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경기도 고양시 일대가 옛날에는 한양에서 필요한 장작을 공급하던 곳이었는데 이 고양의 장작이 커피와도 관련이 있어 지난 일화를 소개 해본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시절이라 하고, 고종황제와 순종황졔가 아주 즐기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끓여서 국물을 먹는 음식이란 모조리 탕국이라 불렀기에, 자연스레 서양에서 들어온 끓여먹는 국물이라 하여 커피를 '양탕국'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당시 양탕국은 값이 너무 비싸 서민들은 냄새도 맡아 보기 힘든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던 중 1910년을 전후하여 쁠레쟝 (Plaisant) 이라는 약삭빠른 프랑스인 장사꾼 하나가 대한제국에 들어와 황성에 머물면서 무엇으로 돈을 벌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쌀만큼이나 수요가 풍부한 장작에 눈길이 꽂혔다. 당시 한양성내에서 소비하는 장작의 대부분은 지금의 고양시 일대에서 채집되어 무악재를 거쳐 서대문과 자하문 (창의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쁠레쟝은 고양의 나무꾼들이 한양으로 가져온 장작을 그자리에서 매점매석하여 한양성내에 독점적으로 팔면 돈 좀 만지겠다는 요량으로 광통교 언저리쯤에 자리를 잡고 장작과 숯 장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한양엔 "나무 재벌" "장작왕" 으로 불리던 최순영이 장작과 숯의 유통을 거의 독점지배하여 8개 장작시장 중 7개와 세군데의 시탄장 (柴炭場; 장작과 숯을 같이 취급하는 가게) 까지 장악하고 있어 장작시장은 후발주자가 뚫고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은 철옹성이었다.
이에 쁠레쟝은 철저한 현지화를 결심하고 자기 이름을 부를 가져오는 상서로움이라는 뜻의 '부래상 (富來祥)' 이라고 바꾸고 직접 보온병에 커피를 가득 담아 서대문과 자하문으로 들어오는 나무꾼들에게 다가가 커피를 주며, "나는 고양 부씨입니다." 이라 하며 접근해서 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시는 양탕국 한사발을 거저 주며 같은 값이면 장작을 자기에게 넘기도록 했는데 나무꾼들은 매우 좋아하며 그리 하였다고 한다.
거기다 부래상은 무악재에서 서대문까지 오는데 100걸음 거리마다 "고양 부씨의 시탄장으로 오시오. 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시는 양탕국 한사발을 공짜로 줄 것이오." 라는 광고를 줄줄이 붙여놓았다. 자신을 '고양 부씨' 라 하여 한국인들이 억세게 집착하는 지연 혈연 의식을 장사에 활용한데다 커피까지 상술의 일환으로 동원한 것이다.
당시의 나무꾼들은 지금의 고양시 일대에서 장작을 채집하여 달구지나 등짐으로 운송을 해왔으니 무척 고단하였을 것이고, 카페인을 접해보지 않은 그들에게 양탕국은 새로운 맛과 함께 일종의 탕약내지 보약같은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처음 맛보는 양탕국에 나무꾼들은 녹용보다 효과가 좋다고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부래상은 태평로 바닥의 장작시장을 지배했다는 우화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후 부래상은 서울시 성북동의 울창한 숲속에 우아한 서양식 별장을 짓고 살면서 화장품을 밀조하여 프랑스산이라고 속여서 팔아 먹다가 발각되어 추방되고, 간송 전형필이 1934년 부래상으로부터 이 별장을 구입하여 박물관으로 단장하여 운영하다가, 용도를 미술관으로 바꾸니 이것이 현재의 간송미술관이다.
첫댓글 양탕국~~
엄청 애호하죠~~
오늘 우찌우찌 양탕국을
한잔도 못해 무지하게 그립습니다~~
양탕국의
씁쓰레하면서 싸하면서 아련하고 낭만적인
그 향기가~~
저는 하루에 두잔만 마시려고 애를 씁니다^^
많이 마시진 마소서
@이건 예썰~~~!!!
참 잘 지어내죠.
너무나 맞는
표현입니다.
당시에는 탕제로
보약먹던
시절일테니,
고소하고 맛난
검은 커피가
양탕국이라
불릴만 하네요.
에효~~
양탕국 금지령내려
일주일째
못마시고 있네요.
마시고파라 - -
쩝!
금지령은 깨는 재미죠~~ㅋㅋ
@은서 ㅋㅋ
그러고 싶은데
더 많은 기간
커피를 끊어야
하는 기간이
더 길어질까봐
철저히
지키고 있답니다.
워디가 편찮으십니까
@이건 목상태가 안좋아
커피와 주류를
삼가중인데,
마감 쿠폰이 있어서
오늘 마셨네요~ㅎ
양탕국
3잔 무리하게 마셨다가 원치 않은 밤샘을 하였네요ㅎ
양탕국 넘 좋아하지 마시라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