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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기독교인의 행위
제1장. 도덕의 세 가지 요소
어떤 학생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더니 “즐겁게 지내는 사람을 보면 방해하는 사람과 같은 분”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도덕은 사람들이 즐겁게 지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제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간섭과 훼방꾼이라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도덕을 인간이라는 기계를 운영하기 위한 지침(고장. 변형. 마찰 등을 예방)이라고 말한다. ‘기계’를 언급하는데, 모든 기계는(예. 스마트폰) 처음에 나올 때 사용법을 읽히도록 한다. 사용 설명서를 읽든지 누군가에게 배워야 한다. 대개 그 사용법에는 “⁓을 하면 안 된다”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그 기계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필수적인 항목이다. 도덕은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기계를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금지 사항도 읽어야 한다. 금지 사항을 지킬 때 그 기계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루이스는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 규칙” “도덕적 순종”보다 “도덕적 이상”을 말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도덕을 얘기하면 “도덕적 완전함”이라는 이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오해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완전함이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여자를 보았을 때 “나의 이상형이야”라고 말하는 경우다. 그것은 취향적 이상이다. 각기 다른 것이다. 자기의 취향을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 도덕을 말하는 사람을 “도덕적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도덕을 개인적인 취향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 기어 변속을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루이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간음을 하지 않거나 약자를 못살게 굴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높은 이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층 더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이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계산할 때 틀릴 때도 있다. 그렇다고 계산할 때 정확하게 한다고 해서 특별히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건 계산을 할 때 정확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칭찬한 일은 아니다.
루이스는 도덕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먼저 두 가지 고장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 떠돌거나 다른 사람들과 충돌함으로 서로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그럴 수 있다. 이기심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나와 너의 관계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둘째, 내 내부의 문제, 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면에 여러 가지 욕구와 부딪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루이스는 예를 들어서 배들이 항로를 잘 지켜서 선박끼리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항해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배가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 엔진이 고장나지 않아야 항해에 성공할 수 있다.
셋째, 요소는 선단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다. 목적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부딪치지 않고, 배가 정상적인 기능을 해도 다 틀어지는 것이다. 도덕 요소에는 ① 각 개인의 공정한 경기와 조화, ②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의 정돈과 조화, ③ 인간 생활의 목표가 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창조되었는가? 왜 사는가? 항로의 목적이 무엇인가?
루이스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사람들은 첫 번째 것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 안에서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도덕의 기준이 된다(전쟁, 빈곤, 거짓, 위선 등). 우리의 내적인 것과 방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배와 충돌하지 않으면 자신의 내부 상태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루이스는 배가 낡고 결함이 있어서 내부가 다 망가졌는데 충돌을 피하기 위한 조종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묻는다. 탐심, 비겁, 악한 성질, 자만심 등이 우리에게 있다면 사회적 행위의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묻는다. 어떤 사회적인 규칙도 올바르게 작동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이 어느 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으나 인간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면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법으로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사람이 선해야 선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법과 제도만으로 사회는 올바르게 유지될 수 없다.
루이스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방향성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종교는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한다. 기독교가 참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고 하는 곳이 올바른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배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루이스는 그 배가 자신의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내 영혼과 몸은 내 것인가? 우리는 청지기(집사)이지 소유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창조되었고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영원토록 살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만일 무신론자들의 말처럼 인간이 70년만 산다면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면 문제는 쉽다.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70년만 살면 끝나니까. 단지 70년만 살고 흙으로 돌아가고 끝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영원하다’고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영원을 믿고 안 믿고는 현실의 삶을 달리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는 못된 성질이 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 점점 심해진다고 해보자. 그 성질이 백만 년을 간다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이라고 한다. 못된 성질을 가지고 평생을 살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지옥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진리대로 영원히 산다면 국가나 문명보다(일시적이라는 것)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왜 개인이 국가나 문명보다 중요한지를 말한다.
제2장. 기본 도덕
- 네 가지
루이스는 도덕은 7가지 덕목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4가지는 기본적인 덕목으로 모든 문명인이 인식하는 것,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인정하는 덕목이다. 3가지는 신학적인 덕목으로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아는 덕이다. 그것은 사랑과(9장) 소망과(10장) 믿음(11, 12장)이다. 4가지 기본 덕목은 신중(분별력), 절제, 정의, 견인(堅忍. 꿋꿋함)이다.
