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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 2. 약속을 잊은 자의 모습
(창26:7 -11. 546)
본문의 내용은 이삭이 머문 곳에 사람들이 와서 이삭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니까 이삭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는 리브가가 아리따움으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하여 자기 아내라 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리브가를 껴안은 이삭을 아비멜렉이 보더니 즉시 불러 너는 네 아내를 어찌하여 네 누이라고 했느냐? 에 이삭은 자기 생각에 아내로 말미암아 죽게 될까를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어찌 그리했느냐? 백성 중에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우리에게 죄를 입혔다고 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인다는 말씀인데 오늘은 약속을 잊은 자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약속을 잊은 자는 두렵다.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세우실 때 사람을 통해서 전적으로 역사하신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이제 이삭과 함께 역사하고 이삭이 약속을 계승해 나갈 때 바톤터치의 순간을 큰 축복 속에 하려하게 살게 하지 않고 흉년이라는 시련을 주셨다. 이는 어려움이 오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신 것이다. 이삭이 어려운 난관을 통과할 때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이겨내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데 보기 좋게 넘어졌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어떤 일을 맡기시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훈련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피할 길을 찾게 된다. 이런 행위는 성도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조금이라도 바른 길에 서서 살며 약속을 붙잡고 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영성이 살아나는데 피해갈 길을 따라가면 영성이 점진적으로 소진된다. 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잠재되어 있던 범죄의 요인이 드러나 아내를 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보다 강한 자가 없음에도 리브가를 인하여 죽음을 피하고 싶은 두려움은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다.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 시련과 두려움도 약속을 붙잡고 이기자.
2. 약속을 잊은 자는 죄를 범한다.
이삭은 신앙의 근본 없이 그때, 그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는 신앙의 계승자가 아니고 오히려 신앙의 수혜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반복하시며 아브라함의 자리에 앉아서 경성케 하신다. 이삭이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여 겁을 먹고 피해서 말씀을 떠나니 죄가 성립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죄를 범할 수 있다. 성경에 훌륭한 선진들도 큰 실수로 범죄할 수 있다. 본문 7절에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라”했다. 하나님은 이삭의 삶의 깊은 곳에서 거짓말을 통해 죄를 범하는 원인과 속임수를 다루시면서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깊은 죄를 도려내신다. 하나님은 영혼에 박힌 죄도 십자가 보혈로 흰 눈보다 정케 하셔서 구원하신다.
3. 약속을 잊은 자는 고통을 당한다.
죄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삯으로 진노를 받아 자동적으로 사탄의 세력에 빠지게 한다. 죄란 우리들에게 책과 오염을 일으키며 우리들의 삶을 피곤하여 멸망에 이르게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양심의 책망을 받고 점점 오염이 진행되면 많은 고통이 온다. 이때 사탄이 검사를 보내고 하나님은 전도자를 보내어 변호사이고 대속의 피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시면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고통 중에 교만하면 안 된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신다. 선배나 스승이 넘어짐을 절망치 말고 약점과 결점도 모방치 말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합리화도 말고 선한 일에 본받고 못된 일을 재현하지 말아야한다. 우리가 누군가? 성자님이 오셔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구원했으니 고통을 이기자.
결론: 약속을 잊으면 현실만 보니 두렵고 죄를 범하고 고통스럽게 된다. 십자가에서 구원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언약의 약속을 지키자
2025. 3. 9. 아비멜렉도 쓰신 하나님
(창26:8-11. 349)
본문은 이삭이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머문 중에 아베멜렉이 창문을 통해서 리브가를 이삭이 껴안은 것을 보고 이삭을 불러서 책망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른 처세가 아님을 분명히 한 내용이다. 자기 백성이 잘못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감싸기보다 잘못을 인정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한 장면이다. 오늘은 우리들에게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아비멜렉을 쓰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아비멜렉을 통해 이삭을 책망케 하신 하나님.
