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의 이중생활 / 김혜순
엄마가 유리 믹서에 흰 침대들 가득한 호스피스를 넣고 곱게 간다
아니면 거대한 유리 믹서가 엄마를 갈고 있나?
호스피스엔 햇빛에 떠오른 먼지처럼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비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엄마는 유리 믹서에 하늘을 넣고 갈 때도 있고
바다와 산을 넣어 갈 때도 있다
이제 엄마는 밀가루 쌀 야채 생선 같은 것은 상대 안 한다
엄마는 지구라는 큰 시계를 갈아 초침을 만드는 것처럼 큰 것만 간다
다 분쇄해선 나에게 한 컵 주지도 않고
호스피스 할머니들하고만 나눠 먹는다
그게 무슨 묘약이라고
내가 그 간 것을 훔쳐 먹었더니
몸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막 동굴의 박쥐가 되는 느낌이 이럴까
죽기 전에 이미 죽게 되었고
나무 산 바다가 이미 친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흰 눈의 사전엔 희다라는 말이 없었고
파란 바다의 사전엔 파란이 없었다
흰 눈과 바다에 대한 나만 아는 앎으로 몸이 가득 차올랐다
안경을 다시 쓰면 이 모든 게 꿈이라고 할까 봐 안경을 벗었다
모든 단어의 문장은 한 음절로 치환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음을 버린 모음 한 개였다
모음 한 개가 방 하나를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가
다시 다른 모음 하나가 방을 채웠다
세상에는 모음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밤에
쥐가
잠에 빠진 흰 토끼를 갉아 먹는다
토끼장 밖으로 검은 피가 쏟아진다
쥐가 죽통에 빠진 돼지 새끼를 갉아 먹는다
(이제 막 자궁 속에서 구워진 살덩어리들
푸들푸들 첫 공기에 떠는 아가들
기름덩어리들
맛있고, 따뜻하고, 물어 뜯으면 피 흘리는 것들)
쥐가 요람에 든 새 아가를 갉아 먹는다
아가 엄마는 식당에 설겆이하러 갔다
쥐가 이제 땅 속에 갓묻힌
싱싱한 시체의 몸 속을 드나든다
훔치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쥐가
우리들 그림자를 뭉친 다음 입김 불어 눈 뜨게 한 쥐가
발가락 사이 무좀 아래 숨죽였던 쥐가
게걸스레 처먹다가 바스락 소리에도 꼬리를 말아올리는
쥐가
감시용 카메라 뒤에서
몸을 섞는 우리들 다 봐 버린 쥐가
우리들 번쩍이는 표면 속
보드라운 살갗 어둡게 미끈거리는 내장 속
삐걱거리는 마룻장 아래 열 개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사이
비와 바람의 발자국 소리 숨겨둔 두개골 그 아래
눈먼 빛의 발치를 들치고 들어가본 그 아래
몇 십년째 내 앞에서 숨죽인 죽음의 문 그 뒤켠
내 열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이를 가는
쥐가
이 밤에
레인 피플
밤비가 찬찬히 빌딩을 닦고 있다.
가끔씩 내려오는 하늘 그림자는
언제나 투명하다
우리 모래 나라의 깃발도
조금씩 깨끗해지고 있다
투명하게 울고 있는 비
하늘 나라엔 레인 피플이 사는데요
그들은 너무 울고 울어서
결국 모두 사라지게 된대요
물이 다 빠지면 꼭 우리같이 생겼대요
우산을 치우고 잠시 올려다보면
저 멀리 롯데 호텔도
손을 들어 감은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다
모래 기둥이 조금씩 무너져내려 길가에 쌓이면
투명한 그림자가
그것들을 쓸어내가고 있다
내 팔짱을 풀고 그가 운다.
밤비가 닦아 놓은
길 위에
눈물이 덜 마른 그가 잠깐 서 있다 사라진다
내가 찬찬히 닦여진다
마라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기어나갔다
하, 하, 하, 하 웃으며 달리는
밤 기차의 입술 가장자리에
나무들이 박혔다.
따라오던 바람이
밤 기차의 머리채를
송두리째 강바닥에 던졌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시리게 기어 나갔다.