첫째, 신중(분별력)은 실생활에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신중함도 도덕인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분별력이 없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신 말씀을 오해한 것’)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도 지성적인 영역에서는 어리석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하지만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셨다. 지성은 맡은 일을 잘 해내며, 으뜸 가는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고 할 때 그 자선 단체가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부했다는 행위 자체로만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선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를 꼼꼼하게 알아보아야 한다. 분별해야 한다. * 우리 한국 교회 – 헌금만 하지 그 헌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분별력이 없다 보니 문제가 많다.
둘째, 절제다. 루이스 당시에도 무엇보다 금주를 말하는 일이 있었다. 술을 절대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금주를 말하고 있다. 절제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절제는 쾌락과 관련해서 그것이 지나칠 때 말하는 것이다.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하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잘못된 술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문제가 있다. 골프, 전자오락, 애완견, 카드놀이, 옷 등도 마찬가지다.
셋째, 정의다. 짧게 말한다. 정의는 법정에서 통용되는 것 이상을 말한다. 정직함, 협조, 진실함, 약속을 지킴 등도 포함한다.
넷째, 견인(꿋꿋함)이다. 두 가지 종류의 용기가 있다. 고통 속에서 버티는 용기와 위험 속에서 맞서는 용기다.
루이스는 정의, 절제 등의 특별한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정의롭다, 절제한다, 그런 뜻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테니스를 잘 치지 않아도 가끔 공을 잘 칠 수도 있다. 어쩌다 잘 치는 것과 테니스 실력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꾸준한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일정한 인격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인격적인 특징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릇된 사상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옳은 일을 했으면 그것을 기꺼이 했는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했는지가 중요하다. 동기적인 윤리가 중요하다. 둘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련의 규칙들만 따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겉에 있는 규칙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겉에 있는 규칙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셋째, 덕목이 이 세상에서만 필요하고 내세에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라고 한다. 천국에서 이 땅에서처럼 용감해야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 됨됨이, 자질, 특징은 요구될 것이 아닌가.
제3장. 사회 도덕
기독교 도덕을 새로운 도덕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니다. 신약 성경에 황금률이라고 표현하는 말씀이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장 12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새로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루이스는 위대한 도덕 교사는 새로운 도덕을 소개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상한 사기꾼들이 자꾸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도덕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단순한 원리들에게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황금률에 대한 세부적인 정치적 프로그램, 즉 세부적인 지침이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특정 시대, 특정 사람에게 맞는 윤리가 아니다. 루이스는 예를 든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라고 했지만, 그 요리법까지 가르쳐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 문법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루이스는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를 가지고 설명한다. 그 얘기를 교회가 몇몇 리더에게 얘기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가 실천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두가 신학자,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신앙의 성숙이 있어도 경제나 정치계 각 분야에서 황금률을 실천해야 한다. 사람들은 목회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을 말해주기 원하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목회자가 방향은 제시할 수 있으나 정치, 경제의 구체적인 것을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학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나 극작가가 써야 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주체는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 전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도덕의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은 기독교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술하지는 않으나 암시는 한다.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손으로 일해야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 루이스는 이런 모습을 보면 기독교는 진보 사회처럼 보인다고 하였다(사회주의인 것처럼 보임). 그런데 또 “순종”(국가에. 부모에. 남편에게)을 요구한다. 그것을 보면 또 보수적으로 보인다. 즉 성경에는 진보적인 모습도 보이고 보수적인 모습도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따라가는 현상이 생긴다. 서로 양극화될 수 있는 요인이 있다고 본다.
루이스는 고리대금업을 얘기한다. 고대 헬라인이나 구약시대나 중세 위대한 기독교 교사는 모두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 경제학은 “이자”가 중요하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모든 체계의 근본”이다. 루이스는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 확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답할 수 있는 것은 고대 헬라인이나 구약, 중세 위대한 기독교 교사들 모두 고리대금업을 비판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자 놀이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궁핍한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서다(엡 4장 28절). 루이스는 그 기준을 말한다. 얼마나 구제로 주어야 하는가? 자기의 삶에 어느 정도 부담감이 있는 선이라고 한다. 구제하는 데 자기의 생활에 전혀 부담감이 되지 않는다면 너무 적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담되는 금액이 적정 기준이라고 한다. 왜 구제를 잘못하는가? 구제를 하면 생활이 흔들린다는 안전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은 데서는 쓰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기독교 사회는 우리의 대부분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때까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되풀이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어야만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후에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움으로써만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도덕과 정신분석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첫째, “남을 대접하라”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루이스는(1898년 출생) 그런 기독교 도덕을 말하면 그것과 비슷한 정신분석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라고 보았다. 루이스 당시에 프로이트의(1856년 출생. 1939년 사망) 정신분석 이론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루이스는 정신 분석자들의 이론과 기교는 거기에 추가한 일반적인 세계관과 분명히 구분하자고 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무의식”에 대해 다룬다. 어떤 억압, 왜곡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프로이트가 덧붙여 놓은 일반 철학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치료에는 전문이지만 일반 철학에는 아마추어라고 한다. 프로이트의 일반 철학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자는 것이다. 정신분석 그 자체는 기독교에 유용하지만 그가 덧붙여 놓은 철학은 배제되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무신론자다. 기독교를 증오하듯 비판한 사람이다.
