더 큰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당신 사랑에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나의 생각과 판단만을 내세워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고만 있습니다.
솔직히 주님의 사랑은 철저히 낮아지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낮아지는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 더 낮아지는 사랑을 직접 실천하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철저히 낮아지는 사랑만이 주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우리 사랑의 눈높이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닌 주님께 우리의 눈높이를 맞출 때,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역시 세상에 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형 유혹
-이영훈 신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내가 박해시대 때 태어났다면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고문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같은 온갖 상상을
해봅니다. 그리고 즉시 ‘지금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박해시대는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도 신앙 환경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발전하는 만큼 악마의 유혹 방식도 발전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은 지뢰밭과 같습니다. 21세기형 악마의 유혹 방식은
바로 ‘나태함’입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이것만 끝내고 하자.
그래, 도와줘야지. 그런데 아직 너는 그럴 처지가 아니잖아. 좀 나아지면
그때 해.’ 그리고 마지막 비장의 카드, ‘사랑 없는 사랑’(1코린 13장)을
이용합니다. ‘많은 돈을 기부한 너는 정말 천사야. 그런데 인생 낙오자인
저 거지들은 왜 안 사라져.’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유혹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능화된 유혹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지금 유혹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정말 착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다 이루어졌다.” -양승국신부- <그 길의 끝에서> 성목요일 만찬미사 세족례 시간, 발 씻김 예식 때였습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으며 새삼스럽게 그 옛날 예수님의 겸손하신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주인이시면서도 종의 발 아래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면서도 말단 병사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겸손하신 얼굴... 허리를 굽히고,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붓고, 내 발을 씻듯이 뽀득뽀득 씻기며,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젖은 발을 닦아주며, 그 옛날 자상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며,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며, 죽은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역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가 우리 인간의 무지와 죄와 배은망덕이 맞닿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결국 골고타 언덕은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와 나약함, 악행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승리와 영광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한 가지 명백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어두컴컴한 지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겸손이야말로 모든 영적생활의 핵심임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이끕니다. 겸손이 머무는 아래쪽, 겸손이 위치한 밑바닥의 특징 한 가지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집이 겸손의 바닥 위에 기초를 놓을 때 우리네 삶은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평화롭고 잔잔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 금요일은 예수님 생애 가장 어두운 날입니다. 오늘 성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맞이한 계절 중 가장 혹독한 계절입니다. 오늘 성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지내셨던 날 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그 고통, 그 혹독한 날씨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광의 왕좌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 꼭 필요한 요소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견뎌내십니다. 침묵 중에 다 참아내십니다. 끝까지 인내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대체로 어둠에는 관심 없고 오직 밝은 빛만을 원합니다. 엄동설한의 겨울을 견뎌내는 고통은 뒷전이고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의 영광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 들숨과 날숨이 있듯이 빛과 어둠, 고통과 영광은 함께 공존할 때 건강합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려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 하고 계십니까? 당시 십자가 주변에 서있던 많은 사람들, 이제 예수님 인생은 끝장이로구나, 그의 길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이쯤해서 그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말하는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방이 막혔다고,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좌절하고 원망하고 때로 극단적 선택도 서슴지 않습니다. 정말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반드시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며 주저앉아 계시는 분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서 새로운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거룩한 구원의 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전삼용신부-
어떤 분들은 남들에게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죄책감도 못 느끼고 그들에게 당하는 사람들보다 더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남들에게 많은 해악을 주고도 남보란 듯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가서 충전기를 연결하고 잔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을 알람으로 사용하는데 그 다음날은 알람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늦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배터리가 완전히 나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충전기가 전원 코드에서 빠져있는 것을 모르고 그냥 꽂고 잤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론 아무 이상이 없게 보일지라도 악인들은 하느님과 실제적으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곧 지옥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은 못 보는 고통이고 천국은 하느님을 직접 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그래서,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의인들이 누리는 단 한 시간의 평화도 평생 누려볼 수 없습니다.
목요일 밤부터 부활 전까지 예수님은 아버지와 단절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때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시고 실제로 죽음 이후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부활을 기다리셨습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에 의하면 이 때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이들의 세계에 계시고 두 분을 이어주어야 할 사랑의 성령님은 두 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눈물 흘리고 계시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사랑이 되는 분들이신데 아버지는 아들을 죄인처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이상 사랑할 대상이 아닌 벌을 주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대신 아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이 깨어져 서로 멀리 떨어지는 고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상상해볼 뿐입니다. 이별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겟세마니에서 온 땀구멍으로 피가 역류하여 흘러야 했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옥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시고 우리의 죗값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은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아야 참으로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보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처럼 생각 할 수 있겠으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이별하여 있는 고통을 계속 겪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니 당신을 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그 때까지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압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배신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홀로 남은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죄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하여 사랑하는 인간이 당신을 등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온전한 사랑을 잘 모르기에 덜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잃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통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한 번 이상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 고통을 당신 아들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만 괴로웠을까요? 아버지도 아들과 이별함으로써 같은 고통을 당하십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하느님께 드렸는지 인간이 좀 느끼고 죄로부터 돌아와 다시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낮엔 미사가 거행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로 인한 하느님과의 단절, 즉 지옥의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느님이 없는 침묵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삼일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감사하며, 또한 그 죄의 실상을 체험하고 다시 겸손한 모습으로 부활 할 것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하여...
