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곡항에 폭설이 내렸다.
지겹도록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쳐다볼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스럽던 눈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오자 고난이었다. 눈 잘 치우기로 유명한 강릉시에서 대로변의 눈은 잽싸게 치워주었지만, 자신의 집 앞의 눈은 스스로 처리해야 할 지경이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내 집 앞, 다행히 차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부리나케 대로변으로 옮기긴 했는데, 그렇더라도 자동차가 움직일 공간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변변치 못한 도구와 부실한 팔 다리로 겨우 내 자동차의 공간은 확보를 했다.
구정을 맞아 옆 집은 네 명의 아들들이 들이 닥쳤다. 옆 집 앞에 번듯한 자동차 네 대가 위풍당당 서 있었고, 그 집 두 노인네는 평소와 다르게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눈을 치울 때도 역시 그랬다. 네 아들과 손자들 합쳐서 열 명이 될듯한 대군(?)에다가 번듯한 도구로 순식간에 자동차 네 대가 마음대로 활개 칠 만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겨우 한 대가 비집고 들어갈만한 자리를 차지한 내 집 앞과는 분명히 비교가 되는 거였다.
게다가 용감한 네 형제는 지붕과 옥상의 눈까지 걷어내고, 마당의 눈도 티끌 하나 없이 긁어 내버렸다.
눈을 전부 치워버리고 네 형제와 손자들은 마당에 눈사람 까지 만들어 세우는 호사(?)까지 부리고 있었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두 노인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동네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의기양양 거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듯 했다.
충분히 그렇게 할만도 했고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어도 아깝지 않는 풍경이었다.
나는, 그 순간 몹시도 초라해졌다.
마당과 지붕의 눈은 고사하고 내 차를 겨우 빼낼 정도의 공간만 확보하고 아내와 딸 둘은 아직도 꿈 속에서 눈이 얼마나 왔는지에도 관심도 없을테고, 게다가 내가 키우는 애물단지(?) 닭들의 집 위의 그물망의 눈을 치우는 작업까지 보너스로 남아 있는 터에.
"밭이니까 마음대로 버리세요."
옆 집 둘째 아들이 옥상의 눈을 내 집과 옆 집 사이에 겨우 나 있는 공간으로 어렵사리 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집 텃밭에 버리라고 선심을 쓰는 척 했고, 그것이 겨우 내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되먹지도 않는 기회였을 뿐이다.
낮이 되고 날씨가 따스해지자 눈이 녹기 시작했고 차들도 대로변을 들락거리면서 옆 집과 내 집의 눈을 치운 공간의 차이가 더욱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헉, 그런데, 그곳에서 아나키스트인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주사파 인간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남 과 북의 통일의 열망을 아낌없이 부셔버리는 휴전선과, 북한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숨기면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을 서슴치 않는 중국이 넘고자 하는 압록강의 경계 조차도 나를 그토록 서운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 작은 경계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허무주의에 빠진 아나키스트가 되어 일제 강점기 테러리스트 의혈단원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확하게 옆 집과 내 집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눈의 경계가 지워졌다. 굳이 대로에 버려도 될 것을 그 집의 대군들은 눈을 치우며 경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굳이 그렇게 경계를 만들 필요도 없는데, 오히려 그렇게 경계를 만드는 노동이 수고스럽기까지 하고 대로변에 버리는 노동 보다 더욱 거추장 스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개미처럼 일하는 거였다.
나는, 실소를 머금으면서 억한 심정에 더욱 내 집 앞의 눈을 건성으로 치운 지도 모른다.
한번 쯤이라도 딸아이들을 재촉해서 깨울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로라도 깨우지 않았는 지도.
그것도 역시 부지런하고 성실한 효자인 옆 집 네 형제에 대한 오기였을 것이다.