도덕적 선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선택하는 행위다. 둘째, 그 행동을 하게 하는 그 사람의 정신 능력이다. 원재료가 되는 것은 감정과 자극(충동)이다. 원재료가 되는 감정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감정이다. 둘째, 무의식 안에서 정도에서 벗어난 일들로 인한 부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예를 들어서 칼을 보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는데 개미를 두려워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욕망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욕망은 비뚤어진 것이다. 비뚤어진 감정은 잠재적인 무의식의 문제라고 본다. 정신분석이 하는 일은 바로 비뚤어진 감정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도덕은 선택하는 행위와 관련이 된다. 전쟁에 나가는 세 남자의 얘기를 한다. 한 사람은 전쟁에 나가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는 데 도덕적 노력으로 그것을 이기고 용감한 사람이 된다. 두 사람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두려움이 너무나 큰 나머지 도덕적으로 싸울 수 없는 상태다. 정신 분석자가 가서 두 사람을 치료한다. 정신분석의 일은 그것으로 끝난다. 여기서부터 도덕이 시작된다. 치료는 받았으나 도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치료받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증상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라를 위해 의무를 다해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증상이 없어져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래도 위험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도덕의 문제다.
루이스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인 선택을 판단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원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를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도덕을 일종의 거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규칙을 지키면 상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고. 그것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좋은 방식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 데 일평생 그 선택을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거룩한 피조물이나 지옥의 피조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 및 다른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는 피조물”로 바뀌어 가든지 “하나님 및 다른 동료 피조물을 미워하면서 하나님과 싸우는 상태에 있는 피조물”로 바뀌어 간다. 매 순간 우리는 많은 선택을 통해서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루이스는 영원의 관점에서 어떤 행동의 흔적을 남기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어 수천 명의 피를 흘리게 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화’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떤 기회가 되었을 때 더 격하게 화를 낼 수가 있다. 회개하면 비뚤어진 영혼을 바르게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든 그렇지 않든지 그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
루이스는 올바른 지도는 지식으로도 나아간다고 한다. “선해지기 시작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욱더 분명하게 인식한다. 반면에 악해지기 시작한 사람은 자신의 악을 더욱 축소하여 이해한다. 크게 악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신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틀린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정신이 올바르게 작용할 때에야 계산이 틀린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술취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맑은 정신일 때에 그것을 알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선에 대해서도 모르고 악에 대해서도 모른다.”
제5장. 성 도덕
루이스는 기독교적인 순결과 사회적 규칙인 예절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순결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지만, 예절에 대한 규칙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순결은 기독교의 덕 가운데서 가장 인기 없는 덕이지만 결코 버릴 수가 없다. “결혼하여 배우자를 완전히 신실하게 대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금욕하라”는 것이 옛 기독교의 규칙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 자체가 아니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이 아니다. 어떤 정신없는 기독교인은 기독교가 성이나 육체나 쾌락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는 육체를 철저히 인정하고, 물질은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육신을 가졌으며, 천국에서도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갖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아름다움과 활력의 근본적인 부분임을 믿는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하고,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시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인에 의해 쓰였다.
제6장. 기독교의 결혼
루이스는 그 당시 결혼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지극히 인기가 없고, 아직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서(1956년. 조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4년간 결혼생활을 한다.) 그는 결혼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을 부부는 하나의 유기체, 한 몸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완전한 결합을 하여 하나가 되도록 지으셨다. 혼외정사는 그 완전한 연합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결합으로부터 성적 결합을 고립시킨다. 루이스는 결혼은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이혼은 일종의 수술처럼 살아 있는 몸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배우자를 사랑하겠다는 공개적인 엄숙한 약속(결혼 서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혼인 서약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사기꾼들이고, 그것조차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슨 순결을 기대할 수 있는지 묻는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우리를 관대하고 담대하게(용감하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눈을 열어 연인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고, 동물적인 정욕을 이기는 위대한 정복자다. 결혼이라는 기관차는 이 사랑을 연료로 달리는 것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 기관차로 하여금 출발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사랑은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에 의해서 지탱되고 습관에 의해 강화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강해진다.