안개가 목 위로 차올라 왔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 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미라
나는 죽어서도 늙는다
나는 죽어서도 얼굴이 탄다
만약 한 사람의 일생을 지구 한바퀴 도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사하라에 있다
폐경의 바다가 다 마르고
조개들이 타오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손목을 잡던 수천의 손가락들이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부서져 밟힌다
감싸안은 누더기들이 부서져 날린다
감은 눈 온다
백마
갑자기 내 방안에 희디흰 말 한마리 들어오면 어쩌나 말이 방안을 꽉 채워 들어앉으면 어쩌나 말이 그 큰 눈동자 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백마 안으로 환한 기차가 한 대 들어오고 기차에서 어두운 사람들이 내린다 해가 지고 어스름 폐가의 문이 열리면서 찢어진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시커먼 그녀가 뛰어나오고 별이 마구 그녀의 발목에 걸린다 잠깐만 기다려 해놓고 빈집에 들어가 농약을 마시고 뛰어 나온 그녀는 뛰어가면서 몸 속으로 들어온 백마를 토하려 나무를 붙들지만 한번 들어온 말은 나가지 않는다 말의 갈기가 목울대를 간지르는지 울지도 못하고 딸꾹질만 한다 말이 몸 속에서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그 희디흰 말이 몸 속에 새긴 길들을 움켜쥐고 밤새도록 기차 한 대 못 들어오게 하면 어쩌나 농약이 성대를 태워버려 지금껏 말 한마디 못하고 백마 한 마리 품고 견디는 그녀에게 물으러 가야 하나 어쩌나 여기는 내 방인데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스리 말 한 마리 우두커니 서 있으니 어쩌나
불쌍히 여기소서
삼천 개의 뛰는 심장이
전동차 열 량을 끌고 간다
삼백 개의 따스한 심장이
지하로부터 무쇠 에스컬레이터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다시 삼만 개의 고린내나는 발가락이
저 푸른 하늘 아래
저 쉼없이 흐르는 강 위에
전동차 열 량을 올려놓는다
만원 전동차 안, 내 심장 일심실 곁에서
삶으면 한 움큼도 안 될
쉰 머리칼의 할머니 분홍빛 심장 이심실이
뛴다 코티분 분통 터진 것보다
더 화한 심장이 뛴다
저 검은 머리털 아래
저 하찮은 에드윈, 언더우드 아래
저 붉은 심장들이
숨어서 뛴다
오우 하나님 보시옵소서
따뜻한 속꽃 삼천 송이로 지은 심장 만다라
지금 한강 노을 속에 잠시
떴나이다
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들
화가가 세필을 흔들어
자꾸만 가는 선을 내리긋듯이
그어서 뭉그러지려는 몸을
자꾸만 일으켜세우듯이
뭉개진 몸은 지워졌다가
또다시 뭉개지네
카페 펄프의 의자는 욕조처럼 좁고
저 사람은 마치 물고기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입술 밖으로 퐁퐁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네
저 사람은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네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고
나 전화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 싶네
나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말을 거네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더러운 걸레 같은 내 혀로
있으면 좋을 그 사람의
젖은 머리를 닦네
탐조등은 한번씩 우리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이제 몽유병자처럼
두 손을 쳐들고
물로 만든 철조망을 향해
걸어나가네
쇠줄에 묶인 개처럼
저불쌍한 사랑 기계들
아직도 짖고 있네
빗방울 하나
저 머나먼 공중에 벙어리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온몸의 구멍을 내 눈물이 다 막아버려서
구멍이 하나도 없는 방이 하나 떠 있어요
걸을 때마다 바닥이 물컹물컹 소리치는 방
내 피부 같은 물 도배지를 바른 방
나는 그 방에다가 밥상을 차렸어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면
밥상 위의 그릇들이 벌벌 떨었어요
그래도 나는 벽장 속에다
갓 태어난 물방울 아가들을 숨겼어요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누르기만 해도
기둥조차 없어 저절로 터져 버릴 방
천장도 창문도 없어 하늘이 그대로 눈부시지만
내 날개짓 멈추어 버리면 한없이
곤두박질쳐버릴 그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너를 사랑하는 방
그 방이 하나 한없이 떨면서 떠 있어요
첫댓글 눈과 머리로는 글자를 읽는데 머리 속은 백지...^^
김혜순시인이 미국에서 번역시로는 처음으로
상을 탔더군요.
상 이름은 생각안나네요.
시창작이론 참고자료 란을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