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였음을 밝힌다.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음에서 나온 의리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이 되어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눅 22: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라고 번역하며 RSV는 '이만큼 해두라'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즉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투'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라'는 뜻의 '에아오'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하는 행위에 있다. 즉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어투로 묘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출 21:24)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는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23:34).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바요나 시몬'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센'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 18: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