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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끼미
전 광 용
―제발 나에게 부질없는 관심을 가져주지 말았으면
늦가을 잔뜩 찌푸린 하늘. 싸늘한 바람이 포도의 낙엽을 휘몰아가는 저물녘.
교문을 나선 마리아는 묵묵히 고궁(古宮)의 담 모퉁이를 돌았다. 그의 눈은 아래로 깔린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기대로의 생각에 골똘하고 있었다.
‘그럼 두구두구 잘 생각해봐요.’
그는 브라운 목사가 어깨 너머로 무겁게 다지던 마지막 한마디를 곱씹었다.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그 어느 쪽도 간단한 예스, 노의 한마디로 귀결 지어질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휩싸여져왔다.
그러한 문제에 부닥지기 전보다 몇 갑절 더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경수(京秀)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러한 양자택일의 중대한 분기점에서 하필이면 왜 경수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역시 지금까지의 자기 마음속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거기에 다시 혜숙(惠淑)의 짙은 눈동자가 덮쳐져왔다. 혜숙의 티 없이 맑은 얼굴은 그 명랑한 웃음과 더불어 언제나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그 뒤를 이어 가족들의 영상이 저 나름으로 떠올랐다가는 사라져갔다. 모두가 아끼고 싶은 사람들뿐이었다.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은 대상들만 같았다. 이들이 이렇게껏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한 곬으로 쏠려져 있다는 결과가 아닐까 하고 그는 스스로에 자문자답해보았다.
마리아는 남대문 지하도를 빠져나왔다. 그는 자기 발길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산 오르막길에 접어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 있는 청파동 쪽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되돌아설 염은 하지 않았다. 그대로 걷고만 싶었다. 방과 후 돌아오는 걸음에 곧장 집 쪽으로 가지 않고 옆길로 쏠리는 일은 이 가을 접어들면서부터 가끔 있은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심정은 평온 상태를 잃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호젓이 있고 싶어지는 심정, 그러한 마음의 변화는 그 자신도 무엇이라 확연한 단정을 내려낼 수 없었다. 스쳐가고 스쳐오는 뭇사람들이 자기에게는 모두 관계도 없는 먼 나라 사람들만 같게 느껴졌다.
마리아는 어린이 놀이터 한 모퉁이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재잘거리며 뛰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흩어져갔다. 주위는 점점 고요해지고 저녁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자기 이외의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좋았다. 그는 불빛이 환하게 두드러져오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몇 번이고 브라운 목사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했다.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그러나 아무런 해답도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쌀쌀한 바람이: 스커트 자락을 휘몰아 올렸다. 목덜미가 선뜻해 왔다. 그래도 마리아는 일어날 줄 모르고 그 자리에 굳어진 듯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야 자기 이외의 아무도 없었다. 가까운 피붙이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산 중턱까지 총총히 박힌 창마다 불이 반짝였다. 그러나 자기가 돌아갈 안식처란 아무 데도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이 물결쳐올 뿐이었다.
아까 브라운 목사에게 자기의 혈통에 대한 과거를 송두리째 털어놓은 것이 거뜬하면서도 한편 솟구치는 뉘우침을 누를 길 없었다.
“나도 마리아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필립이 말끄러미 쳐다보며 말하던 소리를 지금 마리아는 되뇌고 있는 것이다.
초가을 어느 날, 마리아는 브라운 목사를 따라 이태원 외인촌(外人村)으로 간 일이 있었다.
학교 예배 시간에 가끔 나오는 브라운 목사는 마리아가 관계하는 영어 회화반의 과외 특별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연이 마리아를 브라운 목사의 눈에 들게 한 최초의 계기가 되게 했다.
브라운 목사는 다른 학생들보다 마리아를 유달리 귀여워해주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뛰어난 영어 실력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마리아의 이국적인 인상이 브라운 목사의 색다른 관심을 끌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른 학생과는 표 나는 자기 외모에 연관시켜, 브라운 목사의 관심이나 동정이 쏠려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부터 마리아는 거북스러워지는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다만 그러한 점에 비겨 브라운 목사는 단 한 번도 마리아의 상처를 찌르는 질문을 한 적은 없었다. 마리아 자신도 그런 자기 신상 문제에 대해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한 일은 없었다. 자기에 관한 다른 일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면서 혈육 관계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관심 한 듯한 브라운 목사가 마리아에겐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브라운 목사 댁도 자주 놀러 갔고, 그들의 가족들과도 친숙하게 지내게끔 되었었다.
