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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스페인내전 / 민족주의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전쟁 체험 중에 빠질수 없는 것 하나는 사람한테서 풍겨나오는 지독한 냄새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책들에 나오는 전쟁 묘사는 대체로 정확하다. 총탄은 맞으면 아프고 시체는 썩어 악취를 풍기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너무 무서워 바지를 적시기도 한다.
오늘날 일반 대중의 견해가 왔가갔다하는 묘한 현상은 말하자면 수도꼭지 열리고 닫히듯 정서가 돌면하는 것은 라디오의 최면 탓이다. 한편 지식인들의 경우는 상당 부분 돈과 한낱 신체적 안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쟁은 악이며 차악인 경우도 흔히 있다.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하며 칼을 들지 않은 자는 악취 진동하는 병으로 망하는 것이다. 이런 케케묵은 소리를 굳이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간 임대소득이나 아지로 먹고사는 이들의 자본주의가 우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인었던 것은 잔악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평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증거 조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적의 잔악행위는 믿으면서 자기편의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진실은 적이 말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1937년 난징 대학살 vs 1942년 홍콩 학살)
스페인 공화국 정당들 간의 권력투쟁인 스페인 내전의 대체적인 진실은 꽤 단순하다. 스페인의 부르주아들이 노동운동을 분쇄할 기회를 발견하여 잡았고 나치와 세계 각지에 있는 반동 세력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어떠한 사건도 신문에 정확히 보도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었는데 그러다 스페인에 가서 처음으로 신문이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을 보도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달리 말해 나는 역사가 실제 일어난 대로가 아니라 이런저런 ‘당의 노선’에 따라 일어났어야 하는 대로 기록되는 것을 본 것이다.
나치와 파시스트 들에게 열려 있는 선전 노선은 자신들을 러시아의 독재 정부로부터 스페인을 구하는 기독교 애국지사로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자면 스페인 공화국 정부 시절은 긴 학살극에 불과했다는 식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었고 러시아의 개입 수준을 엄청나게 과장할 필요도 있었다. 프랑코의 열성당원들이 사실로 믿은 바는 러시아군 병력 추정치는 거의 50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스페인에 러시아 군대는 없었다.
이런 것들이 나로서는 대단히 두렵다. 이 세상에서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어떤 식으론 기록될까? 프랑코가 권좌를 계속 유지한다면 그가 지목한 이들이 역사책을 쓸 것이고 있지도 않았던 러시아 군대가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종임을 암시하고 있는 이 합의된 공통의 기반, 바로 이것을 전체주의가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나치의 이론은 ‘진실’이란게 존재한다는 걸 명시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를테면 ‘과학’이라는 것도 없다. ‘독일 과학’ ‘유대인 과학’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다.
검은색이 내일은 흰색이 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비할 안전장치는 우리가 아무리 진실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진실은 우리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듯 살아 있다는 것과 자유주의적 전통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 또는 여러 파시즘들의 연합체가 온 세상을 정복할 경우 이 두가지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영국에 사는 우리는 그런 유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전통과 과거의 안전으로 인해 결국엔 모든 게 잘될 것이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절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감상적인 믿음을 갖게 된 까닭이다. 수백년 동안 결국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문학에서 자양분을 얻어온 우리는 악은 언제나 결국 저절로 망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고 있다. 평화주의는 대체로 이런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프랑코에 대한 저항의 중추는 스페인 노동계급, 특히 도시의 노동조합원들이었다. 노동계급은 파시즘의 적들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다. 그것은 단지 노동계급이 사회를 인간답게 재건함으로써 가장 많은 이익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때 관찰되었던 특징 하나는 지식인들 중에 변절자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는 점이다. 지식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사람들이지만 상황이 절박해지면 상당수가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디.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스페인내전의 결과는 런던, 파리, 로마, 베를린에서 결정되었으며 아무튼 스페인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좌파가 평화주의를 견지해온 것이 큰 핸디캡이 되었다. 파시스트가 이긴 건 그들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식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반대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정치 전략도 그런 격차를 상쇄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페인내전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대목은 열강들의 대응이다. 이 전쟁은 사실상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위해 승리를 안겨준 싸움이었다. 두 나라의 동기는 명백했다. 그에 비해 프랑스와 영국의 동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의 지배계급은 스페인을 프랑코와 나치에게 넘겨주기 위해 더없이 비열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인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들이 친파시트 세력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게 정답이다. 프랑코를 밀어주면서 그들은 무슨 복안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며 아무 계획 없이 그랬는지도 모들 일이다. 아무튼 스페인내전은 나치는 자신들이 무얼 하는지 알았고 그 적들은 몰랐다는 점을 입증해주었다. 공화국의 남루하고 무기 없는 군대는 2년 반을 버텼고 이는 적들이 예상한 것보다 확실히 긴 기간이었다.
