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이 거의 나지 않아, 그리고 그다지 흥미를 못 느껴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습니다. 다만 가끔 피곤하여 쉴 때 뉴스나 간간 사극 정도를 보곤 합니다.
하루 저녁 산책 후 곤하여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방의 오른쪽 열린 창으로부터 들어와 보고 있는 텔레비전 위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은은한 빛을 머금고 나타나 날아 들어오는 것이 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방 안의 제 머리 위를 날면서 아래를 빛을 비추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비둘기 형상은 당연 성령님을 상징,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 성령님이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셨네”
이것이 천사들과 더불어 조금은 제겐 기이한 영으로 보이는 하얀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과의 동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 제 곁에는 늘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곁에 있습니다.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이 보이니 문득 성령님께 늘 물으며 생각과 마음이 교통 속에 있지 않음이 생각나, “성령님, 지금 뭘 하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하면서 텔레비전 보려무나” 라고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텔레비전을 본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환상이나 영안이 열려서 영적인 존재들을 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영적인 존재들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이나 또는 우리에게 유익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령 예수님은 성화 속에서 본 모습 들 중의 하나로 많이 나타나고 보이십니다.
성령님은 성경 속에 몇 가지 형상을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의 형상 이런 것으로 나타나신 적은 없지요. 형상으로 나타난 것들은 불꽃,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 비둘기 같은 형상 등이지요. 상징으로는 불, 물, 비, 바람 등으로 많이 표현되었지만, 어떤 생명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께 나타나신 것처럼 비둘기의 형상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아마도 제게도 그런 형상으로 보여주시고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영적인 일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게 일어난 일들은 그대로 가감 없이 적어 내고 있는데, 가끔은 이러한 글들로 혹시 저를 대단하게 생각하시거나 할까봐 맘 저어할 때가 없잖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아주 작고 부족한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한 것이라곤 그냥 일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의적으로도 아니요, 주님께서 인도하신 듯한 환경의 풀무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기도하고 말씀 읽으며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사모한 것이 전부인데, 저도 다 이해하기 어려운 영적 현상들이 일어나더군요.
가끔은 왜 내게 이런 일상적이지 않은 영적인 현상들이 일어날까?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도 하지만, 생의 길은 주님께 맡긴 채 주님께서 저를 위로하시는 역사라고 그냥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영 안”, “영안이 열린다”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많이 들어보기는 하였지만, 사람은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실존적 존재, 저도 이런 경험을 하기까지는 누가 천사를 보았다거나 하면 의심반 믿음반 그랬었지요.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제가 경험을 하고 보니, 성경 속에 기록된 천사와의 만남 등이 실제이고 그런 주님이나 천사들과의 만남도 실제임을 실존적 경험 속에서 인식이 바뀌게 되더군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영도 보도 듣고 말하는 등의 실체적인 존재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인 성령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그렇게 비둘기 형상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나타나신 성령님, 아니 이전부터 늘 속에 내주내재 하셨지만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겠지요. 그 이후 늘 제 곁에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다니거나 아니면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행동도 꼭 자연계의 비둘기처럼 행동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본질이 아니라 어떤 형상 곧 실제가 아닌 환상적 형상으로 우리에게 인식시키시는 것이므로, 자연계의 비둘기처럼 보이고 행동해야 제가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처럼 빛을 아래로 비추이면서 날고 있는 모습, 그냥 날아다니는 모습, 아니면 어깨 위나 누워 있으면 가슴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혹은 베게 머리맡에서 졸고 있거나 날개 손질을 하는 모습 등도 보이곤 합니다.
예수님이 늘 성화 속 어떤 모습으로 곁에 계시니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 더욱 실제가 되었듯이, 그렇게 성령님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당신의 존재를 제게 보여 주시니 성령 또한 우리 속에 언제나 함께 계심이 더욱 실감이 나고, 조금은 더욱 실감나게 그분과 교통하게 되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비둘기 형상으로 당신의 임재와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성령님께서, 비둘기 형상 중 그 눈만 왕방울 만하게 해서 저를 쳐다보실 때가 있습니다. 눈으로 말과 뜻을 교감하게 되는데 자주 눈이 왕방울만큼 커져서 무엇인가를 말해 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전에 기도하다 환상 중 비둘기 형상으로 날아온 성령님을 상징하는 모습을 본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그 눈에서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권위와 능력과 위험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게 보여주시는 왕방울만한 눈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너무도 맘이 여리고 상처를 쉽게 받으실 있는 꼭 빌어 표현하자만 작은 상처나 아픔에도 눈물을 뚝! 뚝! 흘리실 것 같은 사슴의 눈망울입니다. 호수처럼 맑고 너무도 여려 보이는 사슴 눈망울로 가만히 쳐다보곤 하십니다. 정결, 순수, 깊은 사랑 그리고 너무도 쉽게 상처를 받으시겠구나 그런 느낌을 전해줍니다.