이날 마리아가 이태원 쪽으로 브라운 목사를 따라나선 것도 그러한 평상시의 예사로운 접촉의 연장에 불과했다.
유솜¹의 어느 부서 책임자론가 있다는 스티븐슨 씨는 마리아를 즐겁게 맞아주었다. 부인도 낯선 첫 손님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을 반기는 것만 같이 마리아에게는 느껴졌다. 마리아보다 두 살 아래라는 아들 필립은 친누나라도 만난 것처럼 신이 나서 자기 집 구석구석으로 손목을 이끌고 다니며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었다.
마리아는 오래간만에 흐뭇한 따사로움에 젖을 수 있어 그날의 감명을 얼마 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는 필립의 인상에서 자신에게 깊이 잠재해 있던 어떤 동류의식의 움직임 같은 것을 느끼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브라운 목사는 마리아를 돌아다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을 건넸다.
“마리아, 오늘 재미있었지?”
“네.”
“참 좋은 분들이야…….”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마리아는 참말 진심에서 였다.
“마리아네 집 안도 그렇게 다정스럽지?”
마리아는 금방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네 하고 들릴락 말락 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어머닌 다 계시지?”
“네.”
“몇 형제나 돼?”
“동생이 하나 있어요.”
“그래, 그럼 역시 재미있겠군…….”
대답은 했으나 마리아의 가슴속은 꺼림칙하기만 했다.
마리아는 가족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는 때가 가장 괴로웠다. 어릴 때는 철없이 지껄여댔지만 나이가 차가면서부터는 그러한 물음에 머뭇거려지기 일쑤였다. 자기의 외형에서 눈치 챈 사람들은 그런 어색한 질문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이즘에 와서는 그러한 화제는 짓궂게만 여겨져 마리아 쪽에서 굳이 외면하고 대답을 회피해 왔었다.
그러나 브라운 목사의 질문에는 그렇게 무례한 태도로 대할 수 만은 없었다. 그것은 또한 브라운 목사의 표정이나 말씨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모르게 자기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강압 관념의 소치이기도 했다.
그 다음 토요일은 필립이 학교로 찾아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싱글벙글하며 퍽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마리아도 즐거웠던 첫인상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필립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엄마가 놀러 오래요.”
“고마워요.”
승낙인지 거절인지 모를 대답을 해놓고도 마리아는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라는 걸까…… 의아스러우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단란한 그들 가족의 분위기에 잠시나마 싸이고 싶은 호기심 같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마리아는 옆에 서 있는 혜숙이를 이끌고 같이 차에 올랐다. 필립은 사뭇 만족한 듯한 웃음을 머금고 운전대에서 뒤의 두 소녀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신나게 차를 몰아갔다.
스티븐슨 내외는 마리아를 끌어안으며 먼젓번보다 더 다정스럽게 맞아주었다. 마리아는 육친의 따뜻한 애정에 접하는 것만 같은 황홀한 착각에 젖어들었다. 혜숙이를 그들에게 소개하면서도 마리아는 자기가 주인이 된 양 기분이 들떠 있었다.
식사 대접을 받은 후 이들은 음악을 듣는다, 게임 놀이를 한다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
“우리도 이런 딸이 있었으면……”
스티븐슨 부인은 마리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에서 스며 나오는 푸념을 털어놓았다. 마리아는 그 말이 고맙게 느껴지면서 옆에 앉아 있는 혜숙이 보기에 오히려 민망할 정도였다.
“참말, 어머니 나도 마리아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아들 하나니까, 필립이 외로워서……”
필립의 말에 간격을 두지 않고 곁들이면서 스티븐슨 부인은 남편 쪽을 건너다보았다. 스티븐슨 씨도 흥 흥 하고 콧소리 대답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가슴속은 개운하지 않았다.
필립이 바래다주는 차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릴 때까지도, 그들의 대화는 마리아의 머릿속에서 몇 고비고 맴돌기만 했다.
‘나는 어쩌면 집 식구들보다 저들에게 더 어울리게 태어났는지도 몰라……’
대문을 흔들며 마리아는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갔다.