-김기현신부-
신앙생활을 야구에 빗대어 잘 표현한 글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운동경기 중에서 가장 성경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경기를 들라면 나는 야구를 들겠다. 야구경기의 모든 것은 감독의 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1루에 나가 있는 선수는 오직 감독의 얼굴만 본다. 설령 아내나 자식, 또는 아는 사람이 경기장에 왔다고 해도 그들을 쳐다보면 안 된다. 감독의 얼굴만 보고 있다가, 감독이 2루 도루 사인을 내면,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야 한다. 그래서 야구 경기의 중요한 요소가 ‘순종’ 이다. 나는 항상 야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신자들이 야구선수만큼만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엄청난 능력이 나타나겠구나...’
또 하나 야구에는 ‘희생’ 이라는 개념이 있다. 축구에서는 다른 선수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어시스트라고 한다. 축구에서는 어시스트 개념이 있지만, 야구에서는 어시스트의 개념을 뛰어넘는 ‘희생’ 이라는 개념이 있다. 구체적으로 야구에는 희생번트라는 게 있다. 다른 선수를 진루시키기 위해서 기꺼이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고 너는 잘되라는 것이 희생번트의 내용이다. 또 희생 플라이라는 것도 있다. 나는 죽고 너는 사는 것이다. 자기가 죽음으로서 다른 선수가 점수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를 살리는 것이다.】(‘내게 주신 잔’이라는글 참조)
하느님이 감독이고 예수님이 선수라고 생각 해 본다면, 예수님도 기도 안에서 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셨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은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거리가 멀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하느님의 사인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내 생각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사인을 무시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라.’ 는 하느님의 말씀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권위 없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또 단체를 살리기 위해서 나의 시간을 희생하지 못하고, 나의 에너지를 희생하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을 희생하지 못합니다. 희생이 없는 그 단체에는 분열이 있고, 싸움이 있습니다. 단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고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성인 레지오 형제님들과 술자리를 하다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전에는 새벽에도 장례 터지면 연도하러 가고, 본당 일 있으면 시간 다 비워놓고 봉사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신자들이 자기 일만 생각하는 것 같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는 순종과 희생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순종과 희생이 있어야 단체가 살아나고 구역이 살아나고 본당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초창기 신앙이 전해져 올 때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까? 또 지금처럼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습니까?
오늘 하루, 나의 모습을 반성해 봅시다. 우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순종하고 희생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공동체야 어찌 되던지 간에 내 멋대로 나만 살자고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양승국신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아이들과 함께 한일전 축구시합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아이가 살며시 제 옆에 다가와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넵니다. "신부님, 언제 다른 데로 가실거죠?" "왜, 그걸 묻니? 내가 빨리 다른 데로 갔으면 좋겠니?" "아-뇨, 가능하면 여기 오래 계셨으면 해서요." "그래, 알았다. 내 죽어도 여기를 안 떠날거다. 나중에 네가 어른 되면 와이프랑 아이들이랑 손잡고 꼭 찾아와라." "알았어요, 절대로 다른 데로 가지 마세요." 부모나 교육자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우나 고우나 오래오래 아이들과 함께 같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는 늘 자녀들 곁에 함께 현존합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들이 아플 때 곁에 앉아 걱정스런 눈길로 아이들을 지켜봅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고통을 겪을 때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는 아이들이 힘겨울 때 힘이 되어 줍니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는 아이들이 방황할 때 옆에서 아이들을 꼭 붙들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찢어지는 가슴을 겨우 부여안은 성모님께서 쓰러질듯한 자세로 서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며 천천히 죽어 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바라보십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동참하십니다. 병으로 죽어 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보통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차라리 저 녀석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높이높이 매달린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을 예수님 못지 않게 견뎌내신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당할 때 함께 고통 당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도 함께 죽어 가는 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음 -이정민 신부-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 부활이라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신비를 기념하는
자기 비움 -진병섭 신부- 십자가의 길을 통해, 그리고 수난 복음을 통해 비춰진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앙 역사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대속죄의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수난 복음 안에서 정확하게 묘사되고 비춰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수난받는 모습이며,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자기 낮춤과 자기 비움의 모습입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전삼용신부- 초대교회 때는 세례를 성 토요일 부활 전야미사 때 하였습니다. 사순절동안 교리를 배우고 전야미사 때 세례를 받고 기존의 신자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눈 다음에 성찬의 전례가 거행되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이 세례를 거행하는 이유는 바로 토요일 밤의 예수님의 처지가 세례를 받기 전 죄의 상태에 있는 예비자들과 상황이 같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듯 세례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대로 계단을 내려 들어가 물에 세 번 침수했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삼 일간 땅에 묻혀 계셨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밤은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시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에 의하면 이 때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이들의 세계에 계시고 두 분을 이어주어야 할 사랑의 성령님은 두 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눈물 흘리고 계시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사랑이 되시는 분이신데 아버지는 아들을 죄인처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이상 사랑할 대상이 아닌 벌을 주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대신 아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이 깨어져 서로 멀리 떨어지는 고통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상상해볼 뿐입니다. 이별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겟세마니에서 온 땀구멍으로 피가 역류하여 흘러야 했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옥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공간입니다. 사랑하는 분과, 아니 사랑이신 분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고 그 분을 잃는 것이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삼일동안 ‘지옥’에 내려가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은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아야 참으로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보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처럼 생각 할 수 있겠으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이별하여 있는 고통을 계속 겪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니 당신을 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압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배신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홀로 남은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죄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하여 사랑하는 인간이 당신을 등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온전한 사랑을 잘 모르기에 덜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잃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통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한 번 이상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 고통을 당신 아들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만 괴로웠을까요? 