영의 세계는 들으려 해야 들리고 보려 해야 보이고 하는 것이 한 원리인데, 지금도 보려고 하니 왕방울 여린 눈망울로 저를 바라봅니다.
이즈음에서 성부, 성자, 성령님에 대해서 글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세 분입니다. 도무지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것을 말씀하시기에 성경은 그렇게 그려내고 있기에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신관을 정립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성부, 성자, 성령님 사이에 어떤 높낮이나 특히 성령님은 어떤 인격체시라기 보다는 어떤 능력, 에너지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물론 성경을 보면 다소 우리가 성부 하나님만을 가장 높은 분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종말의 때는 오직 그분만이 아시며, 예수님도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영원부터 하나님께로서 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일 높고, 그 다음이 성자 예수님, 그리고 어쩌면 성령 하나님을 가장 낮게 생각하는 경향성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단언컨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전혀 다른 세 분이시나, 그런 어떤 높낮이의 차이나 존귀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 동일한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갖추신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두 다 같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시며 또한 교통과 기도의 대상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찬송과 경배도 드리고, 성자 예수님을 향한 기도나 찬양의 찬송가나 복음송 등은 너무도 많지요.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성자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지이지요.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는 시대를 성부 하나님 시대, 성자 예수님 시대, 성령 하나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거니시던 성자 예수님의 시대에는 어떤 문제나 해결 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로 갔습니까? 예수님께로 갔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그분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도 사하여 주셨으며 모든 문제를 또한 해결하고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께도 기도할 수 있으며 찬양과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 우주만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와 세계도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더불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눈에 기이한 육으로 오신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도 경배하거나 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경배는 찬송가를 예로 들어서 말씀 드렸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기에 수긍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기도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우리가 마지막 축도 등의 근거로 사용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성령님의 특징이 “교통하심”입니다. 그러면 이 교통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는 임재, 친교, 나눔, 동역, 친밀, 우정, 지시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동역만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령님과 교통하면서 “성령님, 도아 주십시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곧 기도요, 간구요, 요청이며 교통 아닙니까?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성령님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경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위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간구하라고 하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던지, 성자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이던지, 성령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던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저의 견해로 옳아 보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와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친밀한 대화 등에서 일일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원론은 기억해 둠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신 한편 신비이지만, 그 하시는 역할들과 주관적인 영역 등에서 차별성이 있지만,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경배와 찬양과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원론은 “성자 예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원론이지요. 이것이 기도의 정도요, 원론입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께나 성령 하나님께 기도나 요청이나 간구를 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 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예를 들어보면, 서로 온전히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 된 한 가정에 유비해 보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을 어떤 가정의 아버지, 아들, 어머니로 한번 유비해 보겠습니다.
정말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된 가정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칭찬해도 엄마와 아들도 동시에 기쁠 것입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리고 그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 중 누구에게 가서 어떤 부탁을 드려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이 온전히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뜻과 마음이 같기에, 아버지의 뜻이 어머니의 뜻이요, 어머니의 뜻이 아들의 뜻이며 모두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차별시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가끔 우리 사람의 몸에 삼위일체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우리도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성삼위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 셋이 모여서 우리 각 개인을 이루듯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도 전혀 다른 세분이지만, 또한 전혀 같은 한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지존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전혀 하나이시며,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과 경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십니다. 다만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안에서 그 역할과 주관하시는 부분이 다를 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일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요. 하지만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전혀 다른 세분이 온전한 어떤 영적 신비 안에서 한 분이신 것이지요.
