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바의 Hippolytus홀에 있는 모자이크 바닥 장식(6세기)
마다바의 Hippolytus홀에 있는 모자이크 바닥 장식(6세기)
마다바 지도는 6세기 비잔틴 성당 바닥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성지지도를 모자이크로 그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지 지도이며 특별히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다바는 인구가 약 6만 명의 요르단 왕국 마다바주의 행정 수도이고 요르단에서 다섯 번째의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며 약 92%가 무슬림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약 6%가 되는데 이곳 마다바는 그리스도신자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도시 이다.
마다바는 요르단 중서부 해발 760m가 넘는 마다바 평원의 옥토 위에 있는 도시로 수도 암만에서 약 30km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도시 마다바는 구약성경에서 ‘메드바’(Medeba)로 언급되고 있는데 요르단 동쪽 고지대에 있는 헤스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고대 통상로인 ‘왕의 도로’가 지나는 중요한 성읍이었다.
왼쪽은 사해, 오른쪽 부분이 마다바 평원과 마다바
비옥한 마다바 평원에 마다바가 위치해 있다.
메드바는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빼앗은 땅이었다. 모세의 인도로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에서 이스라엘은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임금의 큰길’을 따라 지나갈 수 있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아모리 임금 시혼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오지만 이스라엘은 요르단 동쪽 땅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해버렸다.
민수 21,21-24 이스라엘은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청하였다. “우리가 임금님의 땅을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밭이나 포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임금님의 영토를 다 지나갈 때까지 ‘임금의 큰길’만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시혼은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든 군대를 모아 광야로 나왔다. 그는 야하츠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싸웠으나, 이스라엘이 도리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곧 암몬 자손들의 영토에 이르기까지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암몬 자손들의 경계는 굳건하였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아모리인들로부터 빼앗은 땅을 이야기 하면서 처음으로 ‘메드바’를 언급한다.
민수 21,29-31 불행하여라, 모압아! 크모스의 백성아, 너는 망하였다. 그는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에게 제 아들들이 쫓겨 가게, 제 딸들이 끌려가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활을 쏘아 대자 헤스본에서 디본까지 다 망하였다. 우리는 노파까지, 메드바까지 다 황폐시켰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아모리인들의 땅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면서 메드바는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
여호 13,15-16 모세가 르우벤 자손들의 지파에게 씨족에 따라 상속 재산을 주었는데, 그들의 영토는 아르논 강 가에 있는 아로에르에서 시작하여, 그 강 중간에 있는 성읍, 메드바 곁의 고원 지대 전체,
다윗은 암몬 임금 나하스가 죽자 조의를 표시하기 위해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암몬의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을 붙잡아 수염을 깎아 버리고 예복도 엉덩이 부분까지 절반씩 잘라내어 심한 모욕을 했으므로 다윗은 암몬과 아람을 쳐부수게 되는데(1역대 19,1-19 참조) 이때 메드바는 전쟁터가 되었다.
1역대 19,7 또 병거 삼만 이천 대, 그리고 마아카 임금과 그의 군대도 고용하였다. 그들은 메드바 앞에 와서 진을 쳤다. 암몬 자손들도 싸우려고 저희 성읍들에서 모여 왔다.
BC 9세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후에는 모압의 왕 메사(Mesha)가 이 지역을 통치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오므리(BC882-871)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다시 이스라엘의 손으로 넘어온다. ‘디본’에서 발견된 ‘메사의 석비’(Mesha Stela)에 의하면 메드바는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의 치세 40년간은 이스라엘에 속했지만 모압의 메사가 이를 탈환하고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이사야서는 모압에 내릴 신탁의 말씀을 내리면서 메드바의 재앙을 언급한다.
이사 15,1-2 모압에 대한 신탁. 정녕 밤 사이에 파멸하였구나. 아르 모압이 멸망하였구나. 정녕 밤 사이에 파멸하였구나. 키르 모압이 멸망하였구나. 바잇과 디본이 통곡하러 산당으로 올라갔구나. 느보와 메드바 위에서 모압이 슬피 우는구나. 머리는 모두 벗겨지고 수염은 모두 깎였구나.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에 얌브리 자손들이 살던 도읍은 유다 마카베오의 형인 요한을 살해함으로 좋지 못한 평판을 남기게 된다. 요나탄은 보급대의 책임자인 형 요한에게 많은 양의 짐과 함께 나바태아인들에게 보냈는데 메드바의 얌브리 자손들이 요한을 죽이고 물건들을 약탈해 가자 요나탄 형제는 산으로 올라가 매복하여 얌브리 자손들의 혼인잔치 행렬을 급습해서 보복을 하였다.
1마카 9,35-41 요나탄은 보급대의 책임자인 형 요한을 보내어 자기의 벗들인 나바태아인들에게 많은 양의 짐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메드바의 얌브리 자손들이 나와 요한을 붙잡고 그가 가진 모든 것도 함께 빼앗아 가 버렸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이 요나탄과 그의 형 시몬에게 보고하였다. “얌브리의 자손들이 큰 혼인 잔치를 벌이는데, 가나안 대귀족의 딸인 신부를 데리고 큰 대열을 지어 나다밧에서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형 요한의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며 산으로 올라가서 매복하였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많은 짐을 진 소란스러운 행렬이 오는데, 신랑과 그의 벗들과 형제들이 그 행렬을 맞이하러 손북을 치는 사람들과 악대와 무기를 든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나왔다. 그때에 요나탄 형제가 매복해 있던 자리에서 나가 그들을 죽였다.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어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산으로 달아났다. 요나탄 형제는 그들의 물건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혼인 잔치는 슬픔으로 변하고 그들의 악대 소리는 통곡으로 변하였다.
