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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맑고 파란 하늘은 막혔던 가슴을 뻥하고 뚫어주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쁜 하늘이 바로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 떠가는 하얀 구름 역시 예쁩니다. 우선 배경이 아름다우니까요. ㅎㅎ 어느덧 나뭇잎 색깔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한 주 지나면 시월입니다. 때가 되어갑니다. 봄의 아름다움은 화사함입니다. 그런데 가을의 아름다움은 좀 다르지요. 뭔가 무게가 있는 아름다움 아닌가 싶습니다. 하기야 젊은 나이의 아름다움과 나이든 성숙한 아름다움의 차이라고 생각도 듭니다. 파란 하늘 아래 다채로운 단풍의 풍경은 그야말로 풍경화 이상입니다. 매년 당하지만 올해도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사는 인생들은 왜 이리도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소식은 끊이지 않습니다. 어제 신문에 난 통계 가운데 사망원인에 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오게 한 것이 있습니다. 10 - 30대에서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근간 젊은 선생님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택한 기사가 꾸준히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한창의 나이들에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의 현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자기 탓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가야 했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 좀 해봐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생산인구가 줄고 있는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곧 우리의 명절인데 슬픔과 아픔 속에서 맞아야 하는 백성이 적지 않을 것임에 마음이 아픕니다. 하늘은 아름다운데 이 땅은 왜 이리도 힘든가요? 뭔 좋은 소식 좀 만들 수는 없을까요? 결국은 사람이 문제인데 말입니다. 뭘 하든 우리 모두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나라 - 좋은 하늘 좋은 땅, 좋은 사람들 - 그런 우리나라를 꿈꿉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
2023년 9월 23일 김종우 목사 드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 : 10)
<비닐하우스>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나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과연 ‘나’입니까? 내가 아니라면 누구죠? 어렵습니다. 사실 그런 때가 온다면 살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내가 나인 줄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소위 치매 환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약 10년 가까이 치매를 가지고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5년은 집에서 모셨고 뒤 5년은 요양원에서 지내시다 떠나셨습니다. 도저히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환자 본인보다는 주변의 가족이 더 힘들게 되는 병입니다. 그래서 치매 기가 시작되면 스스로 정리할 생각도 합니다.
인생은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란다. 아들에게 남겨놓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어르신은 자신의 삶을 끝내려고 합니다. 시력은 약해져서 점점 눈앞이 흐려집니다. 단순히 눈앞의 장애물을 피하는 정도만 남았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로 구분합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평생 함께 살아온 아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그 목소리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외출을 삼갑니다. 필요할 때는 안내해주는 동행인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어렵게 외출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실내에만 있다가 바깥바람을 쐬본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이겠습니까? 이제 자주 가질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직 자의식이 가능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 합니다. 그 때가 지나면 스스로의 죽음마저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닌 나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괜스레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만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런 날을 맞기 전에 끝내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타의 자살과 같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까?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위 존엄사를 하자는 것인데 그나마 사회적으로 아직 공인된 것은 아닙니다. 나라별로 수용하기도 하고 금지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생명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을 잃어버린 나는 사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그런 나를 살고 싶은가? 자신을 아주 잃기 전에 안락사를 선택할 수는 없는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공인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몰래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쫓아다니며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안타깝다 생각하며 지나갈 뿐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배우자가 이미 치매로 자신도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때로는 주변 사람에게 폭언과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때로 묶어놓을 수도 있고 가둬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일단 먹으면 배변도 돌봐주어야 합니다.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이 두 노인을 돌봐주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문정’은 이 가정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퇴직한 노교수는 오히려 문정을 가리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대상은 치매로 앞뒤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노부인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노교수에게도 돌봄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을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문정은 노교수에게 매우 고마운 사람입니다. 뭔가 떼주고 싶을 만큼 귀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수고에 답해줄 준비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문정도 그렇게 잘 대해주는 노교수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피고용인이고 문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직장입니다.