인류의 진짜 문제에 접근하자면 그전에 궁핍과 가혹한 노동부터 철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노동계급의 ‘물질주의’는 얼마나 정당한가!
민족주의 비망록
우리의 심리 습성 중에서 워낙 두루 퍼져 있어서 거의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아직 이름은 없는 게 존재한다. 그런 것 중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나는 민족주의nationalism 라는 단어를 골라봤다. 내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인류를 곤충 분류하듯 나눌수 있으며 수백만이나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싸잡아 좋으니 나쁘니 하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습성을 뜻한다. 또한 자신을 단일한 나라 또는 다른 집단과 동일시 하되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습성을 뜻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보다 확대된 의미의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 유대주의, 반유대주의, 트로츠키주의, 평화주의와 같은 운동과 경향 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정부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조국에 대한 충성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집단이 실제로 꼭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분명한 예로 유대민족, 이슬람, 기독교계, 프롤레타리아, 백인종을 들 수 있는데 모두 열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의 대상이다. 민족주의자는 주로 ‘위신 경쟁 competitive prestige’의 차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를 특히 동시대 역사를 거대 세력들의 끊임없는 부침으로 보며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자기편은 상승세에 있고 가증스러운 경쟁 상대는 하강 국면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현상으로 여긴다.
영국의 경우 관련 있는 사람들의 숫자만 놓고 볼 때 가장 압도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는 아마도 구식의 영국 국수주의일 것이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형태의 민족주의가 공산주의란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자는 소련을 자신의 조국으로 여기며 러시아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러시아의 국익을 진작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강박증-민족주의자는 가능한 한 자기 세력 집단의 우월성 외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누가 그의 집단을 조금이라도 비난하거나 라이벌 집단을 칭찬하는 기색을 보이면 날카롭게 쏘아 붙이지 않고는 배기질 못한다. 모든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네 언어를 퍼뜨려 라이벌의 언어를 손상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불안정-전이된 민족주의는 지난 50년 또는 100년 동안 문단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통된 현상이 되었다. 그러한 전이의 대상은 라프카디오 헌(일본시민이 된 저술가)에겐 일본이었고 칼라일과 그의 많은 동시대인들에겐 독일이었으며 우리 시대엔 대개 러시아다. 여러 해 동안 숭배받던 어떤 나라나 집단이 느닷없이 혐오스러워질 수 있으며 곧바로 다른 애정의 대상이 그 자리를 대신 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에게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독특한 심리, 즉 충심의 대상이 변할 수 있으며 가상의 것일 수도 있다는 점뿐이다.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모든 민족주의자들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가진 유사점을 무시하는 능력이 있다. 영국의 보수당원이라면 유럽에서의 민족자결권은 옹호하겠지만 인도의 그것에는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한 채 반대할 것이다.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주체에 따라 선악 여부가 판가름되며 ‘우리’ 편이 저지른 일이면 어떠한 무도함이라도(고문, 인질 이용, 강제노동, 대대적인 추방, 재판 없는 투옥, 날조, 암살, 민간인 폭격) 도덕적으로 색깔을 못 바꿀게 없다. <뉴스 크로니클>은 충격적인 야만성의 사례로서 독일인들에게 목매달려 죽은 러시아인들 사진을 싣더니, 1~2년 뒤에는 열렬한 찬성의 뜻을 표하며 거의 똑같이 러시아인들에게 목매달려 죽은 독일인들 사진을 버젓이 실었다.