도시는 이후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BC135-104)가 어렵게 정복하였다. 요한 히르카누스 2세(BC 63-40)때 12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이후 모압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3세(Aretas 3, BC85-BC62)에게 넘어갔다. 신약시대 동안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나바테아 왕국의 뒤를 이어 기원 후 106년에 마다바는 로마제국에 의해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이 되고 비잔틴 제국에 의해서 그리스도 문화의 중심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한 여러 교회들이 봉헌 되었으며 마다바는 주교좌가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칼체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451년)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는 542년 11월 20일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한 예루살렘의 네아 성당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527-565)때 마다바 그리스도 공동체의 익명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 문화를 꽃피우던 마다바는 614년 페르시아인들의 침략을 받았고 635년 이슬람 군에 함락된 후 무슬림 우마야드 왕조(Umayyad)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8세기 중반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파괴된 후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1880년 초에 케락(Kerak)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의 박해를 피해 2000여명이 마다바로 이주해 오게 되면서 마다바는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는 1894년 9월 30일 마다바에 성당을 지을 수 있는 허가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로부터 받게 된다. 이어 10월 23일 새 성당을 짓기 위해 폐허가 된 비잔틴 성당의 터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하면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 되었다. 성조지 성당은 1896년에 완공되었다.
이어서 10여 년 동안 모자이크는 화재와 자연적인 노출과 습기 등으로 훼손 되다가 1964년 12월 독일의 폭스바겐 재단의 후원으로 1965년 고고학자 Heinz C?ppers와 Herbert Donner에 의해 복원이 되었다.
마다바 시의 도면. 1.성 조지 성당. 2.동정녀 성당. 3.예언자 엘리야 성당 4.순나 가족(Sunna' Family) 성당 5.거룩한 순교자들 성당 6.불탄 궁전 7.Salayta 가족 성당 8.주교좌 성당 9.사도들의 성당 10.고고학 박물관 11.상점 12.The Birkeh 13. al-Mishnaqa 성당
마다바 방문객 센터에서 성조지 수도원까지의 도면
마다바 방문객 센터. 버스에서 내려 이곳에서부터 성 조지 수도원까지는 골목을 걸어가야 한다.
성 조지 수도원으로 가는 길의 상가에서...베두인 텐트안의 모습.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
마다바 방문객 센터의 휴게실 모습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는 성 조지 성당 제대 앞쪽 바닥에 위치해 있다. 이 지도는 오늘날의 지도처럼 북쪽을 향하여 있지 않고 제대 쪽으로 동쪽을 향하여 있는데 이 구조에서 지도상에 있는 장소들의 위치는 실제 나침반 방향하고 일치하고 있다.
1902년도의 성 조지 성당 모습. 오른쪽 건물
성 조지 성당 입구
성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마다바 지도를 설명하는 장소
원래는 21 x 7m 의 크기로 약 200만개의 모자이크 조각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실제 크기는 15.7 m x 5.6 m이다. 원래 면적은 94㎡(28.4평)로 성당 남쪽 벽에서 북쪽 벽까지 약간의 테두리를 남겨두고 전체 면적을 포함하는 구조였지만 현재는 25㎡(7.6평)만 남아있다.
원근법과 항공관찰 기법으로 만들어진 마다바 지도에서 학자들은 156개의 성경 유적지들을 확인하였는데 서로 다른 돌 조각 등을 이용하여 성지의 언덕과 계곡, 마을과 도시들을 묘사 한 후 희랍어로 설명을 첨가 하였다.
성 조지 성당 안의 모습
성당 안쪽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있는것이 보인다. 미사가 있을 경우는 모자이크를 보호하기 위해 카페트로 덮는다.
모자이크가 있는 부분을 카페트로 덮은 모습
아래 부분이 마다바 모자이크이다.
왼쪽 요르단강에서 사해로 물고기 한마리가 내려가고, 다시 오른쪽 사해에서 요르단강으로 거슬러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모습
예루살렘 모습
성당 안의 이콘들. 모자이크로 만든 이콘들이다.
마다바 지도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의도 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성지의 장소들을 순례자들이 순례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장소에는 희랍어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260/264경~340경)가 쓴 「지명사전」(Onomastikon)에 나오는 명칭과 일치하고 있다. 지명사전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목록으로써 성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것은 후에 예로니모 성인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막대기로 가리키고 있는 곳은 사해 요르단쪽에 있는 '롯 수도원'
요르단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종려나무가 있는 예리코
예루살렘
모자이크 지도는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고 북쪽으로 레바논에서 남쪽으로는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나일 강 삼각주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에서 동쪽으로는 요르단 사막까지 성경의 땅을 묘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북쪽 부분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고 남아 있는 부분도 크게 훼손 되었다.
마다바 지도에 나타나는 많은 지명들은 고고학 발굴작업을 통해 그 정확성이 확증되면서 성서지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장소들을 확증할 수 있는 최고의 근거 자료가 되었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의 상세 지도와 명칭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루살렘 성서 대학에서 구축한 다음 자료를 참고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