문정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집을 마련하여 하나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보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소년원에 있지만 오래지 않아 나올 것입니다. 그 때는 어떻게든 집을 마련해두어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마련해둔 돈으로 조그만 집도 보아두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갑니다. 사실 자신도 힘든 처지이기에 소개 받은 집단상담실에 다니며 치유 받으려 합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혼의 아픔, 아들과의 갈등, 노부인의 치매로 인한 스트레스 등등 속이 검게 타고 있을 듯합니다. 그래도 견디며 살아야 하니 버티려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름 애쓰며 이겨나갑니다. 어렵지만 자신의 경험도 나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사고가 일어납니다. 물론 고의적 살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당황하다가 신고까지 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들의 전화를 받습니다.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결국 시신을 유기합니다. 과연 그렇게밖에 선택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비닐하우스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 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과연 올 수 있을까요?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삽니다. 사실 꿈조차 없다면 의미도 미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이루어가는 일입니다. 그 시간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영화 ‘비닐하우스’(Greenhouse)를 보았습니다. 아픕니다.
에덴의 비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성경을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 삶에 지혜를 주는 교훈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보고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구성뿐만 아니라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지요. 특히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숨겨져 있지만 물론 그 사람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단지 그 표현 방법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이라면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표현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는 비자가 되니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 신자는 문학이나 예술을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고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딤후 3 :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 속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비유를 보겠습니다. 삿 9 : 8 - 9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이 말씀에 보니 나무들이 말을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비유입니다. 사사 시대 잘 알고 있는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도 많았고 자식이 많았지요. 그런데 기드온이 죽고 나서 한 첩의 아들이 남은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죽음에서 유독 한 아들 요담이 살아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네 사람들에게 그 일어난 사태를 이야기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 나무 비유입니다. 삿 9장 7 - 21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예언이 담겨 있지요. 형제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해서 말합니다. 사람을 나무로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가운데도 곧잘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훌륭한 인재를 가리켜서 ‘거목’(巨木)이라고 표현합니다. 큰 나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가리켜 ‘꿈나무’라고 합니다. 사람을 나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고 관심을 갖게 하는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말 그대로 그 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면 생명을 얻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먹기를 꿈꾸는 나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과 아울러 등장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창 2 :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사실 에덴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각종 나무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유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선악나무)를 지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나무도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바로 선악나무입니다.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경고하시는 겁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특히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경계를 시킵니다. 버섯이나 산나물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하지요. 잘못 알고 먹었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깁니다. 독버섯이나 독초라는 말은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독과실이라고 들어본 일은 없습니다. 동화 속에서는 본 적이 있는 듯합니다. 마녀가 만들어놓은 열매가 있지요. 먹으면 죽든지 잠이 듭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런데 먹으면 죽는 나무 열매가 있습니까? 또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는 나무의 열매가 있습니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창세 때는 있었는데 아담 이후에는 없어졌습니까? 과연 생명나무가 성경 창세기 이후에는 나오지 않는가요? 잠 3 :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기 생명나무가 나옵니다. 무엇이 생명나무랍니까? 지혜입니다. 물론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 역시 비유가 아닐까요?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을 수가 있는 걸까요? 선악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나무 선악나무가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등 그런 나무처럼 실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겁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5 :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참 포도나무’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 행세를 하는 가짜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가짜 포도나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경고하심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절을 보면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열매가 나옵니다. 열매라고 하면 먼저 나무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인데 거짓 선지자들은 가시나무나 엉겅퀴겠지요. 그럼에도 포도나무 구실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면 탄로나게 됩니다. 나무를 가지고는 설령 구별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열매를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과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말씀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아 전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8 : 26 “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떠나갔지만 베드로는 남아서 고백하였습니다. 요 6 :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열매는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이기에 듣고 따르는 자에게 생명 곧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흉내를 아무리 잘 내도 거짓선지자들의 열매 곧 그들의 말은 진리가 아닌 거짓이고 비진리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누구이고 선악나무는 누구이겠습니까?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나무는 사망을 줍니다. 마귀 사단의 편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두 나무가 한 장소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 때에도 에덴동산에 같이 있었습니다. 창 2 :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16 - 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그렇게 경고를 하셨는데 왜 먹었을까요? 잘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봅니다. 뱀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여자를 미혹합니다. 그의 말이 대단히 매혹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럴싸했다는 말이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새롭게 보였습니다. 