가령 성부 하나님이 성령님이시라면, 이런 말씀이 필요할까요? 같은 분인데 통달하고 마음과 비밀을 왜 읽어내셔야 하겠습니까?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또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표현을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분이라면, 왜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어야 했을까요?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분이시지만 전혀 다른 특성과 성격과 개성을 가지신 전혀 다른 분입니다.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은 뜻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 곧 하나됨을 표현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론인 성령님에 대해여 눈을 돌려보고자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 볼 수 없는 성령님의 신비한 특징 중 하나는, 당신도 포함된 삼위의 뜻을 따라 실제로 모든 창조와 모든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의 분이시면서도 한없이 여리고 순수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으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엄청난 권력을 가진 대 제국의 왕의 자신 역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아주 마음이 여린 왕비나 공주에 유비해 볼 수 있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명령하실 때 그것을 수행하신 것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도 창조도 그러하고 지금도 모든 역사는 성령님께서 수행하십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하위 존재는 아닙니다. 그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시는 삼위일체이실 뿐이지요.
이처럼 전능하신 모든 능력을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특별한 것은 아주 섬세하시고 사람으로 비유하면 어린아이나 소녀 같은 여린 감성을 가지신 듯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기도 하시고, 근심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소멸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때로는 불처럼 강하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폭풍처럼 휘몰아 치시며 역사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또한 너무도 부드럽고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여리고 섬세하셔서 상처를 쉽게 입으시기도 하십니다. 결코 강압적으로 우리에게 행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런 성령님의 톡특한 여리고 섬세하신 성격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물론 경외하고 조심스레 우리가 섬겨야 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중의 한 예가 성령 훼방죄를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나니야와 삽비라도 그 성령님의 섬세하신 마음의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엄한 심판을 받고 말았지요.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특별히 민감하여야 하며, 그분께 짓는 죄에 대해서는 아주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아주 민감하셔서 작은 반응에도 역사를 그만 두시거나, 또는 작은 것으로 인하여 소멸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는 우리가 마치 너무도 사랑스럽지만 성격이 여리고 섬세하여 정말 배려해 주어야 하는 사슴의 눈망울을 지닌 연인처럼, 정말로 민감하여야 하며 유의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실 때 귀신의 힘을 덧입어 행한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너희가 말로 나를 거역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오늘날도 심지어 성경에 너무도 분명하게 기록된 방언의 역사나 다양한 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역사를 귀신의 역사나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분들이 있지요. 죄의 경중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바, 성령 훼방죄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까 두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영이신 하나님과 그 세계,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에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영이신 하나님은 한편 신비요, 기묘자이신 듯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무슨 은사나 능력을 행한다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미혹되거나 잘못되어 잘못된 영의 흐름으로 많이 빠지기도 하시고,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나 운동에 있어서 잘못된 인식이나 또는 기피하는 마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령의 역사나 그러한 역사를 나타내는 모든 사람을 조심스런 분별없이 다 함께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성령 훼방죄의 심각한 죄에 빠질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 민감하신 성령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평생 성령님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방언이 그릇된 것이라는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도하다가 어느 날 성령께서 그 은사를 주시는데, 억지로 입을 막고 심하게 거부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은사의 소중함을 알고 평생을 기도하였지만 다시는 받지 못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쉽게 상처를 입으시고 한번 깊이 상처를 받으시면 다시 그 선물로 찾아오시지도 않을 수 있는 여리신 분이십니다.
성령님과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시면, 평생 생명의 성령님과는 관계가 없는 삭막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실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은 아주 조심스럽고 배려있게 대해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나 주님의 현현이나 천사의 나타남, 변화산상의 엘리야와 모세의 현현 등, 단순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와는 달리 분명히 성령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일진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면 그냥 사단과 귀신의 역사로 단정 짓고 정죄하는 오류도 한편 두려운 일입니다.
불교나 유교나 무슨 종교나 그 이론이나 사상은 들어보면 다 사랑을 강조하고 정직을 강조하고 들어보면 말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심어 놓으신 선한 양심 등으로 만들어낸 우리의 사상일 뿐입니다. 선한 마음에 생각하고 깨달은 것들이기에 들으면 다 아름답고 좋게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내고 생각해 낸 좋은 말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교회 등에서는 이런 수준으로만 성경말씀만을 강론하고,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성경을 좋은 생각과 사상으로만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설명해 내는 그러한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생활을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성령님에 대한 이해와 역사가 교회와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 낸 좋은 생각과 사상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행위는 언제나 점잖고, 기도도 조용히 드려야 하며, 거룩하고 경건하다는 것이 젊잖게 옷을 차려입고 몸가짐이 바르고 단정해야 한다는 그런 것들입니다.