이런 나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옆 집이 부러워서 못난 성질 부리는 자격지심이라고 평가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평가받아도 효성스런 아들도 없는 게으른 내가 큰소리 칠 입장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틀림없이 동네 사람들은 옆 집 네 아들의 효성스러움과 부지런함을, 아직도 천지를 모르고 쿨쿨 잠을 자는 내 딸들과 비교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실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래도 아나키스트인 내가 꼭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눈의 경계이다.
이명박의 글로벌 시대, 김영삼의 세계화를 줄기차게 비판하는 내가, 까짓 옆 집 부지런한 네 아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경계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갈만 한데, 자격지심 가득한 소심한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부분에서 내가 좌파들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공동체 정신의 단서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바라보는 사회주의에 대한 시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또는 진보와 평등을 법과 제도를 통해서, 그러자면 의회정치에서 권력을 확보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진보 좌파 역시 진흙탕 선거판에 뛰어 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시선은 법과 제도를 통한 사회변혁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휼륭한 법과 제도라도 그것은 이미 권력이 되고 공동체 정신을 훼손한 상태라는 거다.
모름지기 정치라는 권력 놀음은 이미 사회주의가 가지는 공동체의 정신을 아낌없이 내다 버린 꼴이라는 거다.
소련이 망하자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즐거워하는 우파들과 그것이 창피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한 엉터리 좌파들과 , 그것의 방법이 틀렸다고 아직까지 큰소리 치는 어설픈 좌파들은 아나키스트가 보기에는 똑 같은 짓거리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까지 한번도 사회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었다. 맑스의 가치를 껍데기 정도로만 흉내만 내면서 권력(법과 제도)으로 기계적인 평등만 맛 보였을 뿐 진정한 사회주의적 가치는 요원했었다.
오히려 그보다도 중국 서남부 오지의 작은 부족들의 사회와 미국의 원래 주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동체 사회가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말 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법과 제도만으로 생각하고 평등을 오로지 기계적인 것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좌파들이 영원히 그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유럽 근대 자유시민들의 富가 제 3 세계 식민지로부터의 착취라는 것에서 부터 딜레마는 발생했다.
그들의 부를 평등이라는 가치로 왜곡시키는 과정이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거다.
그들의 평등은 귀족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얻었을 뿐, 진정한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한없이 무심했다는 것을 19 세기 유럽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복지 정책 역시 그 발원은 스스로의 투쟁이라기 보다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의 부산물이라는 거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나마 좌파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복지 마저도 이렇게 불손한 의도로 출발한 것이다.
게다가 19 세기 노동자들이 힘겹게 쟁취했다는 노동 조건 역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의 증거는 선진국 의회의 상하 양원의 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회변혁의 열쇠를 계급에서 찾고자 했던 좌파들은 이제 그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로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
사회변혁은 계급과 개인(자본주의)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서 스스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 정 반 합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변혁을 법과 제도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좌파나 우파가 같다. 그
래서 아나키스트의 눈에는 둘 다 같은 우파일 뿐이다. 법과 제도로만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권력이 팽창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것은 비대해지고 중앙집권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법과 제도가 인민들을 무시하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우파 정권보다 오히려 좌파 정권에서 빈번히 일어났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표방한 근대 유럽 자유시민들은 가족중심주의(개인)가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가족 중심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다. 혹자는 도시화 산업화에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지만, 두 가지 요건은 상호 깊은 연관성이 있다.
맑스의 딜레마는 바로 이 점을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19 세기 오로지 아나키스트들만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했을 뿐이다.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길을 걷던 아나키스트들은 제 1 인터내셔널에서 그렇게 좌파들과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구정 연휴가 끝나고 옆 집 네 형제들은 전부 가버렸다.
이제 그들이 타고 온 네 대의 자동차가 없으므로 굳이 눈을 쳐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옆 집 노인네들은 방에서 나올 기색이 없다.
그들의 자랑스런 네 아들이 없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은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아침에도 내 자동차 주변의 눈을 치우고 왔다.
그리고 잠시 동안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아흔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칠순 며느리가 사는 윗 집의 길을 조금 터 주었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