위의 말씀을 살펴보면 아브라함 때에도 아비멜렉이 사라를 누이라고 했음을 밝히고 책망한 사실이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라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고 아브라함을 책망했던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했지만 지금 왕이 아니다. 애굽의 바로 왕조를 왕이 되면 무조건 바로라고 한 것처럼 여기 블레셋 왕들에게도 대를 이어가면서 아비멜렉이라고 칭한다. 8절에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라는 붙잡혀 갔었지만 리브가는 그랄 사람들이 데려가지는 않았다. 이러한 일은 선친 아브라함과 왕인 아비멜렉의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창21:22-34). 이러한 평화조약의 힘으로 왕의 궁전 옆에 거처를 정하여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삭이 순종의 사람으로서 인품이 좋고 평화주의자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삭이 사람들이 살기 좋은 애굽으로 갈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거주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거주한 상태이다. 그러던 중에 책망을 받았는데 우리말에 껴안은 것은 히브리어로 메차헤크 인데 뜻은 애무와 부부관계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소케 하여 책망했던 것이다. 이는 이삭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예수님의 자리에 서서 쓰임을 받는 복을 주신 것이다.
2. 아비멜렉을 통해 이삭을 세우신 하나님.
왕은 이삭이 리브가를 누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속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았기에 리브가와 자기가 안전하다고 있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그들이 부부임을 알고서 진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다.” 했으나 블레셋 왕의 이삭에 대한 책망이 보편적인 면에서 당연한 것 같이 이삭도 보통 사람으로는 취할 수 있는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서는 어리석고 궁색한 변명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다면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하나님 편에서 그리고 신앙 좋은 사람들의 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생명의 위험에 처한 이삭의 마음을 모르는 우리는 순교적인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함을 교훈삼아 예수님 안에서 믿음 지키자.
3. 아비멜렉을 통해 이삭의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창세기 20장에서도 아브라함이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도우시고 회복시키셨다. 이삭이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했기에 이방인 아비멜렉에게 부끄러움을 당했다. 그러나 왕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왕을 통하여 이삭이 잘못을 했지만 백성들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삭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면 죽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종인 이삭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실추된 권위를 왕을 통해서 회복시킨다. 그리고 물질도 엄청 축복해 주신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12-13). 14절은 양과 소가 떼를 이룬다. 이러한 복이란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오는 복이다. 십자가에 피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결론: 우리 믿음이 확실하면 바르면 책망을 받고도 다시 세워주시고 실추된 권위도 회복시키면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케 한다.
2025. 3. 16. 번영의 지름길에 계신 분
(창26:12-14. 516)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심한 기근을 더하시니 고통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가나안을 떠나지 않고 극복하려고 명을 따랐다. 평화와 순종의 사람 이삭이 농사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한 거부가 되게 하시고 양떼나 소 떼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이삭이 농사하는 그 현장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번영을 향하여 나가게 한 교육이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번영의 지름길에 계신 분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번영의 지름길은 믿고 순종으로 열린다.
우리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후에 순종하면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번영하는 복이 임한다. 이삭은 애굽에 가서 기근을 면하려고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 하신 후에 가나안 땅에 거주 하라 신 말씀을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서 농사하여 백배의 결실을 맺는 축복을 받았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창26:12). 여기 그날 땅이란 말이 옥토란 말이 아니다. 만일에 옥토라면 그날 사람들이 이미 경작하는 땅일 것이며 이삭이 농사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삭은 개간하여 농사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이삭이 뿌린 씨앗이 싹트기에 적합 하도록 비를 내리시고 바람으로 산소를 공급하시고 백배의 수확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본디 목축업자인 이삭이 전업하여 농사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며 수확이 보장되지 않지만 베드로가 어부의 감각으로는 지금의 시간에는 고기들이 물가로 떠난 시간이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며 순종하니 그물에서 창조된 물고기가 쭉쭉 늘어나서 한번 던진 그물에서 두 배를 채우자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고 고백함은 자기의 죄를 알고 계심을 알아서 떠나셔야 자기가 살 것을 알았으나 사람 낚는 어부로 세우셨다. 이삭도 농사 중에 계신 하나님을 고백했다. 우리도 십자가 피로 구원하신 분께 순종함이다.
