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타미츠 (Carl Philipp Stamitz 1745.5.7 ~ 1801.11.9) 독일 보헤미아 출신의 독일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 칼 슈타미츠(Carl Stamitz;독일식 이름인 Karl Stamitz로도 표기)는 보헤미아 출신의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바로 18세기 중엽 유럽 음악에서 '만하임 악파'로 유명한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 -1757)이고 또한 그의 동생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 1750~1809)도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비올라 주자였다. 칼 슈타미츠는 만하임악파의 교향곡 작곡가 가운데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곡가였다. 칼 슈타미츠는 1745년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 만하임에서 만하임악파의 창시자 요한 슈타미츠(Johann W.Stamitz)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한 슈타미츠의 큰 아들로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이어서 요한 칸나비히(Johann C. Cannabich)와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프란츠 리히터(Franz X.Richter)밑에서 음악을 공부하였다. 칼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1770년(모차르트가 만하임 궁정을 방문하기 8년전)까지 그곳에 있는 유명한 궁정 관현악단의 제 2바이올린 주자였다. 1770년 그는 파리로 건너가서 노아이유 백작의 후원을 받으며 백작을 따라 전유럽을 여행하고 파리에 돌아 온 후, 그는 독일 국내의 많은 도시를 순회하는 명연주자로 명성을 높였다. 칼 슈타미츠는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책임이 부과되고 예술적으로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궁정작곡가 생활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순회 연주자(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길을 떠나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여행하였다. 그는 1783년 11월 헤이그에서 12세의 베토벤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베토벤은 이 나이 많은 연주자보다 공연료를 더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그는 생활이 몹시 어려워 죽기전에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작곡 초고들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어느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하였고, 그러는 와중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그의 플루트 협주곡들도 그랬으며 이런 연유로 그는 7편의 플루트협주곡을 작곡하였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중에서 G장조 협주곡 op.29는 만하임 시절(1762-70)의 것으로 멜로디가 풍부하고 균형잡힌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악반주로 된 이 협주곡은 플루트의 잠재력을 최대한 탐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수많은 실내악곡을 작곡했는데,그의 작품으로 50곡 정도의 교향곡과 38곡의 협주 교향곡 (konzertante Sinfonie:2~7 개까지의 독주악기를 위한)으로 명성이 높았다. 협주 교향곡은 본래 파리에서 유행한 혼합형식이었는데,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솔로주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린협주곡,클라리넷협주곡,플루트협주곡,바순협주곡 등 수많은 협주곡과 비올라 다무르를 위한 작품도 남겼을 뿐 아니라, 2악장의 로망스로 유명한 명곡인 "첼로 협주곡 제2번"도 남겼다. 1801년 독일 작센의 예나에서 눈을 감았다. 칼 슈타미츠의 아버지가 화려한 활약을 보였던 만하임 악파(18세기 중엽)는 1743년부터 1777년에 걸쳐서 유럽에서 화려한 활약상을 보였다. 이 악파의 명칭은 독일 라인 강변의 도시 만하임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하임 궁정악단을 대표할 뛰어난 바이올린 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가 1745년부터 1757년까지 지휘를 담당했던 그의 지도 아래 만하임 궁정악단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악단이 되었고, 또 만하임은 전 고전파 교향곡의 발전사 가운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도시가 되었다. 그의 동생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도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비올라 주자로 1770년 형 칼(Carl)과 함께 파리에 갔고 평생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톤 슈타미츠의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등은 대부분 파리에서 작곡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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