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시인 김소월(金素月, 본명 김정식, 金廷湜)
그의 영정 사진을 기초로 1990년 제작된 초상화. 본명: 김정식(金廷湜, Kim Jung-sik) 호: 소월(素月) 본관: 공주 김씨(公州金氏) 출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량동 또는 같은 면 덕인동 (現 평안북도 구성시 금산리) 사망: 1934년 12월 24일(향년 32세)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現 평양시 방현동) 학력: 남산보통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중퇴 (현 서울 오산고등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현 배재고등학교) 도쿄상과대학 전문부 중퇴 (현 히토쓰바시대학) 직업: 시인
1. 개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진달래꽃'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냈다.
2. 생애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 (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하며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는데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왔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오산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던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던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 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았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 (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했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 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 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할아버지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하며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가 아편을 먹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가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3. 기타 김소월이 서정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보니 현실에 대해선 무감각할 것 같은 예술가적 이미지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에 대한 고뇌와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적은 글이 보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이후 발표한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 쓰기를 본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 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소리다. 민족시인이자 한국 서정시의 원류로 불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역시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다. 김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다. 김소월이란 이름 석자와 인지도는 매우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 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김소월의 취향 때문인데 아들 김정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소월은 살아생전에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도 있는 오산학교 재학 시절의 사진이 김정호 씨가 집에서 본 김소월의 유일한 사진일 정도였다고 한다. 참조 이렇다 보니 김소월의 이름과 시속의 화자들이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어 오늘날에도 가끔 그를 여류시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는 북한에 속하기 때문에 남북분단 이래 남한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으며 심지어 21세기에는 다른 의미로 더 유명해졌다.
4. 작품 목록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먼 후일 초혼 접동새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 三水甲山韻)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진달래꽃: 1999 수능 출제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안성현과 김광수가 각각 곡을 붙인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초혼 먼 후일 제이 엠 에스 : 이 사이비 교주가 절대로 아니다. 산(山) : 1994-1 수능 출제 삼수갑산 : 1996 수능 출제 산유화 길 개여울: 작곡가 이희목이 곡을 붙여 가수 김정희가 1967년 처음 불렀고, 이후 1972년 정미조가 리메이크해 히트했으며, 2017년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을 통해 다시 한 번 리메이크 되었다. 가는 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배철수가 속한 그룹 활주로가 곡을 붙여 노래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밴드 라스트포인트가 곡을 붙여 만들었다. 1977년 TBC 젊은이의 가요제 장려상 수상. 밤: 장범준이 이 시를 바탕으로 자작곡을 만들었다. 앨범에 수록된 곡과는 다른 곡으로 일명 '김소월밤'이라고 불리는 버전이다.
5. 가족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실단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한국전쟁 도중 요절했으며, 3남 김정호는 조선인민군으로 남한에 왔다가 포로가 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재입대하였고 전쟁 후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김소월의 시에 대한 지적재산권조차도 없으며 시인의 아들이라는 혜택도 전혀 못 받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의 병수발을 평생 들어줬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남한에 아버지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고 싶어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 하고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녀 김은숙과 손자 김영돈,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엠피그룹측에서 광고를 낼 때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준 돈 약간뿐이라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소월 문학관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2003년 소설가 겸 한의사로 유명한 (사)새한국문학회 경암 이철호 이사장이 김소월의 후손들로부터 2003년 김소월 문학기념사업의 모든 권한을 일임받아 2019년 사재 40억원을 들여 충북 증평군에 ‘소월·경암 문학관’을 개관했다.
6.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금관문화훈장 약장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