2. 번영의 지름길은 신앙생활을 위한 복이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이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제사 행위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음인데 서민들이 예배 때마다 송아지, 양을 번제나 속죄제를 지내기는 심히 어렵고 그 것도 숫양이란 매우 높은 가격에 유통된다. 암수가 동일하게 출산되어도 수소나 숫양은 제단에 바쳐서 품귀현상에 암양 몇 마리를 주고 숫양을 받아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아들로 오심을 강조한 것이다. 일만 마리가 있어도 숫 컷이 없으면 생산 없어 멸종이 되니 암컷이 태어나면 실망이고 숫 컷이 나면 경사이다. 이삭은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거부가 되고 많은 제물을 자신 있게 바치는 복으로 영광 돌렸다. 오늘 우리가 번영의 지름길로 가려면 양과 소가 아니고 그리고 헌금보다 우리 죄를 위해 어떻게 죽임 받는가를 가르친 제사처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 온 정신을 드려 24시간 임재의식과 단 마음을 드리는 내가 되어 지갑도 포함시키자.
3 번영의 지름길은 함께하는 예배이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이 관할하고 있는 그랄에 거주하고 아브라함 때부터 많은 재물을 가지고 살았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불신세계에서는 운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이다. 자기 속에서 살고 있는 영이 있고 그 영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하자. 지금도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찾으시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값진 숫양을 아낌없이 바친 성도들을 위해 물질의 복을 부어주신 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예배한 것이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자 브엘세바에서도 항상 거주지에서 예배(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피로 구원하시고 호흡과 몸에 피를 돌리신 은혜를 표현한 감사예배이다.
결론: 번영의 지름길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순종함이며 부요함을 팔아서 믿음생활의 열정이 삶과 생활에 예배의 열정이 삶을 드리자.
2025. 3. 23. 역경에 임하는 복
(창26:15-22. 516)
본문의 내용은 이삭이 사는 곳에 복이 임하여 창대하였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창26:13-14) 떠나라고 했다(16절).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아버지의 종들이 팠던 많은 우물들을 있었는데 이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흙으로 메워서 물이 나지 않은 곳이 되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네가 우리보다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하니까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류하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서 사용하였고 거민들이 자기 우물이라며 혹은 자기 골자기라고 하여 분쟁을 피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파서 이용한 내용이다. 오늘은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으로 역경에 임하는 복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역경이 임해도 충돌을 피하면 복이 임한다.
우리는 사막에서 풀을 만나면 오아시스라고 한다. 거기에는 물이 있으니 풀과 나무가 살고 사람들도 거기에서 물을 마시면서 살아간다. 우리들의 환경에서는 물이 흔하기 때문에 이삭이 살던 장소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우물이 있으면 유망 중소기업과 같은 것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양을 먹이고 소를 키워서 삶이 이루어진다. 물이 없으면 초목이 없고 살아 있다는 축복도 사망으로 마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들이 가는 곳마다 땅 아래로 강물처럼 물줄기를 주셨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리고 우물을 파서 영광을 돌리고 양들을 마시게 했으나 아브라함이 떠나게 되면 물줄기가 아브라함을 따라가기 때문에 샘이 마르고 블레셋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 필요치도 않고 사고의 위험이 많아서 흙으로 채웠어 사용치 않았지만 이삭이 거기 도착하여 아버지 우물에 흙을 파고 그 곳에서 생수의 물이 터진 것이다. 지금의 세상이 험한 세상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역경을 이겨내면 승리하지만 이는 십자가 피 공로로 오는 축복이다.
2. 역경이 임해도 성실하면 복이 임한다.
이삭은 평화인 이다. 우물이 있는 곳이요 선친과 왕이 평화조약을 맺었던 그랄을 떠나 사람들이 살수가 없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왔다. 골짜기는 농사가 힘들고 가축을 키우기도 힘들며 초지가 없고 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 밀려서 골자기로 왔다(18). 거기서 우물을 팠다. 아버지 때에 우물을 팠는데 아브라함이 떠나자 물이 나오지 않아서 그들은 물이 없고 위험하여 메웠으나 이삭이 다시 파니 물이 나와 이용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축복하셨고 블레셋 사람들의 끝없는 박해가 이어져도 심중에 복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름도 아버지가 우물을 팠을 때 부른 이름 그대로 불렀다. 전통을 잇고, 영생을 주는 생명의 우물을 찾기 위해서는 타락의 속도나 현실들과 상관없이 아브람과 이삭으로부터 내려온 생수! 영생을 보여주려고 했던 예수님의 생수는 양보할 수가 없으니 대대로 십자가 복음! 생수가 되신 예수님을 성실하게 따르자.