다윗 왕이 누가 보면 경망스럽다고 할 법궤 앞에서의 춤추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울 왕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예언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함께 예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기에 취해 옷을 훌렁 벗고 누워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죄를 자백하며 어찌 보면 제 정신을 잃은 듯 울고 불며 회개하고 목이 쉬도록 주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속의 귀신이 성령의 능력 앞에서 “안나가!”라고 고함치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뒹굴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사람들이 때로 쓰러지거나 웃거나 하는 등의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영이신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상식으로 성경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리고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인격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이십니다. 구약성경을 가만히 잘 살펴보십시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얼마나 다른지?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인격적으로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분은 인격을 넘어 신격이신 분입니다.
오늘날은 아주 깨끗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공로이지요. 하지만 구약의 예배는 곧 제사는 그야말로 피가 때마다 시마다 흥건히 흐르는 그야말로 피 냄새가 진동하는 자리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면, 갈 때마다 짐승이 아프게 죽어가며 피를 흘리거나 때로 그 피를 옷과 몸에 뿌리거나 바르거나 한다면 인격적으로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솔직히 갈 때마다 짐승들의 숱한 죽음을 보아야 하니 얼마나 한편 끔찍하게 느껴지는 자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 죄에 대해서는 오직 죽음의 피를 원하시는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적이라고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님과는 달리, 당신의 아들을 처참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잔인한 십자가의 형틀 앞에 상상으로라도 서 보십시요. 인격적으로 그러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낸 인격이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을 넘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더 높은 지혜와 경륜과 섭리를 가지신 신격이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본질이 영이시기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성경을 통하여 제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만들어 내려는 인격적인 하나님과는 다른지 너무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오늘의 본론과 주제가 아니니 이 정도에서 정리합니다.
그런 성령의 세례와 임재와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채 인격적인 교회,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교의 불자들이나 유교를 믿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선행을 하듯이, 성령의 세계는 전혀 알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다 자기만족과 과시라는 자아가 숨어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이런 육신적 차원의 선행도 결국은 악일뿐이며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을 하지요. 실제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아니하면 그 이면에는 자기만족이나 과시 등을 추구하는 자기 의, 욕망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의 속성은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금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할례 받고 기름부음 받은 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야 진정한 생명의 역사와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 곧 성령 안에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오직 우리의 참 생명의 비결이요, 비밀인 것입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글과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특별히 성령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주제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똑같이 동등하시며 그 역할과 주권적인 부분에서 구별이 될 뿐 같은 하나님이시요, 찬양과 경배와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특별히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성경이 강조하여 말하듯, 성령님을 배우고 알아가며 그분과의 교통과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나 알아감은 각 개인의 몫이겠으나 성경은 그분을 훼방하거나 거역하면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의 율에 처할 수도 있으며, 또한 그분은 우리의 말과 행동 등으로 근심하거나 소멸될 수 있으신 부드럽고 섬세한 분임을 말하며, 삼위 하나님 중 가장 배려하고 조심스럽게 섬겨야할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님이 성화 속 다양한 형상으로 제 곁에 나타나 주시고 계시듯, 성령님의 형상으로 이해되어지는 한얀 비둘기가 나타나 제 곁에 늘 머무르니,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는 예수님처럼 성령님과의 교통과 친교가 조금은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런 영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같습니다.
가끔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가 두 눈만 왕방울 만해져서 저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그 까맣고 맑은 눈망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막 울기 직전의 눈빛처럼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울어버릴 것 같은 너무도 여리고 섬세한 순진무구 사슴의 눈망울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얼마나 섬세한지를 제게 이미지로 전해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을 향해서도 같은 눈망울로 지금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의 그릇됨에 얼마나 쉬 근심에 빠지시는지, 탄식하게 되시는지, 아파하시는지 우리 모두 알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신 분이니 어찌 보면 영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처럼 섬세하고 상처를 받기 쉬운 이 땅의 자녀를 걱정하는 여린 어머니와 같은 성정과 마음을 지니시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는 사랑의 성령님께 상처가 아닌 늘 기쁨만을 안겨 드리려 애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교통과 사귐을 통해서 더욱 그분을 알아가며, 근심시키거나 소멸케 하지 않고 언제나 그리고 더욱 충만히 성령께서 우리 곁에 머무시도록 하는 말씀 안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면 싶습니다. 아멘! 샬롬!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눅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