마리아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아버지는 더욱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세 사람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아버지도 몇 사람 될 수 있는 계산으로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것을 전연 모르고 지낸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만 같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이 아주 철부지였던 어릴 때의 일까지를 그는 뚜렷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치원에 들어가 꼬마 친구들과 놀던 때 이후의 일들은 흐리멍덩하게나마 흩어진 인상의 조각을 아련하게 더듬어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로서 온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랐었다. 그의 위에는 오빠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오빠는 그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다. 집안에 어린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모 즉 아버지의 누이동생인 인순(仁順) 아줌마의 아들을 데려다 길렀었다. 인순 아줌마는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여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몇 달 뒤에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경수오빠였다. 그러나 경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개가한 자기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리아는 거의 부러운 것 없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 하며 유치원을 마치고 국민학교에 들어 갔었다.
이 무렵의 일이었다.
“저게 튀기² 아니야?”
지나며 떨어뜨리고 가는 어른들의 부질없는 한마디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겨주었다.
“얜 아이노꼰³가…….”
“응, 세끼미야.”
저 앞쪽으로 걸어가다가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이런 말을 지껄이던 여인들의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그는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튀기, 아이노꼬, 세끼미, 머릿속에 감아붙는 이런 말들을 그는 혼자 뇌까리면서도 그때가 지나면 또 그대로 잊어버리고 천진난만하게 뛰놀았다. 어머니에게 한번 이러한 말들의 뜻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그런 생각들은 깡그리 씻어지고 따사로운 집안 분위기에 젖어 행복에 찬 나날을 즐겁게 보냈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엘 갔었다. 커피니 버터니 양담배니 하는 양키 물건들이 늘어놓인 골목길을 어머니에게 손목을 이끌려 뒤따라가고 있을 때였다.
“야, 저 튀기 봐라…… 고 참 예쁜데!”
튀기라는 말에 깜짝 놀란 듯이 마리아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노꼬란 본래 잘생기는 법이야……”
한데 모여 선 젊은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주워들으면서 그는 어린 가슴에 찌렁하게 부딪치는 아픈 감정을 느꼈었다.
한눈을 팔고 있는 그를 낚아채는 어머니의 꼭 쥐어진 손에서 오는 힘을 느끼면서 마리아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순간 얼굴이 빨개진 어머니는 마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금방 태연해졌다.
그러나 갑자기 태연해지는 어머니의 그 표정이 마리아에겐 오히려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복닥거리는 장터에서 큰길로 벗어 나왔을 때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다그쳐 물었다.
“엄마.”
“응―.”
“그 튀기라는 거 뭐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니는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마리아를 내려다보았으나 그 모습은 아까 모양 마리아에 게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아이노꼬란 건?”
마리아는 재우쳐 물었다.
“그것도 별거 아니야, 그저 그래보는 거야…….”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잘라버리지만 마리아는 도무지 마음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내아이들이 “얘 저기 양키 계집애 온다” 하며 손가락질을 할 때도 마리아는 웬일인지 분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애들이 나더러 양키 계집애래!”
마리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뽀로통하게 쏘아붙였다.
“별소리를 다…….”
어머니는 마리아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이것 봐. 엄마두 코가 높구 눈이 크지 않아? 마리아는 엄마 닮아서 그래.”
마리아는 어머니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말대로 어머니도 코가 당실하고 눈이 옴폭하게 커서 서양 여자 비슷한 인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애들이 자꾸만 놀리지 않어?”
“괜히들 네가 예쁘니까 장난들 치느라구 그러는 거란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훅 한숨을 쉬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마리아는 경대 앞에 가 앉아 제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았다. 다른 데는 다 어머니와 비슷한데 눈빛만은 틀린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동자는 까만데 자기 눈동자는 파랗게 보였다. 그래도 자기 어머니는 이웃 어느 집 아주머니들보다도 예쁘게 생겼다고 느껴졌다. 남들이 엄마더러 미인이라고 소곤대는 것도 마리아는 여러 번 들었었다.
아버지는 마리아에게 적잖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직 어린 딸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세계적인 예술가로 키워야 되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되풀이 했었다.
사업에 분주한 아버지였지만 취미는 다각도로 넓었다. 승마나 골프는 물론 문학, 미술에도 관심이 깊었었다. 집에는 아버지가 대학 시절에 보던 책을 비롯하여 많은 장서가 있었고, 골동품 서화 등 값진 것도 적지 않게 수집되어 있었다.
거기에 어머니는 음악 전공이어서 레코드로 클래식은 말할 것 없고, 새로 유행되는 판들도 어지간히 장만되어 있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차츰 성장해가는 마리아의 가슴을 부풀게만 해주었다.
마리아는 유치원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국민학교 때는 음악 콩쿠르에 나가 입상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방학이면 미술 연구소에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와 함께 즐기는 음악을 듣기도 했었다.