3. 역경이 임해도 생수 양보로 복이다.
이삭이 블레셋 사람이 쓸모가 없고 위험하다고 메웠던 우물을 사용하니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우물이라고 빼앗아갔다. 이삭은 생명을 담보한 우물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한 특별한 복을 전하는 자세로 양보한 것이다. 이는 우물을 파면 언제나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로 보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평화를 위해 싸우지 않고 양보하면 복음이 스며든다. 손해를 보는 소금이다. 언제가 예수님의 영생수라는 물로 구원이다. 척박한 땅에 물이 흐르면 기름진 땅이 되고 동식물이 자라고 평화가 온다. 예수님 없으면 척박한 땅이지만 예수님을 모시기만하면 옥토가 된다. 예수님의 예표인 이삭이 우물을 다툼이란 뜻으로 에섹이라 표하고 평화를 위해 희생함은 예수님의 예표로 적합하다. 오늘 우물이란 생수가 되신 예수님이시다. 십자가피로 영생을 주신 예수님의 생수를 마시도록 희생하자.
결론: 역경이 임해도 정든 곳을 떠나며, 성실하게 살며 소중한 것을 믿음으로 양보할 때 십자가 보혈 권세로 역경 속에 복이 온다.
2025. 3. 30. 문제 해결한 말씀
(창26:23-25. 202)
본문의 내용은 이삭이 거주하는 곳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자고 있던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님인데 두려워하지 말라하시고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전능이 내재된 말씀을 들은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치니까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니 물이 나왔다는 말씀이다. 오늘은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한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문제 해결한 말씀은 두려움을 해결했다.
23절에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과 연속적인 투쟁에서 그럴 북부지역 넓은 곳에 우물을 파고서 르호봇이라 이름 하면서 잘 살고 있었는데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왔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브엘세바로 올리셔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브엘세바가 구체적으로 성취하시려는 의도가 있으셨다. 브엘세바는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영토라고 권리를 주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땅이라고는 없는 것들이다. 종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고생들이 많았고 넓은 땅들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다. 요셉을 통해서 애굽에 들어가서 번성했지만 거기에서 잘 살기를 바랬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훌륭한 지도자로 양육하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나그네의 인생살이를 하다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살게 되었지만 오늘 이삭에게 만은 브엘세바를 떠나지 말라하시고 후손들이 모세를 통해 여기의 땅을 정복하게 하는 특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교훈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해 값을 지불한 땅에 점이 선민들 가슴에 자기들의 땅이 있다고 꿈을 키우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십자가 피 공로를 감사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자.
2. 문제 해결한 말씀은 함께 거해 주셨다.
지금까지는 그랄 지방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불안전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이삭이 브엘세바에 도착한 날 밤에 여기서 네가 살아갈 때에 내가 너화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브엘세바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어떤 장소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제사할 때 아들을 바치려고 했던 곳이며 이삭에게는 아버지께 순종으로 죽임을 당해서 하나님께 제물이 되기를 기뻐했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브엘세바에서 살았던 장소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려다가 성부님이 성자 예수님을 죽이시는 심정을 배운 장소요 이삭에게는 자기가 죽게 된 상태에서 계속해서 드려야할 제사가 실로이신 메시야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실 예수님을 보았던 장소이다. 그리고 제물 되신 예수님 상징한 숫양을 1초 만에 만드시고 나무에 걸리게 한 장소이다.
3. 문제 해결한 말씀은 번성을 약속하셨다.
이삭은 그날 밤에 축복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종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체험하며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위로부터 임하는 큰 축복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이니까 당연한 마음으로 성수하면서 예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 하셨음을 기억하면서 큰 기쁨과 벅찬 마음으로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자녀들에게 배운 내 경험은 무엇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드리려고 할 때 더욱 기뻐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녀들의 마음이 보인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로 하나님 자녀권세로 영생과 복락을 바람이고 복음전파이다.
결론: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문제 해결은 사탄으로부터 두려움이 해결되고, 함께 계시므로 번성케 됨이다. 이런 복이 피의 복이다.