아버지도 아들과 이별함으로써 같은 고통을 당하십니다. 아버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신께 드렸는지 인간이 좀 느끼고 죄로부터 돌아와 다시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낮엔 미사가 거행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로 인한 하느님과의 단절, 즉 지옥의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느님이 없는 침묵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양승국신부- <누군가의 더 큰 고통> 끔찍한 고통, 그 한 가운데를 걸어가고 계시는 분들을 바라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던지 신음까지 터져 나옵니다. 슬픔이 얼마나 깊던지 식음까지 잊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무거운 십자가가 다가와 도무지 떠나갈 줄을 모릅니다. 이웃들이 던지는 위로조차 이제는 지겹습니다. 이런 분들 앞에서 “인내는 모든 것입니다. 고통은 은총’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 구원이 옵니다.”라고 말씀드려보지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분들의 반박에 할 말을 잃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의미가있겠습니까? 그저 혹독할 뿐, 그저 참혹할 뿐, 그저 죽고만 싶을 뿐...”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작은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과 연관시키는 일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합치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 이 깊은 슬픔, 이 아린 상처가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 누군가가 겪고 있는 더 큰 고통, 더 깊은 슬픔, 더 아린 상처를 바라볼 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가장 극단에 서 계신 분, 이 세상 슬픔 중에 가장 깊은 슬픔을 체험하신 분, 가장 큰 상처를 입으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오늘 혹독한 수난을 온 몸으로 당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한계를 지닌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고통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인생의 동반자가 십자가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한 노력은 우리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입니다. 고통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 금요일,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당신 몸에 다 지시고 높이 높이 매달리시는 날입니다. 결국 인류 구원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으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신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천국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곳은 겟세마니 동산입니다.”(반 고호) 천국은 내일, 모레, 10년 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의 수난기 -김찬선신부-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오늘 횡재했구나.’
그는 물속에 들어가 진흙을 더듬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시도를 했지요.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몇 차례 진흙 속을 더듬다보니 흙탕물이 되어 물속에서 반짝이던 순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 밖으로 나와 잠깐 쉬면서 물이 맑아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물이 맑아지면서 다시 금빛이 보였습니다. 바로 잽싸게 물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는 금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앞을 지나가던 백발노인이 물에 흠뻑 젖어 있는 이 사람을 보고는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런 모습을 앉아 있는 것이지요?”
그는 대답했지요.
“물속에 순금이 있기에 물에 들어가 진흙을 헤치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금은 얻지 못하고 이처럼 옷만 버리고 말았습니다.”
백발노인은 물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분명히 물속에 금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백발노인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연못 바로 위까지 뻗쳐있는 나뭇가지를 만져봅니다. 그리고 그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던 금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금은 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서 연못의 물에 비치고 있었던 것인데, 이 사람은 물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이 모습이 바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진리의 그림자만을 쫓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꼬집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돈, 명예, 지위 등등……. 이렇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이것만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모습은 앞선 이야기에서처럼 물 위에 비친 금을 물속에서 찾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생만 할 뿐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진리를 찾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지금까지 보여주신 영광스럽고 놀라운 힘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그 고통을 모두 받아내십니다. 이 모든 고통의 끝에 허탈한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지만,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지요. 바로 부활이라는 커다란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요? 이 세상의 쾌락과 물질적인 것에서 찾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만을 가져다주는 것 같은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들은 참된 진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파스카의 성삼일 중에서도 오늘 성금요일은 교회가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해
침묵하고 단식하며 지내는 날입니다. 마치 무덤 속의 고요함 같은 분위기를 가진 날입니다.
우리나라 풍습처럼 흙에 묻는 매장이 아니라 바위를 파서 공간을
만들고 시신을 모신 후 그 입구를 돌로 막는 그런 무덤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주님은 이제 무덤 한가운데 누워 계십니다.
침묵과 단식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무덤에
묻혔음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묻힌 그 무덤은
닫혀서 영원히 적막에 묻혀버릴 공간이 아닙니다. 그 고요함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늘은 좀 더
무덤에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더 가까워오듯
무덤의 어두움이 깊을수록 돌문을 열고 스며드는 빛이 더 밝게 비칠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하는 은혜롭고 거룩한 하루를 보내시길 빕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자기 비움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인간 세상에 오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첫 번째 자기 비움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비유하자면 자기 비움, 자기 낮춤을 통해 주인이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죄 없으신 분이 수난과 고통을 받고 죄 많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모습,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자기 비움, 자기 낮춤인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에게 희망이며 모범입니다. 우리에게 닥쳐 온 고통의 순간과 어려움은 어쩌면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어 주는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십자가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당장의 고통이 힘들고 지칠지라도 부활을 꿈꾸며 나에게 닥쳐 온 십자가를 기꺼이 지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되새기며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하고 말하였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요한19,23-24)
당신의 죽음에 대해 참으로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고통을 같이 아파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베드로처럼 배반도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랑도 있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같이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도망쳐버리는 사랑도 있습니다.
당신을 적대시하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죽음에 적극 가담하는 증오가 있는가 하면,
기대에 어긋난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분풀이하는
소극적인 미움도 있습니다.
군사들은 이도 저도 아닌 부류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지요.
처참한 죽음을 앞에 두고 군사들은 당신 옷 차지에 여념이 없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이들에게는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존재는 사랑으로도 남고, 미움으로도 남는 법인데,
이들에게는 당신이 아무 것으로도 남지 않습니다.