마치 그는 어머니 아버지의 품 안에서 유리관 속의 인형처럼 때묻지 않고 키워져갔다.
어머니는 첫아이를 잘못 배어 수술을 했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어린애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어머니를 아버지는 더욱 극진하게 아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아버지보다 더한 남자란 없는 것만 같이 받들고 보살폈다. 어린 마리아의 눈에도 자기 아버지 어머니처럼 그렇게 사이좋은 집안은 없는 것만 같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여학교에 입학한 뒤 어머니에게서 지난날의 숨은 이야기들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된 때는 이미 집안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렇게 다정하게 보이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말다툼이 잦게 되고, 단란하던 집안 분위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여파는 마리아에게도 밀려왔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는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 앞에 어머니 아닌 새로운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 직집적 인 동기가 되었었다.
지금의 어머니가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리아가 확실히 알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분별하여 들을 수 있고 그 스스로의 판단이 조금씩 서질 수 있을 무렵부터 마리아는 자기 몸뚱이에 흐르고 있는 핏줄기의 근원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고 그 의심을 스스로 부인하는 데 힘써왔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의 입에서 그러한 자신의 정확한 과거를 들었을 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꼭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허황한 심정이었다. 마리아는 낭떠러지에서 천 길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어머니 가슴속에 파묻혔다. 어머니의 옷섶은 그의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머니도 딸을 껴안은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누구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이것은 이때부터 그의 가슴에 깊이 못 박힌 상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풀리지 못한 안타까운 수수께끼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마리아를 낳은 친어머니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물론……
마리아는 난 지 한 달도 못 되는 핏덩이로 길가에 버려졌었다.
이른 봄 아직 밖은 쌀쌀한 새벽 공기를 뚫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집 안에까지 들려왔다. 부인이 먼저 들었으면서도 처음에는 예사롭게 흘려 넘겼다. 그러나, 한참 있어도 아기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창문에 와 부딪쳤다. 아직 사람도 다니지 않는 동트기 전이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한 부인은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아기 없는 젊은 부부의 귀에는 그 울음소리가 더욱 신기하게만 들렸다. 배를 째고 아기집을 들어낸 부인은 몸소 자신의 해산을 단념했지만, 남편도 자식에 대한 집착에서 어느 정도 풀려난 시기였다. 그것이 그들의 부부에게 아무 지장도 주지 않을 만큼 둘의 사랑은 두터웠다. 그러나 부인은 늘 남편에 대한 미안한 감을 금하지 못했고 자기 앞이 허전해옴을 느꼈다. 남편은 남편대로 굳이 부부간의 화제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자식이 있었으면 하는 최후의 일념 마저 송두리째 포기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찢는 듯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만 하던 부부는 호기심에 창밖으로 나갔다.
아기는 바로 대문 기둥에 기대 놓여져 있었다. 그믐달이 서산마루에 걸린 희미한 새벽, 두터운 새 보료에 싸인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얼굴만 비죽이 나타낸 채 계속 울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부부는 아기를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대문 빗장이 걸리는 소리만이 이슬 젖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고 긴 여운을 남겼다.
방 아랫목에 뉘어진 아기는 계속 울고 있었다. 그것이 밖에서보다 더 요란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도둑질이라도 해 온 것처럼 서로의 표정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둘의 가슴은 뛰기만 했다.
혼혈아(混血兒)! 아기의 얼굴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부부의 눈길은 마주쳤다. 어떤 기대가 허물어져가는 찰나의 낙망 같은 아쉬움이 두 사람의 표정 속에 깃들었다. 동여맨 아랫도리를 헤쳤다. 아기는 겹겹으로 싸여져 있었다. 그것이 속내의에서부터 겉 담요까지 모두가 외국제 신품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의 머릿속엔 외국 주둔군을 연상하는 영감의 환영이 번개같이 스쳐갔다.
사내가 아니고 계집아이라서 어느 한쪽이 더 서운할 것도 기쁠 것도 없었다. 마지막에 아기의 맨 속샤쓰에서 핀으로 꽂혀 있는 천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마리아!’
이것이 마리아가, 낳아준 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단 하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것은 새로 난 아기의 이름으로 지은 것인지, 또는 애끊는 심정으로 남겨준 어머니의 이름 그대로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실지 태어난 날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주워온 그날이 그의 생일 구실을 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도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마리아의 마음은 조금도 달라진 바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에도 색다른 변화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자신이 친어머니가 아니라서 딸의 생각이 비뚤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전보다 더 마리아를 귀여워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 이후의 마리아는 자신의 핏줄기에 대하여 끝없는 날개를 펼쳐가는 버릇을 가졌었다.