2025. 4. 6. 믿는 자가 보여주는 것
(창26:26-29. 546)
본문의 내용은 아비멜렉이 이삭이 거주하는 곳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는데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세서부터 이삭에게 오니 이삭이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떠나게 하고 왜 왔냐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서로 맹세하여 계약을 맺으려고 왔다는 것인데 이유로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고백하고 서로가 잘살기 위해 계약하자는 것이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것은 임마누엘의 복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셨다.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믿는 자가 보여 주는 것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믿는 자는 예수님 위엄을 보여준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 온 것은 자기들의 신변에 적신호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이삭으로 세력이 확장되게 하시니 전쟁의 위험이 느껴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더하시고 큰 복을 받아 강성해 지는 것을 아비멜렉이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억제할 수 없는 세력임을 확인하고 브엘세바에 있는 이삭을 찾아 와서 평화롭게 살기 위한 협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자기 백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삭의 형편은 어떠한가? 그랄지방 사람들과 관계없이 살기 위하여 브엘세바에 올라와서 살고 있었다. 이런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니 큰 부자가 되었고 강성하게 되니 그랄 지방 블레셋 사람 중에 가난한 자들이 이삭에게 가서 덧붙여 살게 되었다. 아비멜렉이 그랄 사람을 통해 이삭을 괴롭게 했고, 직접 협박할 때 우리보다 크고 강성한즉 떠나라고 했던 그가 머리 숙인 것은 믿는 자로 예수님의 위엄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십자가 피 권세로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이 예수님 위업임을 알자.
2. 믿는 자는 예수님 평화를 보여준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 이니라”(26절). 이는 국가들의 계약이다. 강국들이 해할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힘이 정의라 하고, 타인을 향해서는 해하지 말라고 한다. 아비멜렉 아버지도 똑 같았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보복이 무서워서 계약을 맺으려 하나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삭이 누군가 그는 예수님을 믿기에 평화주의자이다. 이삭은 믿음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침략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침략으로 빼앗는 일은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사귐을 갖는 것은 곧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는 복이 임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시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이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평화주의자이시고 만민들이 죄로 지옥으로 빠진 자를 천국에 보내
3. 믿는 자는 예수님 복을 보여준다.
복이란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곁에서 지켜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우리로 항상 함께 계시고 편안함으로 만족케 하신다는 것이다. 블레셋 인들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인정하기 위하여 많은 기간동안 관찰해 보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상식으론 도저히 부자가 되거나 강성해질 수 있는 없는 환경과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가 없는데 복을 받아서 편안하고 만족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사막으로 갈지라도 여호와께서 이삭이 머문 곳에서는 물이 나오게 하신 것이다. 풀 한포기 없는 상태에서 이삭이 머물기만 하면 척박한 땅에 풀이 무성하여 양들이 먹고 젖이 나오는 땅이 되고 꽃이 피면은 꿀이 흐르는 옥토로 변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실천한 자에게 복주심이다. 예수 피로만 구원이 온다.
결론: 믿는 자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평화와 복 주신다. 십자가 피 권세를 믿고 구원받으면 삶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 된다.
2025. 4. 13. 내가 본 십자가의 고민
(막15:21-23. 250)
본문은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는데 예수님이 힘이 없으셔서 고민 중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데 듬직한 시몬을 불러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우게 하여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고통을 없애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니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는데 이는 고통이 없이 죽으시기보다 고통을 당하시면서 죽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고통당하심보다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을 미리 보시면서 기쁨으로 죽어 주심을 선택하셨기에 고통 앞에서 아픔보다 영생복락을 얻어서 구원받으심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오늘은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내가 본 십자가의 고민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내가 본 십자가의 고민은 가벼운 십자가이다.