당신은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으로는 죽으신 것이어도
어떤 식으로든 살아 계시지만
당신의 죽으심에 전혀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정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군사가 다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백인대장과 몇몇 군사들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모를 일입니다.
고백이 믿음으로까지 이어졌는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19,25-27)
그때 어쩌자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그 참혹한 현장에까지 따라 오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이제 나이 먹어 사랑의 신비를 조금 이해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참혹하다고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더욱이 어미의 사랑이 아니지요.
어미는 그 어떤 처참함도 봐야만 하고,
설사 구더기가 파먹는 아들의 시체라도 껴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위한답시고 어미를 따라오지 못하게 한다면
사실은 위하는 것이 아니라 불효이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극구 말려도 거기까지 따라오셨고,
저는 너무 끔찍해서 눈을 돌린 것까지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뇌리에 새기고 가슴에 새기기 위해
놓치지 않고 다 보셨습니다.
그 어머니를 보시는 당신의 마음은 어떠셨습니까?
고통이 위안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고통에 더 큰 고통이 되셨습니까?
둘 다 받으셨겠지요.
우리는 사랑 때문에 위안을 받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위안을 주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안과 고통을 주고받는 그 사랑의 관계에
당신은 저를 포함시키셨습니다.
당신 어머니를 저의 어머니가 되게 하심으로
저를 당신과 동일시하시며 어머니를 저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누구를 대신한다는 것은 그를 입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당신을 대신한 그때 이후 저는 제가 아니라
당신을 옷 입고 사는 당신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당신입니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19,28-30)
저는 지금도 당신의 말씀,
“목마르다”는 당신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뜻이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절규였습니까, 호소였습니까?
그때 당신은 정말 목마르셨습니까?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가 목이 마르셨습니까?
아니면 사랑에 목마르셨습니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외치신 대로 당신은 정녕 그때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당신은 인간적인 절대 고독을 절규하신 것입니까?
그렇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당신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아주 철저히 저희 인간과 같아지신 표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목마르다는 당신의 말씀은
당신 고통의 절규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저희가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주었을 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하시었으니
당신이 목마르다 하심은 당신의 목이 마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 지체들인 저희의 목마름을 대신 절규하시고,
그들에 대한 저희의 이웃 사랑을 호소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규인지, 호소인지
아무튼 당신의 간절함에 그렇게 야박하던 사람들도 마음이 동했는지,
아니면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자선 베풀겠다는 심사에서인지
신 포도주로 당신 입술을 적셔 드리고,
당신은 그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마지막 말을 토해내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주님, 저는 이 말씀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제가 직접 들은 말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 그 뜻이 너무 깊이 저에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결코 “다 끝났다.”고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었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겸손하신 당신,
끝까지 가난하신 당신은 분명 “다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일이 다 끝났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신 대로
지금까지 당신이 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것이며,
당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의 일입니다. 당시 레이건은 콜린 파월을 비롯한 몇몇 장관들과 함께 새로운 정책을 계획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새 정책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던 파월이 대통령을 찾아가 강하게 설득했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몇 가지 큰 허점이 보였기에 레이건은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의 회의로 결국 레이건은 파월을 믿고 새 정책을 추진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결과는 레이건의 예상대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지요. 언론은 일제히 백악관의 무능을 탓했고, 결국 레이건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정책 실패에 관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기자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번 새 정책은 대통령께서 직접 제안하신 것입니까?”
이에 레이건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모든 게 나의 책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파월의 운에는 순간 눈물이 고였지요. 그리고 기자회견 후 한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요.”
사실 레이건 대통령은 그 비난의 화살을 맞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비난의 화살을 콜린 파월에게 모두 돌려도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비난의 화살 속에서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줍니다. 이로써 그는 파월뿐만 아닌 그를 믿고 따르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신뢰’를 새겨 주지요.
로널드 레이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예수님이 떠올려집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내 자신은 얼마나 간직하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 아무런 죄 없이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억울하다, 두고 보자.’ 등등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품는 말씀들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그 큰 사랑으로 다 받아주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이런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신 예수님께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배은망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파월처럼 “저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요.”라고 말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주님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니까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결심을 해보세요.
“다 이루어졌다.”
성 금요일에...
-오상선신부-
무슨 말이 더 필요하리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말없이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런 원망이 없으셨습니다.
그냥 사랑하셨습니다.
나도 그냥 사랑하라고...
나도 그냥 침묵하라고...
나도 아무런 원망말으라고...
그냥 죽으라 하십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나의 사랑과
나의 침묵과
나의 고통과
나의 원망과
나의 모든 것을...
그럼 다 된 것이 아닙니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무엇을 바라십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저 고통을 바라보십시오.
그저 아멘 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조욱현 신부 -
인간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느님과 화해할 수가,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안고 죄 중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한 순명과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희생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이시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30년이나 지내셨으며 이제 순명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실 시간에 가까이 이르신다. 이 때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게쎄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밤이 늦도록 땅에 엎드려 당신이 당하실 수치스러운 고통과 모욕,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신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14,36). 그분은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혀 갖은 조롱과 매를 맞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자인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는 말로 배반을 당하셨고, 온 몸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넘어졌고 결국 갈바리아 언덕에 끌려가 온 몸이 벌거숭이가 되어 굵은 쇠못으로 네 수족이 못 박혀 십자가 위 허공에 달려 강도들 사이에 죽으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자녀들을 낳아 주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마리아는 교회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시고 이제는 목마르다! (19,40)고 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루가23,46). 즉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영이 당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인간들 위에 부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제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 위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파하고, 그 구원을 완성에로 인도하면서, 항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도기를 기도하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한 군사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인류 구원의 속죄물로 희생되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드리신 순명이오,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여야 하겠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묵상하도록 하자.