제7장. 용서
루이스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법은 결혼에서의 순결보다 더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법에는 ‘원수’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용서한다는 것은 멋진 생각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용서해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는 용서를 언급하면 화를 낸다.
루이스는 용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우리가 수학을 배울 때 처음부터 미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덧셈에서 시작하듯이 가까운 사람부터(가족들)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를 좋아한다고 느끼라거나 매력적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비겁함, 자만심, 탐욕을 미워하나 여전히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살인과 죽이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 기독교인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는 것 등은 살인과 다르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미움을 즐겨서는 안 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분노의 감정, 보복하려는 감정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해마다, 일생 동안 그것들이 머리를 내밀 때마다 그 머리를 쳐야 한다. 오히려 상대가 악하지 않기를 원하며, 고침받기를, 행복하기를 원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스러운 것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제8장. 대죄(大罪. 가장 큰 죄)
루이스는 이 세상에 사는 한 결코 자유 할 수 없는 악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되면 혐오하지만, 기독교인들 빼고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서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겸손과 반대되는 교만, 자만심이다. 교만은 본질적인 악, 가장 좋지 못한 악으로 마귀가 마귀 된 것은 이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함은 완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 상태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각 사람의 교만은 다른 사람의 교만과 경쟁한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권세가 있고 더 부유하고 더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경쟁자요 적수가 된다.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국가, 모든 가정의 불행의 주된 원인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사물과 사람을 내려다본다. 그래서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경건한 외모를 갖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겸손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제9장. 사랑
루이스는 세 가지 신학적 덕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다룬다. 그는 기독교적인 의미의 사랑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의지적인 상태라고 한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좋아함, 애정’과 다르다. 좋아함이나 애정은 하나의 사실이다. 선천적으로 냉정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세속적인 사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한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을 더욱 좋아하게 된다. 독일인들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미워했기에 유대인들을 학대했는데, 학대했기 때문에 그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면(의지의 행위)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면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이다.
제10장. 소망
소망은 일종의 도피주의나 희망적인 생각의 형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큰 일을 한 기독교인들은 내세에 대해 많이 생각한 사람, 하늘에 몰두해 있는 사람이다. “하늘나라를 목표로 하라. 그리하면 이 세상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목표로 삼는다면, 두 가지 모두 얻지 못할 것이다.” 루이스는 하늘나라를 원하지 않는 것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교육이 우리의 정신을 이 세상에 고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루이스는 삶의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옳지 않은 방법 두 가지와 옳은 방법 한 가지다. 첫째, 어리석은 사람으로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예를 들어서 일평생 다른 여인과 결혼했다면, 등 모든 탓을 환경에 돌린다. 둘째, 환멸을 느끼는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상당히 기분 좋게 살아간다.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면, 그것을 가장 훌륭한 노선이 될 수 있다. 셋째, 기독교인의 방법이다. 우리의 욕구들을 하늘나라와 연결시켜서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축복들을 멸시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와 기쁨에 동참한다는 소망하면서 산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제11장. 믿음(1)
루이스는 믿음을 두 가지 의미로 본다. 첫째,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참되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것을 참되다고 인정한 후에 재고해야 할 다른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면 계속 참되다고 여긴다고 가정한다. 인간의 지성은 완전히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상상력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이성이 한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한편이 되어 싸움을 벌인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운 여인이 거짓말쟁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나 그 여인과 함께 있으면 그 지식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그래서 믿음은 “한 번 이성이 받아들인 것은 계속 붙드는 기술(art)”이라고 말한다. 기분은 이성과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그 첫 단계는 우리의 기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교리를 생각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경건한 글을 읽으며 교회에 가는 것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제12장. 믿음(2)
루이스는 믿음의 두 번째 의미를 말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신뢰)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이루신 완전한 순종을 우리가 공유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의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를 의뢰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하늘나라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행한 선행은 전혀 선행이 될 수 없으며 영리 위주의 투기 행위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을(“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지만 우리 역시 선행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