참말 자기를 낳은 어머니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친어머니를 단 한 번도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여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훤칠히 큰 키나 선이 뚜렷한 얼굴 모습이나 동무들보다 흰 살 빛깔로 보아, 아버지까지 한국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기 쪽에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해도 친아버지까지 외국인이 아니라고 억지로 우겨댈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한국인 여자와 외국인 남자 사이에 태어난 핏덩이,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벌써 고행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온 것이라는 자기 운명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야릇한 심정이기도 했다.
엄마는 왜 나를 길가에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동무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는 방과 후의 한가한 시간에도 마리아는 교정 잔디밭 옆 벤치에 홀로 걸터앉아 멍하니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 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학생으로서 외국인 교수와 사이가 가까워, 그 첫사랑의 타오르는 불길을 막을 길 없이 예기치도 않은 경우에 아기를 배고, 그것으로 모든 사태는 바뀌어진 것이나 아닐까…… 그렇잖으면 미군 부대에 근무하던 소녀가 외국인 상관의 강요에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몸을 버리게 된 결과의 혹 같은 열매일까…… 생각은 다시 끝없는 꼬리를 이어갔다. 그대로 앉아 있어서는 단 하루의 끼니도 구득할 길이 없어 밤거리에 우글거리는 여인들처럼 돈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판 윤락된 여인의 피에서 맺어진 악의 상징 같은 씨앗일까…… 마리아는 전신에 휘몰리는 전율을 느끼며 그것만은 굳이 부인하고 싶었다.
엄마는 지금도 이 세상 어느 구석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엄마는 아빠가 누군가를 알고 있을 것이 아닐까, 아니 어린 핏덩이마저 함께 죽일 수 없어 남겨두고 자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나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조국이 지닌 비극 속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이름없는 한 떨기의 피해자인 것만 같은 상념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마리아의 가슴속에 뭉쳐져가는 우울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피아노에서 손을 뜨게 하였다.
그는 잠 오지 않는 밤엔 자기 방에 홀로 앉아 늦게까지 책을 뒤적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부서진 마음이 완전한 평정으로 회복되어질 수는 없었다.
마리아의 가슴속엔 무엇인가 따뜻한 애정이 그리워지는 갈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둘레를 맴도는 거센 물결은 그것만으로 멈춰지진 않았다.
아버지가 밖에서 사귄 젊은 여인에게서 아들이 생겼다는 소식이 날아들어왔다. 집안은 발칵 뒤집혀졌다. 어머니의 강짜는 사나워져갔다. 끝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집안에 싸움이 찌는 날이 별로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외박은 공공연하게 잦아졌다. 결국 살림은 파탄이 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몇 달 뒤 새어머니가 아기를 업고 들어왔다.
점점 성숙해가는 마리아에게는 모든 사태가 자기 때문인 것만 같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사랑도 자기에게서 차츰 멀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집안의 화기는 싸늘하게 가시어졌다. 거기에 살림은 꿀려⁶가기만 했다. 다가올 앞날은 어둡게만 느껴졌다.
마리아는 옷을 벗고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브라운 목사, 스티븐슨 씨 부처, 그리고 아들 필립의 영상이 엇갈려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생각은 자기 집과 스티븐슨 씨 집안을 견주어 보는 비교 의식으로 바뀌어졌다. 자기 집도 예전엔 그만 못지않게 잘살았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단란했었다. 지나간 시간이 추억 속에 아름답게 펼쳐져왔다. 자기의 혈통 관계를 전연 모르고 순진하게 자라던 시절, 그때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웠다.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지만, 새어머니의 눈살에는 확실히 자기에 대한 증오의 독기가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사랑이 짙게 나타날수록 새어머니의 눈에는 마리아에 대한 질투가 어려옴을 놓칠 수 없었다.
마리아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경수오빠가 떠올랐다. 그 위에 곧 혜숙의 모습이 겹쌓여 얹혀졌다. 어려서 같이 자란 오빠였다. 모든 사태를 알고 난 후부터 경수는 마리아를 더 감싸고 아껴주었다. 가엾은 동정이었는지도 몰랐다.