창 3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예, 그래서 둘 다 먹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이 전혀 다른 두 나무가 한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나무를 보아서는 식별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7 : 16)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열매를 보아도 혼동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지요. 진짜가 진짜 같습니까, 가짜가 진짜 같습니까? 가짜가 훨씬 진짜 같습니다. 그래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나무를 분간하기 어렵고 다음에는 그 열매 곧 말을 들어도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그 나무가 속한 조직이 대단하기에 비판하거나 대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앞에 두고 정탐꾼을 파송합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둘로 나뉩니다. ‘들어갈 수 없다’한 팀이 10명이고 ‘들어갈 수 있다’한 팀이 단 두 명입니다. 백성이 어느 쪽을 택합니까? 많은 쪽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많은 쪽을 택합니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쪽을 택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진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훨씬 많습니다. 그만큼 세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웬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감히 나서서 가짜라고 밝히며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진리의 편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하셨습니까? 나중에는 그나마 곁에 있던 제자들까지 다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홀로 유대인들 앞에 섰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 쟁쟁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마 26 :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뭐 하려고 모였습니까? 59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인 것입니다.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반대했다가는 같은 처벌을 당할 것입니다. 얼마나 겁나는 일입니까? 그래서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만큼 두려운 일입니다. 그 커다란 세력의 무리를 대놓고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가 비진리에게 밀려납니다. 외로운 싸움입니다. 생명나무가 선악나무에게 밀려납니다. 선악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세상의 온갖 권세와 명예와 부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 : 2) 너무 비교가 되지요. 백성이 어느 쪽을 따라가겠습니까? 어쩌면 뻔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 작은 것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 13 : 31 -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그렇게 작게 시작하지만 놀랍게 크게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커서 나무가 된답니다. 욥 8 :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우리가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작지만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것이지요. 이 믿음이 확고하기에 겁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준이 확실하게 서 있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물론 하나님 말씀 곧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고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도 선악나무도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같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리는 열매가 다릅니다. 즉 나오는 말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성경을 가지고 전하는 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 나무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선악나무는 자기만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권세로 쉽게 억압합니다. 분명 겉보기에는 그 나무가 훨씬 훌륭합니다. 그 하는 말에도 위세가 당당합니다.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그에 비하여 생명나무는 초라합니다. 진리 하나 외에는 지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마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했습니다. 대단하지요. 성도들에게 대단한 존경과 인기를 받으며 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그들에게 모르겠다고 하신답니다. 더구나 그들이 행한 그 놀라운 일들이 모두 불법이랍니다. 말이 됩니까? 하나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주어서 그 영혼을 살리는 일이고 영생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찾아올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오게 만드는 방법은 놀라운 일을 벌이는 것이지요. 일단 모이면 모인 그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실과를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나무도 다르고 열매도 물론 다릅니다. 비록 한 곳에 있지만 그 두 나무의 소속은 서로 다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똑같이 유대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보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은 하나님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의 소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구분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45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의 싸움은 결국 참과 거짓 곧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와 마귀의 선지자,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 곧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싸움이지요. 비진리, 거짓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제 것’입니다. 자기가 공부하고 연구해서 얻은 소위 ‘사람의 계명’입니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기들이 즐겨 지켜온 전통일 뿐 하나님의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럼에도 백성은 그들의 권세에 눌리고 조직에 눌려서 따라갑니다. 그런 환경에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차원이 달랐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정리합니다. 에덴동산에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가운데 두 나무입니다.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입니다. 이런 나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두 나무는 비유입니다. 사람을 뜻하며 특히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 옛날에는 선지자요 오늘날은 목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되 ‘참 하나님’을 알라고 하셨듯이(요 17:3) 그 세우신 종도 참이 있고 거짓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를 삼가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 7 : 15, 24 : 24) 문제는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이지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에덴동산에 같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교회’라는 하나님 세우신 동산에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목자라고 해서 자기 입으로 ‘나는 사단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마귀가 세운 교회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 성도에게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을 것이냐, 그 유혹을 이겨내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베드로의 자세입니다. 요 6 :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다른 사람들 모두 떠나가도 우리는 영생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신앙자세입니다. 문제는 ‘영생의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은혜가 된다, 유익하다,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재미있다 등등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주는 말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딤후 3 : 15) 아무리 능력을 행사해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주님은 단호히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마 7 :21) 즉 아버지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믿으면 구원’이라는 허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게 선악과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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