많은 영국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몰살당한 일에 대해 들어본 바가 거의 없다. 그들 자신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그런 엄청난 범죄가 그들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장제스는 1927년에 공산주의자 수백 명을 산채로 끓는 물에 빠뜨려 죽인 적이 있지만 10년 안에 좌파의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세계 정치의 재편성으로 그는 반파시스트 진영에 속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끓여 죽인 사건은 ‘대수롭지’ 않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무관심은 세상의 일부가 다른 일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는 바람에 더욱 부추겨지며 그 때문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면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정말 벌어지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경우도 흔히 생겨나곤 한다. 게다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반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황당한 믿음을 고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무엇하나 입증되지도 반증되지도 않기에 더없이 엄연한 사실도 뻔뻔히 부인해버리는게 가능해진다. 모든 민족주의 논쟁은 토론반 학생들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결판이 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세력과 정복을 꿈꾸며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 민족주의) 1.신토리주의-신토리주의 진짜 원동력은 영국의 세력과 영향력이 기울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다.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듯한 신토리주의자는 반러파이되 때로는 반미파인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2.켈트 민족주의-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민족주의는 차이점은 있어도 반영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켈트족이 색슨족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종주의 색조를 강하게 띤다. 3.유대주의-호의적인 모든 영국인들도 나치의 박해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친유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민족주의적 충심이나 유대인의 태생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은 이방인들에게선 발견하기 힘든 현상이다.
(전이된 민족주의) 1.공산주의 2.정치적 가톨릭주의 3.인종차별 감정-지식인들 사이에선 피부색에 대한 반감이 역적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다시 말해 유색인종의 타고난 우월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4.계급차별 감정 5.평화주의-평화주의자는 대부분 정체불명의 종파에 속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에 반대하며 그 이상은 자신의 사고력를 진전시키지 않는 쪽을 택한 인도주의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지식인 평화주의자들 중 소수에게서 나타나는, 인정되진 않지만 실질적인 동기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전체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평화주의자의 선전은 주로 한편이 상대편 못지않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프랑스가 함락되자 프랑스의 평화주의자들은 대부분 나치 편이 되었다. 평화주의를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 세력과 성공적인 학대에 대한 동경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부정적 민족주의) 1.영국혐오증-지식인들 사이에선 영국을 비웃으며 약간의 적대성을 보이는 게 어는 정도 필수적인 태도가 되었으며 이번 전쟁 동안 그런 정서는 지식인들의 패배주의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추축국 세력이 이길 수 없다는게 분명해진 다음에도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2.반유대주의-나치의 박해 때문에 유대인 편을 들지만 반유대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까지 만연해 있는 듯 보이며 당장은 침묵하는 게 최선이라는 공모 때문에 더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3.트로츠키주의-무정부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심지어 자유주의자까지 포함할 정도로 느슨하게 쓰이는 용어다. 여기서는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주된 원동력으로 삼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란 뜻으로 쓰고자 한다.
민족주의적 심리 습성이 너무 만연해 있어 여러 가지 절박한 문제들(인도, 폴란드, 팔레스타인, 스페인내전, 스탈린의 대숙청 재판, 미국 흑인, 독소불가침조약 등등)이 합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픈 데를 찌르는 말을 해보라. 아무리 공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해도 갑자기 고약한 열성 당원으로 돌변할 수 있으며 상대를 제압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자기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얼마나 많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지에 대해선 무심해질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지식인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전쟁의 진척 상황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더 많으며 그것은 그들이 당파적인 감정에 더 휩쓸렸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옳은 것 같다.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해도, 다른 경우엔 비난했던 범죄가 똑같이 저질러졌다는 걸 알았다 해도, 그것이 부당하다는 걸 지적인 차원에선 인정한다 해도-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충성이 개입되면 연민이 기능을 멈춰버리는 것이다.
그런 애증은 우리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우리들 대부분이 가진 기질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 기질을 없앤다는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은 가능하며 그런 투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노력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