경수의 마리아에 대한 애정은 육친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었다고 마리아에게는 생각되었다. 그것이 멀어져갔다. 다른 사람 아닌 혜숙에게로 쏠려져갔다. 그것은 지난봄 경수가 대학에 입학해서부터 현저하게 밖으로 나타났다. 대학생이 된 후의 경수는 전처럼 마리아와 같이 거리를 다니는 것을 즐겨 하지 않았다. 확실히 꺼려하는 눈치였다. 마리아는 경수의 계산을 추측하고 있었다. 혼혈아와 같이 다니는 것에 대한 멋쩍은 심정, 이런 일은 마리아 자신이 경수와 동행했을 때 직접 느낀 일이기도 했다. 경수가 자기 친구에게 마리아를 소개할 때, 띳떳하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해하는 표정, 그러한 야릇한 분위기는 즉각으로 마리아의 가슴에까지 번져왔었다. 그것은 또한 그대로 마리아의 마음속에 무어라 쳐들어 말할 수 없는 비굴감 같은 미묘한 감정의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비하면 경수가 혜숙이와 같이 다닐 때에는 훨씬 떳떳해 보이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미워하건 좋아하건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져주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경수는 물론, 브라운 목사도, 스티븐슨 씨 가족도, 아니 아버지마저도……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아는 슈미즈 바람으로 경대 앞에 섰다. 일요일이라는 것이 한결 마음 가벼웠다. 모든 사람을 만나기 싫었다.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마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몸뚱이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불룩한 가슴팍을 비롯하여 몸 전체에서 풍기는 성숙감이 자신에게도 거세게 느껴져왔다. 같은 나이의 혜숙에 비하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자기가 월등 조숙한 것만 같았다. 날씬하게 큰 키, 쭉 곧은 두 다리, 잘록한 허리, 오뜩한 코, 푸르스름한 눈동자, 모든 것이 서양 사람의 인상 그대로였다. 다만, 까만 머리와 약간 흰 살결만이 집안 식구들의 모습을 닮았을 뿐이었다. 혹시나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될 대로 되려무나 하는 반발 어린 체념 같은 것이 솟구쳐왔다. 학교고 뭐고 다 집어치울까 하는 막다른 생각마저 떠올랐다.
마리아는 자기 가슴팍을 마구 헤살 짓던 경수의 간지러운 촉감을 그리며 맥없이 자리 위에 쓰러졌다.
가야 할 것인가 안 가야 할 것인가. 마리아는 수업 시간 중에도 전날 브라운 목사가 남겨준 문제를 부둥켜안고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전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과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종례 시간이 되었다.
“어저께 집에 가서 모두들 잘 상의하고 왔을 터이니까 우선 지망 학교와 학과를 제1망 제2지망별로 써 내요.”
프린트된 용지를 돌려주고 난 후 담임 선생은 설명을 덧붙였다.
마리아는 지망 대학을 마음속에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니 대학 진학 문제 자체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집에 가 잘 상의하라고 했지만, 자기는 그 문제를 지금껏 아버지 앞에 내어놓지 못했었다. 그만큼 집안에서 자기 혼자만이 날이 갈수록 외톨로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 감을 느꼈었다. 아버지는 어떤 기회를 타든지 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기에 영문과를 택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은 있지만 확정된 결말을 지은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의사가 적당한 시기에 자기를 아주 외국으로 따돌려 보내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나 아닌가 하고, 이즈음의 마리아는 자기대로의 곡해를 해보는 때도 없지 않았다. 사실 지금의 마리아에게는 진학 문제가 그렇게 절실하게 관심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동무들이 서둘러가며 다 적어 낼 때까지 마리아는 우두키니 앉아 있었다. 끝내 그는 아무것도 적어 내지 못했다.
대학 그것도 마리아에게는 귀찮은 하나의 관문만 같았다. 여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입학시험에서부터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었다. 입학 후의 동급생들도 얼굴이 서로 익을 때까지는 자기를 보면 귓속말들을 소곤대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러다가 한 해가 가면 또 신입생이 들어와, 낯선 그들은 다시 자기에게 유독 주의를 끄는 눈길을 보내왔었다. 그러한 일은 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동물원 안 철사 그물 속에 갇힌 구경거리의 원숭이 같은 심정이었다. 자기를 예쁘다거나 멋지다고 칭찬하는 말까지도 고깝게만 들려 왔다.
그러나 이제 다 자란 처녀가 대학까지 가서 그러한 구경거리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먼 곳으로 혼자 떠나버렸으면 하는 허망한 심정에 사로잡히기만 했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는 그런 곳으로……
영어 회화의 특별 활동 시간이 끝난 다음 마리아는 브라운 목사와 함께 교정으로 나왔다.
