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려의 전쟁이야기 -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입[ 康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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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7. 20:26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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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입
[ 康兆- ]
1) 고려의 정변을 명분으로 하는 거란의 2차 침입
1009(목종 12)년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는 유혈정변을 일으켰다. 이때는 바로 거란의 전성기로서 거란의 성종은 강력한 대외정복 사업을 추진하여 자국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고려의 정변 소식을 접한 성종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현종 1) 11월에 직접 40만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 서북부에 침입해왔다. 이것이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의주가도의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 등의 방어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성종은 직접 통주로 남진하여 고려군을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 전개된 화전 교섭에서 성종은 고려 국왕의 입조를 강화 조건으로 하고 하공진(河拱辰) 등을 인질로 삼아 철군하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거란의 2차 침입은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전쟁으로, 거란과 고려 모두 헛되이 많은 인명과 물자 손실만 입었다.
2) 거란의 2차 침입 경과와 관련 문헌
거란의 2차 침입은 고려 영토로 편입된 강동6주의 전략적 가치가 재인식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1010년(현종 1) 11월 중순에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 정성(鄭成) 및 이수화(李守和) 등이 병사를 격려하며 굳게 지키자 거란의 40만 대군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거란 성종은 흥화진 포위를 풀고 군대를 양분하여 20만은 인주(麟州)에 주둔시키고, 20만을 직접 지휘하여 통주로 남진하여 강조가 지휘하는 고려군 30만과 격전을 벌였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배수진을 쳤는데, 거란군이 중앙을 공격하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하여 번번이 승리하였다. 게다가 새로운 무기인 검차(劍車)를 동원하여 거란군 20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조가 자만에 빠져 적을 업신여기고 대비를 소홀히 하다가 패배하여 3만여 명의 고려군이 전사하였으며, 강조는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 후 거란과 고려는 강화 협상을 전개하여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한 지 10일 만인 정월 11일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거란의 철군은 고려의 강화 요청에 따른 것이지만, 후방 지역의 고려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이루어졌다. 실제로 적의 후방에서 양규가 외로이 버티며 일곱 차례의 전투를 감행하여 거란군 수천 명을 죽이는 한편,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인 1만여 명을 구해내고 군마와 무기를 포획하는 등 거란군 퇴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과 양국의 전쟁 상황을 기록한 문헌으로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이 있다. 세가, 지, 표, 열전으로 구성된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에는 거란의 2차 침입과 전쟁의 경과 및 고려 장군들의 활약상이 현종 세가와 강조 및 양규 열전 등에 분산되어 기록되어 있는 반면,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사』와 거의 같은 내용이 전쟁의 경과에 따라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3) 고려사에 나타나는 강조와 양규의 활약
『고려사』 권127 강조 열전에는 강조의 정변 과정과 거란 침입을 맞아 항전한 강조의 활약 및 거란 성종으로부터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회유와 압력을 끝내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권94 양규 열전에는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상대하여 거란군 퇴군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양규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契丹主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蹴鉉雲曰 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 임금이 결박을 풀어주며 “내 신하가 되겠느냐”고 묻자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했다. 다시 물어도 대답이 여전하였다. 칼로 살을 발라내며 물어도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현운에게 물으니, “이미 두 눈으로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니, 오직 충성을 다할 뿐 어찌 옛 나라를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걷어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 따위로 말하느냐”라고 꾸짖었다. 거란이 마침내 강조를 죽였다.
『高麗史』 卷127, 「列傳」 卷40, 叛逆, 康兆
고려사 권127, 10쪽
規掩擊契丹兵於無老代 斬二千餘級 奪被虜男女三千餘人 又戰於梨樹 追至石嶺 斬二千五百餘級 奪俘虜千餘人 後三日 又戰於余里站 斬千餘級 奪俘虜千餘人 是日 三戰皆捷 復邀其前鋒於艾田擊之 斬千餘級 俄而契丹主大軍奄至 規與叔興 終日力戰 兵盡矢窮 俱死於陣
양규는 무로대(無老代)에서 거란군을 습격하여 2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梨樹)에서 접전하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2천 5백여 명을 목베어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또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 명을 되찾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다시 거란 선봉을 애전(艾田)에서 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얼마 뒤에 거란 임금이 인솔한 대부대가 갑자기 진군해오자 형세가 일변되었다. 양규와 김숙흥이 온종일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두 사람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高麗史』 卷94, 「列傳」 卷7, 諸臣, 楊規
고려사 권94, 19쪽
[네이버 지식백과]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입 [康兆-]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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