먼저 십자가가 어떻게 생겼을까? 학자들이 보는 견해가 많지만 예수님이 지시지 못할만한 무게이었다. 높이로는 땅에 묻히는 것을 포함해서 삼사배일 것이다. 누구든지 싶게 지고 가거나 다리에 묶인 줄과 못을 빼내지 못하기 위해서도 높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게는 십자가의 따라 결정된다. 책에서 본 내용인데 크리스찬이 십자가가 쌓여 있는 곳에 머물고 한 사람씩 십자가를 가지고 가는데 천차만별의 십자가가 있고, 그곳에서 각기 자기가 가지고 갈 십자가를 선택하는데 어떤 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충성에만 눈이 먼 사람은 현장에서 간신히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을 지고가고 어떤 이는 목걸이 끝에 놀고 있을만한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고민해보자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좋은 십자가 선택해서 어디로 가든지 십자가를 간직하며 힘도 들지 않게 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십자가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십자가를 질 것인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면서 감당할 십자가 선택 하자.
2. 내가 본 십자가의 고민은 즐기는 십자가이다.
여기 즐기는 십자가는 충성과 봉사로 즐겁게 섬김보다 취미생활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십자가도 놀이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축구공처럼 차고 놀면서 감당하고 낚시나 등산처럼 취미 생활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사명을 생각하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손발이 얼고 체감온도가 영하 12도나 20도에도 교회 청소를 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십자가와 교회당에 떨어져 있는 가벼운 메모 한 장 수거하는 것도 버겁고 실행하기 어려운 십자가가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고민한번 해보자 나는 어떤 십자가를 질 것인가? 그러니까 값도 없고 충성을 외면하며 섬기지 않은 자세로 즐거운 십자가이기보다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즐기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악을 용서해 주시려고 6시간 동안 피를 흘리면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고통을 참기보다 그 고통으로 영생 얻음을 보시고 기뻐하신 분께 영광 돌리자.
3. 내가 본 십자가의 고민은 보람찬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선택할 때 현장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 너무 가벼우면 예수님께서 보실 때 민망할 것이다. 그렇다고 들어 올릴 때 들을만하다고 생각하면 욕심이다. 왜냐하면 골고다나 저 천국까지 가는 거리가 장거리이다. 너무 고생을 하면 예수님 마음도 힘 드신다. 나의 형편과 처지가 맞는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께서도 잘 했다고 칭찬하실 것이다. 본문의 시몬은 시골에서 왔는데 갑자기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 날만을 보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천하 만민을 구원할 예수님께서 힘드시는데 도울 수가 있었다는 것은 하늘의 복이었다. 아무나 질 수 없고 경쟁자가 높아 생각조차 못할 십자가를 시몬이 지고 갔던 것이다. 지금은 천하 만민이 부러워하고 누구도 행할 수 없는 복 중에 복이다. 주변에 이런 십자가를 남겨 주셨다. 예수님 이름으로 보람찬 십자가에 동참하자.
결론: 내가본 십자가의 고민은 가볍게 생각하거나 기쁘게 지고 예수님께서 남기신 고난의 십자가 찾아 보람찬 충성으로 영광 되자.
2025. 4. 20. 부활로 받은 복
(마28:1-6. 160)
본문의 내용은 안식 후 첫날 믿음이 좋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일어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 현실들이 번개처럼 금방 이루어지고 돌 위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는 자들은 무서워서 하고 떨며 죽은 사람들처럼 되었는데 천사가 여자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은 줄을 안다고 하시며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여 주신 내용이다. 오늘은 은혜 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부활로 받은 복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가 되자.
1. 부활로 받은 복은 죄를 이김이다.
먼저 부활을 말할 때 우리는 육체적인 부활을 믿어야 한다. 육체적인 부활이 없으면 우리들의 육체가 소멸되니 부활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부활에 참여하려면 기본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권세가 임한다. 정식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머리되시는 예수님께 순종하면서 교제가 이루어진다. 이럴 때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고 그 자체가 죄악을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순종치 않으면 내가 머리가 되어 죄에 넘어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사람의 하나님 앞에 왕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성부께 예수님 피를 인정함이 이김이다.
2. 부활로 받은 복은 변화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부활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 밖에 있다면 나의 주인이 예수님에게서 자연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예수님이시다. 즉 예수님은 죽임을 받으실 때 하나님이 살리신다. 사도행전 3장 15절에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하신다. 만일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면 우린 죄 가운데 있고 다시 죽어 제물로 받친 보혈의 권세로 변화되어 구원에 이른다.