“참 마리아, 전번 얘기는 잘 생각해봤어?”
자기의 심중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브라운 목사의 호의가 고마웠다. 그러나 마리아는 즉석에서 대답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결정짓지 못했어요.’:
“그래, 좀더 잘 생각해봐요.”
“네.”
“나로선 강권하고 싶지는 않아. 마리아의 생애를 좌우하는 문제인 만큼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사에 달린 거야. 하지만 미스터 스티븐슨의 가정은 모두 인품이 좋구, 마침 가족도 단출하니까. 또 그쪽에서 마리아에게 퍽 호감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마리아는 대답 없이 묵묵히 걸었다.
“그분들이 크리스마스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모양이야. 그래서 빨리 결말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기에…….”
마리아에게는 솔깃하게 들렸다.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낯모르는 먼 곳으로 곧 떠나간다는 것이 구미를 당겼다.
“아무래도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가 아닌 바에야 다 정붙이기로 가겠지.”
그 말이 마리아에게는 오히려 가슴이 아픈 자극을 주었다. 떠나간 어머니나 지금 아버지는 친자식과 조금도 다름없이 자기를 아끼고 키워주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브라운 목사 앞에서 선뜻 노하고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죄스럽게 여겨지기만 했다.
“남들은 친부모와 떨어져서 일부러 외국 유학도 가는데…….”
브라운 목사의 선의에 찬 권유는 아무런 반대 의사도 표시할 수없이 마리아를 죄어오기만 했다. 그것은 모두 자기의 앞날을 생각해주는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되어 고맙기만 했다.
“웬만하면 유학가는 셈치고 결정해버리지.”
그 성의에 보답하는 뜻으로라도 마리아는 무엇이든 가부를 대답해야만 했다.
“네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며칠만 더 여유를 주세요.”
브라운 목사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좋아요, 잘 생각해서 후회 없도록 해요.”
브라운 목사와 갈라진 마리아는 그길로 혜숙이를 찾아갔다.
혜숙의 방 문을 열고 들어선 마리아는 주춤 멈춰 섰다. 거기엔 경수가 와 있지 않는가. 순간, 상기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마리아는 태연하게 경수를 대했다.
“나, 미국 간다……”
막연히 둘을 향해 마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사실은 그 문제에 대해서 혜숙의 의견을 들어보고, 자세한 상의를 하러 온 걸음이었다. 그것이 혜숙이와 경수가 함께 있는 장면에 맞닿자 가벼운 질투 같은 심정이 그로 하여금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그런 말을 불쑥 내뱉게 했다. 말이 떨어지자 입˙빠른 자신을 내심 나무랐다. 그와 함께 상대의 약점에 화살을 던진 것만 같은 흐
뭇한 통쾌감이 뒤따르기도 했다.
“참말?”
경수는 급습을 당한 것같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반문해왔다. 이태원에 같이 다녀온 혜숙이는 반신반의하는 눈매로 마리아를 바라보다가,
“너, 참말이니?”
하고, 경수의 뒤를 따랐다.
“그럼, 예스라고 했어.”
마리아는 계속 우기고 나갔다. 그러면서도 울음이 복받쳐 견딜 수 없었다.
“계집애도. 거짓말……”
혜숙이는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러나 경수는 충격이 컸던 모양으로 계속 긴장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곧 떠날지도 몰라.”
“언제?”
“크리스마스 전에.”
“참말?”
“아직 몰라. 다 후라이⁷야.”
마리아는 깔깔 웃었다.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뭐, 대학 졸업하구 가두 되지 않아?”
그제야 경수가 좀 풀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 말 속에는 아직도 얼마간의 자기에 대한 미련이 감싸여 있다고 마리아는 느꼈다.
“날 대학에 보내주겠어, 오빠?”
마리아는 짓궂게 오빠에 힘을 주어 물었다.
“주지 않구.”
경수의 대답은 힘없이 맥 빠져 있었다.
어쩌면 이들과 아주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생각에 마리아는 브라운 목사와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다 듣고 난 경수는 긴 한숨을 내뿜었다. 혜숙이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아, 네 생각은?”
마리아는 혜숙에게 물었다.
“글쎄, 좋은 기회니까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오빠는?”