외사랑의 행복
-조성풍 신부-
“다 이루어졌다”라는 마지막 말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시는 우리의 주님.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시는 자상한 아들이십니다. 이제 그 자상한 아들, 훌륭한 스승은 우리의 곁을
떠나가십니다. 유다 대사제와 그 일행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부추긴 것은 놀라운
일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길까지도 함께할 것 같았던 제자 베드로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라는 사람들의 추궁에, “나는 아니오”라고 세 차례나
부인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서글프게 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걸어오신
사랑의 삶이 외면당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상대방이 알고서도 받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사랑을 ‘외사랑’이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 아픈 ‘외사랑’이 되어감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이
‘외사랑’에 머물지라도, 후회 없이 기쁨으로 아버지 뜻을 따르는 가장 행복한
길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행복의 길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
-이동훈 신부-
본당이든 공동체든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남보다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 또는 다른 부서보다 일이 많지만 휴식 시간도 아껴가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모두 존경과 격려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뒤에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뒤에서 하는 험담이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언제나 발 없는 말은 천리를 돌아 당사자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난데없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 좋은 일 해보고자 마음먹고 열심히 했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험담뿐이라고 한다면 좋은 일을 계속해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은 두 명의 죄수와 함께 죽음 앞에 서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 때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에 따라 예수를 풀어주면 어떻겠느냐고 군중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군중은 강도인 바라빠를 살려주었다. 예수님은 과연 강도보다 더 큰 죄를 지었는가? 예수님이 누구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히려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살리는 큰 사랑을 베풀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선행에 대한 대가 없이 머리 누일 곳조차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빌라도의 판단처럼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을 수도 있다.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험담은 상대방과 공동체에 큰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 시기와 질투, 잘못된 군중 심리에 이끌려 선량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군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로 인해 오늘도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은 바라빠도, 다른 강도도, 예수님도 아니고 바로 나의 이기심과 편견과 죄악임을 깨닫는 것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임을 깨달아야겠다.
십자가, 피할 수 없는 운명
-김찬선신부-
몇 년 전
저의 선배 신부님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유명한 조각가에게 부탁하여 십자가상을 만들었는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계시지 않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밑에서 쉬고 계시는 그런 십자가였습니다.
신부님과 작가의 의도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쉬시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런 십자가는 있을 수 없다고 교구장께 고발하였고
교구장은 그 십자가를 바꾸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매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서
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셔야 한다고 강요하는 한
이제 예수님을 만나려면 십자가도 같이 만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껴안으려면 십자가도 같이 껴안아야 합니다.
- 장재명 신부 -
오늘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죽음을 당하신 ‘주님 수난 성 금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살인의 도구였지만, 예수님께서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이 어떻게 고통을 겪고 죽으실 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에, 그 처참한 고통과 모욕과 소외와 버려짐과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고통 받고 죽으셔야만 다시 살아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면서 그 수난의 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드님을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님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녀를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 고통이 정말 얼마나 클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통과 죽음의 길을 걷는 아들 예수님도 정말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은 정말 어떻겠습니까! 한없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말로도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과 똑같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큰 사랑을, 이제 직접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 큰 사랑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시는데,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십자가들을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십자가들을 피하려 하고, 거부하고, 불평 불만을 터뜨릴 때, 결국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게 됩니다. 또 다시 그분 홀로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들이 나를 무겁게 누를 때마다, 조용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저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으시고, 결국 그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이 나의 고통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계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한 번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러 가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도 스승님의 뒤를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다 이루어졌다
-김상현신부-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슬픕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올라가셔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양 손에 양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려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받고 죽으셔야 합니까? 참으로 슬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슬퍼만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해 수많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께서 왜 그렇게 죽으셔야 하는지를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지 않고는 새로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옆구리의 피와 물이 세례성사가 되었으며 당신 몸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참 사랑은 내어줌입니다.
이 내어줌은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 내어줌은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내어주는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침이 됩니다. 자기 것을 챙기기 바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것을 챙기기에 급급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이 주님으로부터 들을 때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과거 로마 시대에 십자가가 사형수를 처형하는 도구였지만 예수님에 의해 거룩해진 것처럼,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이웃이 나에게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게 됩니다. 그것은 '타'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사랑은 항상 살아있게 됩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것을 남에게 내어주어야지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점점 사랑이 메말라가고 이기적인 욕심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점점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나'라는 神에 집착하고 있는 이 세상을 씻어주는 예수님의 내어줌 사랑은 이 봄날을 더욱 포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반복하지 말기
-김유철 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십니다. 이어서 한나스와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고, 믿었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하며, 결국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으십니다.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병사들은 사망 유무를 알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고, 예수님은 그날 저녁 돌무덤에 묻히십니다. 이상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일어난 예수라는 한 청년의 행적입니다. 구원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온 사실입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오시는가?
이사야 예언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던가?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이사 53,2-9 참조).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셨습니다.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찾는가?
