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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역에서
도치씨가 아내의 만찬을 90% 거의 완료했을 때는 만찬까지 남았던 4시간10분전도 쉬지 않고 역비례해서 1시간 20분 앞까지 만찬시간을 당겨 놓았다.
도치씨는 식탁에 차려진 죽음의 만찬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선별했지만 일일이 맛을 보며 아내의 입맛에 맞나 안 맞나 꼼꼼하게 살폈다.
오색잡채도 OK.
굴비 찜도 굿.
겉절이도 기똥차고.
우렁양파무침은 둘이 먹다 기절해도 모르겠고.
큰맘 먹고 산 일명 랩스터, 크라우피쉬crawfish도 눈이 부실 붉은색을 띄고, 은은한 바다 향을 풍겨 후시미무드후각시각미각합성어 만점.
디저트는 아내가 잠들었다가도 깨는 타이페이망고젤리를 준비했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요리하면서 즐거운 마음이기는 처음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도치씨가 부르는 콧노래는 어디서 귀에 무척 익은 노래였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도치씨는 마지막 소절은 노래방에서 노래하듯 통성으로 불렀다.
오늘밤 자정에 아내가 가고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기쁨에 세상만사, 아니 음식 만드는 수고로움도 신났고 프라이팬에서 고추 타는 매캐한 냄새도 향기로웠다.
90일 전.
처음 죽음의 만찬이 시작될 때만해도 언제 세월 다 보내나? 암담하고 답답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홀가분했다.
잠시 숨을 고른 도치씨는 주방의자에서 일어나 복도 끝의 수족관으로 향했다.
추어산적 아니 렛만트무드피쉬의 재료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주재료보다 부재료가 더 많이 들어가는 음식들은 열을 가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다른 맛의 음식이 된다. 추어요리도 그렇다. 더운 음식을 만찬에 내 놓기 위해 아내가 회사에서 집에 도착할 시간을 손가락으로 역산한 도치씨. 추어산적을 만들기 위해 타공스텐조리를 들고 수족관의 스위치를 넣었다.
90일 전 죽음의 만찬이 시작될 때나 다름없이 수족관의 물은 그대로였지만 득실대던 미꾸라지들은 겨우 바닥에 띄엄띄엄 보일정도로 줄었다.
수족관의 불이 켜지자 죽은 듯 수족관의 바닥에 엎드려 있던 미꾸라지들은 일제히 활동을 시작했다.
불빛과 도치씨를 알아 본 미꾸라지들이 넓은 수족관을 거리낌 없이 광란했다. 밥줄 시간으로 착각한 것이다.
미꾸라지들을 보면서 도치씨는 잠시 깊은 상념에 잠겼다.
“죽음을 앞 둔 저 미물처럼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내를 두려움 없이 죽여주는 도암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죽인다면 90일이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벌써 끝났을 일이지만, 아내를 죽이는 순간 엄청난 공포와 통증과 애증을 아내와 공유하며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잔인해서 몸서리쳤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두 눈 딱 감고 잠든 아내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칼에 맞은 아내는 스프링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가슴에 꽂힌 칼과 도치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일을 저질러 놓고 아내의 시선과 마주치자 도치씨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내가 쓰윽 웃었다. 아주 차갑고 푸른 기운이 도는 웃음이었다.
도치씨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방금 느닷없이 떠오른 상상을 지웠다. 절대 칼로는 아내를 찌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노란 황금빛을 띈 미꾸라지 한 마리가 유난히 별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수면까지 세차게 올라 온 미꾸라지는 갑자기 흐느적흐느적 바닥으로 갈아 앉고 있었다. 바닥까지 내려가기 전에 두 번 몸을 솟구치기도 했지만 이내 동작을 멈추고 바닥까지 갈아 앉는 미꾸라지가 늦은 봄날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 홑씨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벌써 여름을 느낄 정도로 봄날치고는 더웠다.
아내가 아침부터 서둘렀다.
모처럼, 나드리겸. 도치씨 부모의 산소를 다녀오기로 했던 것이다.
산소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별다른 벌초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내는 부지런히 산소주위를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누가 산소를 돌본 모양이네?”
도치씨의 물음에 아내가 당연한 듯 말했다.
“지난 한식날 사람을 샀어요.”
“응?”
“그랬구나. 나한테 말하지 않고?”
“호호호. 낚시 갈 사람에게 벌초가자면 가겠어요? 또 일행은 어떻게 되구요? 요즘은 산림청에서 대행해 주더라구요. 와보니 진짜 말끔하게 했네요.”
“그래도. 당신한테 미안하잖아?”
대답대신 아내는 엉덩이에 감췄던 민들레 홑씨를 조심스레 들고 입으로 불며 말했다.
“요즘은 소지燒紙를 하지 않으니까 대신 제가 민들레로 아버님 어머님 기쁘게 해드리는 거에요. 누워만 계시지 말고 민들레 씨처럼 훨훨 날아 마실다니시라구요.”
그리고 아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그런 웃음을 간직한 아내가 그래서 좋았다. 사랑한 후에 더 좋았다.
도치씨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내의 미소도 마구 흔들리다 도치씨의 상상 속에서 사라졌다.
바닥에 갈아 앉았던 미꾸라지가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으로 재빠르게 떠올랐다.
도치씨는 야단법석 난 미꾸라지들에게 F9을 듬뿍 주기로 했다.
금방 아내의 만찬에 오를 놈들이지만 아내처럼 죽음을 예지하지 못한 녀석들도 마지막 먹이나 실컷 먹게 하고 싶었다. 먹기 싫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내의 만찬에 산적으로 만들어 올려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수족관 바로 옆의 서재로 들어가 젤리형태의 F9을 들고 나왔다.
첫댓글 도치가 마누라 만찬을 준비하고 콧노래 까지 부르고
도치의 뜻대로 과연 죽을것인가.그건 아무도 모르고
오직 작가님의 혼자만이 알듯 한데.
90일동한의 만찬이 어떻게될지 날이갈수록 더욱 궁금 해 집니다.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고운밤 되시고 활기찬 한주 시작하세요.
방금 잠에서 깨었는데 젠틀맨님의 귀한 소식이 남아있네요.
이 새벽 제일 반가운 체취입니다
또 한주일이 시작되는데 제겐 의미없는 시간들로만 가득해서 조급하네요
그런 뜻으로 새겨보면 젠틀맨님은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도 젠틀맨이십니다
멋진 주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마누라 죽이는 만찬 몇시간 남겨놓고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도치의 잔악상이 눈에 보입니다.
15년 동한 함께해온 마누라.
아무리 바람을 피웠다고 그렇게 메뫂차게 해야 하는지~ㅎㅎ
에전엔 칠거지악이라해서 외간남자와 눈만 마주쳐도 퇴출이었는데요
이건 정상 아닌가요?....ㅋ
오늘도 신나는 날로 행복만끽하세요
안동역 노래 가사말처럼 도치씨가 아낼 빨리 죽이고 싶어서 그런거겠죠?
그래도 도치씬 착한 걸까요??? 비록 아낼 죽이려 하는데 만찬까지 준비하고 ㅎㅎ 알쏭달쏭
ㅎ
글쎄요 기준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오늘도 즐거운 한주일의 시작으로 맞으세요
안동역 제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
ㅋ
그러셨군요.
멋진 날되세요
소름끼치네요 아낼 죽이기전에 저런 요리 준비를 하다니 헐~~
ㅎ
안무섭게 쓴다고 썼는데....ㅋ
답글이 어쩌다 늦었습니다
편한 한가위되시고 즐거운 추석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