“나는 찬성도 반대도 못 하겠어. 좀더 생각해봐. 아무 데문 사람이 못 살라구……”
경수의 말에는 아쉬운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자기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동심의 애정으로 돌아가는 심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이 깃든 진정이라고 마리아에게는 느껴졌다. 자기 자신이 사실 이상으로 경수를 앞질러 곡해한 것만 같은 자책이 휘몰려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화제는 끝까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리아는 오래간만에 가슴속을 활짝 털어놓은 것만 해도 거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마리아는 자기 자신의 태도를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자꾸만 발목을 끌어 잡는 것 같은 끌림에 얽매여 있는 심정이었다.
마리아는 최후의 단정을 내렸다. 그는 스티븐슨 씨의 양녀로 갈 것을 브라운 목사에게 확답했다. 일단 결정하고 난 뒤는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대답을 해놓고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몇 번이고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길 없었다. 또한 아버지에게 모든 경위를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양녀로 간다는 것,
그것은 이십 년 가까이 길러준 아버지에게 대한 최악의 배신으로 여겨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한다면 아버지는 절대 허락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장학금을 얻는 단순한 유학이라면 몰라도 마리아 자신으로도 양녀로 간다고 이야기할 용기도 면목도 없었다.
“아버지, 저 미국으로 유학 가게 됐어요.”
마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꾸며댔다. 그러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야 할 자신이 먼저 눈물이 앞질러 나왔다.
“응, 그래?”
아버지는 놀라면서도 웃음을 띠며 기뻐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게 됐니?”
마리아는 가슴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애두, 울기는 왜?”
“브라운 목사님이 알선해주셨어요.”
마리아는 목멘 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거 참, 고마운 분이로군. 나도 좀 트이기만 하면 하고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단다.”
마리아는 격하여 그 이상 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끝말에서 벌써 자기의 내막을 알아차린 것만 같은 예감을 느껴서 였다.
“울지 말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렴.”
굴곡 많은 흘러간 긴 시간을 주름 잡듯이 아버지의 한숨은 몇 토막으로 끊기었다.
그러한 아버지 앞에서 마리아는 그 이상 거짓말을 꾸며댈 수는 없었다. 그는 훌쩍거리며 전후 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나서야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긴 침묵 끝에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고마운 분들이다. 하지만 경제적 조건이 좀 낫다구 해서, 나 이상의 애정을 너한테 쏟을 사람이 있겠니?”
아버지는 한참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너를 꼭 행복하게 해준다구 보장할 수야 있겠니?”
아버지의 말은 그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가슴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리아는 숙였던 머리를 그대로 아버지 무릎 위에 떨구었다.
브라운 목사의 연락을 받은 필립은 거의 매일같이 마리아를 학교로 찾아왔다. 처음 한두 번은 마리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따라 이태원 외인촌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이 거듭되자 마리아는 방과 후 교문 앞에 그 집 차가 와 있는 것을 보면 마음속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쪽에선 자기 식구가 될 확답을 받은 이상 모든 편의를 보아주려고 노력하지만, 마리아는 그것이 점점 짐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와 있는데 핑계를 대고 회피하는 도리는 없었다. 마리아가 스티븐슨 씨 댁으로 아주 떠나가야 할 예정 날짜가 다가왔다.
가야 할 것인지, 안 가야 할 것인지, 모든 일이 결정적으로 되어 있는 지금에 와서도 마리아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슨 씨 댁으로 가면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분위기 속에서 자기는 주체적인 자기 의사로 움직인다기보다 그들 세 가족 속에 끼인 인형 같은 존재라는 감이 없지 않았다. 온 식구가 자기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쓴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구속에 얽매여 있는 느낌이었다. 훨훨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새가 장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부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네 번째의 어머니를 맞아야만 하는 자기, 마리아는 앞이 아찔해왔다.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브라운 목사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스티븐슨 씨 가족에 대한 약속을 위반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십 년의 인연으로 얽매인 아버지의 관심, 이질적인 육체에 대한 비굴감을 느끼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경수의 관심, 그리고 학교나 사회에서 접하는 부질없는 관심들, 이러한 모든 것에서 마리아는 해탈하고 싶어졌다.
‘꼭 너를 행복하게 해준다구 보장할 수야 있겠니?’
아버지의 말이 등골에 전율을 일으켜왔다.
자기를 행복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거나 하는 모든 관심에서 잠시나마 떨어져 있고 싶었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에 대한 자기만의 관심만으로 지쳐진 심신을 휴식 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마리아는 집을 나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국 자기에 대한 책임은 자기 홀로 지고 자기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끝-
2016년 7월 6일 ㅇ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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