-이홍일 신부-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찾아서 돌아다닌다. 그것이 물질이든 명예든 무엇인가 충족되기 위해 노력한다. 내 안에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가끔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나도 사람에게 집착할 때가 있다. 비어 있는 공간, 여유 있는 공간을 견디기 어려울 때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 같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리가 내 안에 있어야 되겠지만 살아가면서 그렇게 여유 있는 마음을 갖기가 쉽지만은 않다. 어느 순간 문득 비어 있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요즘 자살이 증가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원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어 있는 내면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물으신다. “누구를 찾느냐?” 혹시 우리는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앙인으로서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또 비어 있는 자리에 주님이 오실 수 있게 준비를 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있는 빈자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내 존재의 한 부분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목마르다.”
-김훈일 신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입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네 번째 말씀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입니다.
다섯 번째 말씀은
“목마르다”(요한 19,28)입니다.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입니다.
일곱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중에서 ‘목마르다’고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목마름은 한계이며 또한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한계를 나타내어
유다인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샘솟는 물을 주신 주님께서 왜 목마르십니까? 그 목마름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내놓으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셨지만 제자들은
도망갔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이제 우리가 남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 드려야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문호영 신부-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의 둘째 날,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예식을 통해 우리를 위해 고통받고 죽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바로 그 고통과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무한한 은총과 영원한 구원에 대해 감격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하실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체험한 사랑은 모두가 유한한 사랑인 데 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무한한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낯설고 어설프고 의아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서툰 것입니다.
또한 설령 그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고 받아들이려 한다 해도 그동안 인간이 체험해 왔던 그 유한한 사랑의 잣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드러나는 그 무한한 사랑!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깨치게 된다면 인간 삶에는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참으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바라보고 자꾸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우리의 기억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그 십자가 죽음 속에 있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 그 사랑의 힘을 보고 느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의 제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죽음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 당신의 그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은총, 그 힘이 저를 사로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고 나에게로 돌아온다.”(55,10-11).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 말씀이 예수님 안에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서 다 이루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는 당당하고 의연한 예수님을 보여 주려 합니다. 특히 수난사에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장엄하고 의연하신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모든 장면을 주도하여 아버지에게로 가십니다.
오늘의 수난사에, 예수님은 체포되면서 의연하십니다. 등불과 횃불과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그분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말에 예수님은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재차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은 체포되는 순간에도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십니다. 당신의 생존이 위협 당하는 순간에도 그분은 의연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안전을 염려하십니다.
대사제인 한나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문에 답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하게 이야기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대사제 앞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의연하고 당당하십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님은 그를 당당히 가르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한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싸우고 빼앗고 죽여서 이룩하는 그런 나라의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 나라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천하를 호령하는 빌라도이지만, 그는 그 진리를 모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셨고,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8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서 처형당하게 된 여인을 예수님이 살리신 이야기를 보도한 일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러 하였고, 예수님은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내신 다음, 그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며, 그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계신 나라는 용서하고 살리는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 어머니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으로 맺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도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그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되었고,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마리아에 대한 신앙인들의 각별한 존경은 돌아가신 예수님이 원하신 바였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고,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4,7). 그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의 죽음 후에 성령이 오신 사실을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고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개선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그 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끝까지 가는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기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사랑은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5)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기고 살리고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출세하고 하느님을 배경으로 행세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빌고 바쳐서 자기 한 사람 잘 되자는 것도 아닙니다. 섬기고 살리고 용서하는 사랑에서 멀리 있는 그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을 배워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양승국신부-
<너희들이 인간이냐?>
큰 수술을 마친 후 절대안정이란 팻말을 달고 일주일 가까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한 신부님께서 일반병실로 빠져나오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똑바로 누워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며칠간이 정말 끔찍했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십자가형,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처형방법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탈영병, 살인자, 폭동가, 혁명가, 강도 등 죄질이 가장 악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던 최고형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십자가 형벌이 시작되기 전, 보통 병사들은 죄수를 낮은 기둥에 묶습니다. 사형집행에 앞서 채찍질을 시작합니다. 가죽채찍이나 끝에 작은 납 구슬을 단 채찍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채찍은 사형수들의 등, 가슴, 머리, 배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단 한 번의 채찍질로도 피부는 터지고 파열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채찍질만으로도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먼저 가로로 된 나무에 어깨와 양손을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총독관저에서 갈바리아 언덕까지 약 600미터 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채찍을 든 병사들은 죄수가 딴 짓 하지 못하도록 눈에 불을 켜고 따라갔으며, 군중들은 길가에 나와 구경을 하곤 했습니다.
사형 집행장에 도착한 죄수는 미리 세어져있는 세로 기둥에 끌어올려져 양손과 발이 끈으로 묶입니다. 그리고는 양손과 발에 긴 못을 단단히 박습니다. 손과 발은 예민한 부위인 만큼 못 박힘으로 인한 사형수의 고통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들어와 박히는 순간, 얼마나 통증이 심했던지 사형수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육체적인 통증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만,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정신적 고통은 더 큰 것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병사들은 예수님께서 걸치셨던 통으로 짠 속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심지를 뽑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 밑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세심히 예수님을 뒷바라지해주었던 사랑하던 여 제자들도 서있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 흘러갔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갈증이라고 합니다. 수없이 흘린 피와 땀으로 기진맥진해진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외치시니 병사들이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짐승들도 입대지 않는 시어빠진 포도주를 해면에 적십니다. 그것을 막대기 끝에 끼워 예수님 입에 갖다 댑니다. 지나다니는 개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인간이냐?’ 말이 절로 나옵니다.
