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jh
살맛 나는 세상, 쌀 맛 나는 세상
쌀을 주식으로 삼는 민족은 쌀을 많는 것의 척도로 삼는다. 한 가정의 경제력도 쌀을 바탕으로 측정하고 사람의 인심이나 성품도 쌀로 측정한다. 그래서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생기고 천석꾼 만석꾼이란 말이 생겼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처럼 쌀을 주식으로 삼고 오래 세월 농사를 위주로 살아온 민족에게는 쌀에 얽힌 얘기가 숱하게 누적되어 있는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니 예전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나무에 탐스럽게 핀 꽃을 흰쌀로 지은 이밥으로 보아 '이밥 나무'라는 명칭이 생겼겠는가. '여자로 태어나 처녀로 시집갈 때가지 쌀 한 말을 못 먹는다'는 말도 당대의 궁핍을 반영하는 극단적인 척도다. 쌀에 한이 맺힌 영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요즘의 풍요가 왠지 모르게 죄스로워진다. 민생고란 말을 모르는 세대는 이런 말을 판타지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얘기로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밥 먹으로 가자'는 말 대신 '민생고 해결하러 가자'는 말을 일상으로 사용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쌀로 놓고 보자면 지금은 태평성대가 분명하다. 기뭄과 흉년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고 지금은 무슨 쌀을 먹을가를 고심하는 시대이다. 쌀도 그냥 쌀이 아니라 인삼쌀, 씰눈쌀, 클로렐라쌀, 현미쑥쌀, 유산균발효쌀, 향기쌀, 우렁이쌀 등 웰빙 시대의 진풍경을 보여주는 듯 한껏 고급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조상님이 저승에서 이 풍경을 본다면 허허, 껄껄, 참으로 '살 맛 나는 세상'이 왔다고 탄성을 터뜨릴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 도처에는 쌀을 '사는' 게 아니라 '팔러'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쌀을 사지 못하고 쌀을 팔아야 하는 처지, 그것이 쌀에 깃든 속 깊은 역설이자 은유다.
쌀독이 바닥나는 우리네 조상은 궁색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쌀을 사야 하는 처지가 분명하지만 그 형편을 드려내고 싶지 않아 외려 '쌀 팔러 간다'는 표현을 꾸며낸다. 가정의 궁핍을 표시하는 말, 예컨데 '쌀독이비었다'든가 '쌀 사러 간다는 말 대신 '쌀 팔러 간다'고 함으로써 조상님께 말로라도 위안을 주고자 한 것이다. 쌀이 떨어져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되어 '쌀독이 비었다' '쌀이 떨어졌다. '쌀을 사야 한다'.고 한탄하는 후손을 보면 조상이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아직도 세상에는 이팝나무를 보며 하얀 이밥을 먹어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아직도 세상에는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 먹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 아예 먹지 못한 채굶어 죽 사람도 숱하다. 반면 먹을 게 넘쳐 밥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밥을 안 먹고 다른 것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쌀농사가 돈 되지 않는다고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 사람, 쌀농사 작파하고 돈 되는 작물 키우껬다고 논 팔아 치운 사람도 많다. 이제는 누구도 쌀이 곧 살이고 쌀이 곧 목숨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쌀이 넘처나고 음식 쓰레기가 넘처나도 세상에는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살맛 나는 세상, 쌀 맛나는 세상을 위해 가던 걸음 멈추고 우리네 전답이 펼처져 있던 자리를 숙연하게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다. 그 자리에 아파트 들어서고 고속도로 뒤 덮였으니 쌀이 곧 생명이라 여기던 조상님은 저승에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는가. 어느 시인의 꿈에 나타난 아버지 호통이 가슴에 통렬하게 와 닿는다.
후레새기! / 십이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 거두절미하고 귀싸대기부터 올려붙었다 / 이놈아, 어쩐지 제사밥에 뜬내나더라 / 지독한 흉년 들어 정부미 타먹느라 / 똥줄이 나는 줄 알았더니 / 어허야, 네놈이 귀신 눈을속였구나 / 이런 쳐죽일 놈!뭐라꼬? / 쌀농사 돈이 안 된다꼬? / 물러준 땅 죄다 얼라들 주전부리나할 / 복숭아 포도 그딴 허드렜 농사나 짓고 / 뭐? 쌀을 사다 처먹어? / 그것 참, 허허 그것 참 / 이노옴, 내 논 내 밭다 내놔라아! - 이준기 시, 통쾌한 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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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우 (소설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쥴리앙 뒤프레 작품
자연을 담은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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