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제1946호(2021년 6월 6일자)
4면[토닥토닥 마음 길잡이]
노아와 예수님의 차이
글 |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전례 없는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 와중에 ‘친환경 에너지 쓰기, 플라스틱 줄이기’ 등으로 나름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여전합니다. 인간의 오만과 욕망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는 원형적 주제가 담겨 있는 ‘홍수 설화’가 생각나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변주되어 전해지는 대홍수 설화는 지금도 여전히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특히, ‘디딜 땅이 없다.’라는 상황은 난파선같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많은 이들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잘못된 본능, 혹은 집단의 부정적 힘에 좌초한 자아가 다시 회복되려면 노아처럼 참을성 있게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으로 돌아온 ‘선한 노아’가 자신이 일군 포도밭에서 나온 술을 마신 후 벌거벗고 누워 있는 장면, 또 그 때문에 일어나는 후일담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후에 가나안 지방의 조상이 되는 ‘함’이 아버지 노아의 알몸에 대해 다른 형제들에게 말했다는 사실만으로, 저주받게 되는 것입니다(창세 9,20-27 참조).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가족들과 의논한 것이 자손 대대로 고생해야 할 악덕일까요? 치매나 알코올 중독 부모를 두고 절절맨 경험이 있는 자녀들은 특히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입니다. 노아는 ‘올바른’ 사람이었지만, 욱하는 심정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합니다.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은 노아의 저주대로, 함이 사는 가나안 지방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주받은 땅으로 남습니다. 한데, 흥미롭게도 가나안 지방은 후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이스라엘인의 정착지가 됩니다. 저주받은 땅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은 노아의 마음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등에 등장하는 사료로 미루어 보면 가나안 지방은 티로와 시돈을 포함한 페니키아 지방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마르 7,24-30)’는 바로 가나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안에 내린 노아의 저주를 고려했기 때문인지, 여자의 믿음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인지, 가나안 지방 사람이라며 처음에는 그녀의 청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여자의 간절한 호소에, 그 딸을 홀연히 낫게 하십니다. 어쩌면 바로 이 시점에서 노아가 가나안에 내린 모든 저주는 풀린 게 아닐까요.
‘종말(Doomsday)’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염과 재해에 신음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불행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구촌의 멀지만 가까운 이웃을 위해, 가나안 여자의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희망의 징표인 무지개는 아직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