요한 수난기를 천천히 읽다보니 정말 가증스런 유다인들의 만행이 손에 잡힐 듯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왔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잔악하기로 유명했던 빌라도였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집요하게 빌라도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제발 십자가형에 처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부성이 짙은 말까지 던져가면서 말입니다. 말이 먹혀들지 않자 유다인들은 또 다른 술수를 꾸밉니다. 정치적인 고발이 아니라 종교적인 고발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협박까지 서슴없이 감행합니다.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할 수 없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을 가할 것을 명합니다. 이루 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질에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 예수님, 조롱의 표시로 가시관에다 홍포까지 걸친 예수님을 유다인들 앞에 내세우며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 사람이오.”
이 정도 했으면 군중들 마음이 풀어졌겠지 하고 빌라도가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은 더욱 길길이 뛰며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풀어줄 방도를 찾았던 빌라도였지만 마침내 집요한 유다인들 앞에 백기를 들고 맙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맞아 수난복음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정녕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동족들로부터 인정사정없는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이 빚어 만드신 피조물인 한 인간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신비이며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종하시다니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토록 무능하시다니요. 이토록 맥없이, 이토록 무력하게 고개를 떨어트리시다니요.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신비의 십자가 앞에 오늘 저 역시 무릎을 꿇습니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이기양 신부-
우리는 방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키드론 골짜기로 경비병들과 군인들이 들이닥친 시각은 한밤중이었습니다. 그 후 빌라도의 심문을 거쳐 사형이 언도된 예수님께서는 오후 세 시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각으로 추측이 되는 오후 3시경에 모여서 주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주님의 수난을 되새겨 보았고,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저녁 시간에는 십자가를 모시고 경배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오늘은 성찬례는 거행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이 거행됩니다. 일년에 한 번 오늘만큼은 미사도, 고해성사도 이루어지지 않지요. 성사의 주체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르겠다는 의미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깊은 절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지 않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많은 예비신자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하느님을 찾으며 몸과 마음의 평화를 갈구합니다. 신자들 역시 인생의 고난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 앞에서 끝까지 인내하기보다는 하느님께 그 고난들을 없애주시기를 청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시기보다는 거부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몸소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천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열린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제 잠시 후에 전 세계의 모든 사제들은 십자가를 들고 노래할 것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려 있네.?
신자들 앞에서 십자가를 높이 쳐들며 그 길을 가기를 독려합니다. 신자들이 응답하지요.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 길을 마음에 새기고 뒤따르겠다는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몰랐을 때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축복만을 기원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의 삶을 알게 되면 그것을 치워달라는 기도보다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깨닫고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거부하기보다는 기꺼이 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지고 가시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번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놀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모욕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달게 받으셨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는 또 한사람의 십자가의 길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십자가 앞에 베드로가 서 있지요. 그런데 똑같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이르셨지만 베드로는 그만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잘 가실 수 있었으며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는 왜 실패하고 말았는지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수차례에 걸쳐서 당신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누차 설명하셨으며 받아들이기를 힘겨워 하셨지요. 오죽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22,42)고 하느님께 청을 하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아시고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그리고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가시지요.
이에 반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이 닥칠 것을 수차례 예고하실 때마다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염려에 아주 힘있게 대답하지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13,37)
이렇게 맹세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칼을 빼들고 용맹과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눈앞에 십자가의 길이 놓여졌을 때 베드로의 모습과 예수님의 길은 전혀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던 예수님께서는 경비병과 군인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당신을 잡으러 오자 모든 것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먼저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요한18,4)
?나자렛 사람 예수요.?(요한18,5)
?나다.?(요한18,25)
예수님의 이 당당하고도 고요한 모습에 놀란 병사들은 뒷걸음질치다가 그만 땅에 넘어지고 말지요.
"나다"하지 않았느냐?"(요한18,8)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한치의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 가셨습니다. 이에 반해서 칼로 용맹을 떨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던 베드로는 비천한 문지기 하녀의 질문 한마디에도 겁에 질려서 그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맙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요한18,25)
?나는 아니오.?(요한18,25)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믿었던 베드로는 눈앞의 죽음 앞에서 완전히 기가 죽어 배신의 길을 가고야 맙니다. 피땀 흘려 기도하시며 성부께 모든 것을 맡기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며 당신께 주어진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모습 옆에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고 쓰러져 울부짖고 통회하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시며 하느님께 애원하시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하셨지요. 바로 그 차이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은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들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수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고통의 십자가를 기쁨과 생명의 부활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믿고 자신의 의지만을 믿으면 베드로 사도처럼 어느 순간 실패하고 말지요.
하느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길이 아니지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삶의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그 길을 갈 때 십자가는 부활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와 부모, 재물과 건강에 관계된 이런저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또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미움과 갈등의 어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허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지요. 이렇게 유한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을 살해하고 농촌의 한 마을로 숨어든 브라디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곧 농부의 고발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브라디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며 참회의 나날을 보냈지요. 그런데 끝내 자기를 고발한 그 농부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했지요. 아무리 용서를 하려고 해도 의지적으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날 한 수녀가 브라디를 찾아왔습니다.
?브라디씨, 어떤 사람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한 사람을 무척 미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브라디가 충고했습니다.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나요? 무조건 용서해야지요.?
고개 숙여 듣고 있던 수녀가 브라디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제 오빠를 토마스 버크를 죽였지요.?