3. 부활로 받은 복은 사망을 이김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악에 빠진 상태로 소망이 없었는데 그들이 범했던 죄악들이 용서 받을 수 있는 법을 주실 때에 아담과 하와가 죽임을 받을 대신 양이 죽게 하고 양이 흘리신 보혈을 보면서 대신 죽어주실 예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양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양의 제물을 받으시고 죄로부터 사함 받는 길을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양이지만 성자 하나님이 육을 입고 오신 것을 예표한 양이다. 양은 제물이고 가죽은 의의 옷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가죽 옷을 입히시고 가죽 띠를 주신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자석에 못은 다른 못을 붙이듯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고 영생으로 인도함이 곧 사망을 이김이다.
결론: 부활로 받은 복은 죽으시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 자녀로 변화를 받아 사망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2025. 4. 27. 찾아온 평화
(창26:30-33. 384)
본문의 내용은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들은 먹고 마신 후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고 평안을 얻은 날에 종들이 나가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와서 보고하니 이삭이 그 이름을 세바라 하였고 오늘까지 그 곳을 브엘세바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오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받으라고 주신 말씀으로 찾아온 평화라는 제목으로 은혜가 되자.
1. 찾아온 평화로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니 큰 부자가 되고 강성해져 가니 이를 본 아비멜렉이 이삭 때문에 두려움이 쌓여서 해결하려고 불가침 조약을 맺으려고 찾아왔다. 그는 지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서로 평화를 유지하자고 하지 않았다. 이삭이 자신의 땅에 있을 때 잘못이 없었고 오히려 평안히 가라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삭이 그들의 도덕적인 수준에 기대하지 않고 맹세로 쌍방 간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그랄에 있을 때에 도리가 아니게 학대하였지만 흉년에 그곳에 있을 때 추방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삭이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바른 태도를 선택한 조약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제안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대로 조약을 맺는 일에 찬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약을 마치고 구속사의 주역인 이삭을 흉년으로 단련시키시고 애굽으로 가려고 행군할 때 막으시고 앞으로 너의 자손들이 와서 차지할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약속의 땅을 지키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하는 과정에서 아비멜렉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랄에서 시험을 통과한 과정에 괴로움을 당했으나 아비멜렉이 문신 아흣삿과 무신 비골이 합석하여 만났을 때 서운한 감정을 잃어버리고 좋은 만남과 은혜로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잔치를 베풀고 계약조건에 찬동하는 넓은 포용력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시고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임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복이 체결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영광 돌리자.
2. 찾아온 평화로 여호와의 복이 임한다.
구속사 주역인 이삭을 애굽으로 가지 않게 하시면서 약속의 땅에서 머물게 하신 후 그랄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순종으로 블레셋을 능가할 만큼 성장하였기에 아비멜렉이 온 것이다. 이삭이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가서 체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와서 주도권을 가지고 해결하니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 것인데 본문 32절에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함은 식구들이 많아지고 가축도 많아져 물이 부족하여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고 있었는데 조약을 하고 아비멜렉 일행이 떠나는 날에 우물에 물줄기가 터진 것이다. 이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생명수인 예수님 물줄기가 터진 복이다. 우리가 죄로 원수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은혜에 감사할 때 복이 임한다.
3. 찾아온 평화로 불가침 조약이 이행된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33). 했던 것은 창세기 21장에서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조약 후에 아브라함이 지은 이름이었지만 아들 이삭과 아들 아비멜렉이 같은 장소에서 조약체결 후에 이삭이 세바 곧 맹세나 일곱 인으로 해석된 이름으로 지명을 정한 이유는 자기 구역이 합법적으로 관할함을 알리는 것이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선하게 관리할 때 삶에 필요를 공급하심의 고백이다. 우리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보면서 비난하기 쉽다. 본문에서 이삭은 평안할 땐 재앙을 멸시하지만 실족 자 아비멜렉은 재앙이 기다림을 알고 여호와의 복 앞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우리 체결은 성경 안에서 사법상 계약을 맺을 수 있으니 사회적 정의실현에 본이 되어야 한다.
결론: 찾아온 평화로 조약이 체결되고 축복으로 조약이 이행되었다. 문제는 우리 삶을 통해 아비멜렉들에게 평화조약이 체결되게 하자.
첫댓글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