깜짝 놀란 브라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사람의 의지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인생의 십자가를 부활로 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의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지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다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표현하지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십자가가 주어졌는데도 세월이 흐를수록 불평을 늘어놓으며 어느 날부턴가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무겁다고 자르고, 크다고 자르고, 너무 뾰족해서 찔린다고 잘라냈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제 다 잘려나가서 몽당연필 같아졌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이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천국 문이 보이는 언덕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천국 문 바로 앞에 개울이 하나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짊어지고 온 십자가를 개울 위에 걸치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그도 재빨리 자신의 십자가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몽당연필 같아진 십자가가 너무 짧아서 십자가와 함께 그는 개울 아래로 떨어져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삶의 십자가는 같습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가정이 화목한 사람이나 불화한 사람이나 부모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다 나름대로 고통스런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지요. 나에게만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그 험난한 고통의 길을 가셨는데 어느 누가 그 십자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때 그 십자가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기쁨이자 희망의 결실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의 인생을 승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며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합니다. 바로 십자가가 구원의 길임을 고백하며 깊은 절로 흠숭을 바치지요.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부활을 희망하며 기꺼이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혀오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성실한 자세로 지고 가서 마침내 승화시키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웃에게 부활을 체험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 경배 예식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십자가, 하늘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는 길
-강영구신부-
+ “이제 다 이루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대에게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신 날입니다.
똑바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겠습니까?
거기, 처참한 모습으로 매달린 한 사나이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뻗는 십자가의 종선(縱線)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인류는 그 종선(縱線)을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인류는 오를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세월을 보냈습니다.
좌(左)에서 우(右)로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횡선(橫線)은 너와 내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너와 내가 만나서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합니다.
그리고 한 형제가 됩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인류는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의 골짜기, 단절의 장벽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고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종선(縱線)으로 하늘을 만나게 해주는 예수,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횡선(橫線)으로 너와 나를 만나게 해주는 예수,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분에게 십자가는 고통이요 죽음이지만, 인류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새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당신도 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과 형제들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님은 이렇게 가셨다.†
-박상대 신부-
성금요일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절이다. 이 예절은 우리가 전례주년 속에서 평상시 거행해 오던 말씀과 성찬의 전례를 함께 한 미사성제와는 그 모습이 다르다. 그러나 미사가 제사(祭祀)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정신이 오늘 전례에서 유래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오늘 성금요일에 성찬례(미사)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만 거행한다. 매일 보던 십자가도 가려져 보이지 않고, 감실도 제대도 모두가 텅 비어있고 치워져 있다. 이렇게 교회의 전례주년 속에서 상당히 특별한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금요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기념예절은 예수께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를, 어떻게 고통받으셨으며, 또 어떻게 죽어 가셨는지를 보여준다. 성금요일의 분위기는 전례에 참석한 공동체 모두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세상을 향하여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4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마지막 말씀을 각기 서로 다르게 전해 주고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오후 세시쯤에 예수께서 십자가상 마지막 말씀으로 간주할 수 있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마르 15,3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시면서, 마태오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었으며, 마르코는 예수께서 그냥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하시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오늘 수난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에 와 있음을 아시고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시면서, 사람들이 대어 드린 신포도주를 약간 드시고는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거의 기절한 상태나 혼미한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식을 조금이나마 분명하게 해 줄 수 있는 신포도주를 청하여, 조금 드심으로써 자신의 수난 과정이 끝나가고 있음을 인식하셨던 것이다. 이는 고통이 끝나고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인식이다. 육시(정오 12시)부터 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을 덮은 어두움 속에서, 그것도 로댕(Rodin)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의 모습도 아닌, 이사야의 말대로 "일찍이 눈으로 본적도 귀로 들어 본적도 없는 그런 기막힌 모습으로"(이사 52,13-15)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 33년을 하루 같고 한결 같았던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마감하는 순간, 그분은 또렷한 의식 속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이제 다 이루었다"니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일까? 수난의 고통이 끝났다는 소리인가? 고통에 지친 사람이 이제는 죽음으로 쉬게되었다고 기뻐서 외치는 소리인가? 아니면 한 인간의 고통스런 삶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다고 푸념하는 소리인가? 그분의 외침은 분명 지쳐버린 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었으며, 삶의 완성과 성취, 그리고 자신을 파견한 아버지께 대한 충성과 받은 사명에 대한 임무완성의 외침이었으며, 바로 인류의 영원한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외침이었다.
"이제 다 이루었다"는 그분의 외침은 어제 저녁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고별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완성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단순히 내어 뱉은 말 한마디가 아니라 바로 행위 그 자체이다. 이는 예수님 전 생애의 완성이요 결론이며, 자신이 선포한 약속과 복음,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책임 있는 행위이며 그 보증이다. 이는 어제 저녁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와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하여 내어주시며 하셨던 말씀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후속조치를 동반하는, 즉 실제적 수행(修行)을 가져오는 "효과적 말씀"(Verbum efficax)인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은 실로 한결같았고, 덧붙이거나 뺄 것이 하나도 없는, 마치 단번에 그어 내린 일획과도 같은 그분의 삶, 아무런 욕심도 없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이나 안일에는 아랑 곳 하지 않는, 그야말로 몰아적(沒我的) 위타(爲他)의 삶의 외침이다. 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계획에 온전히 응답하고 투신(投身)한 삶의 외침이다. 또한 이는 "해내었다"는 자부심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고 행하려는 아들 예수의 철저한 순종과 겸손의 외침이었다.
"하기오스 아타나토스, 엘레이손 히마스." 거룩하신 불사신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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