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들이 3. 강진
2019. 4. 금계
3월 29일, 목포공용정류장에서 강진 가는 직행버스에 올랐다. 도중에 독천 정류장에 멈췄다가 다시 출발한다. 정류장 부근 다리에서 찍은 개천 풍경. 일주일 후면 개천 왼쪽 길 가로수로 심긴 벚나무들도 하얀 팝콘을 아낌없이 터뜨리리라.
예전에는 갸우뚱거리는 조각배 안에서 온종일 낚시질을 하고, 땀 뻘뻘 흘리며 등산도 하고, 어깨가 시큰거릴 정도로 테니스 배드민턴도 쳤지만,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바둑을 두기도 했지만; 이제는 교사 노릇만 은퇴한 게 아니라 낚시도 등산도 당구도 테니스 배드민턴에다 피아노 하모니카까지 몽땅 은퇴했다. 그저 요즘 소일꺼리라면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는 정도, 누워서 텔레비전으로 낚시 등산 당구 테니스를 시청하면서 가끔 종아리에 힘을 주거나 헛발질을 하는 정도.
일흔을 넘기니 그냥 몸을 쓰지 않고 텔레비전으로 그림만 봐도 재미가 쏠쏠하다. 텔레비전 속에서 낚싯대 끄트머리 초릿대가 휙 구부러져 덜덜 떨리는 걸 보면 허 거 참, 너희들 지금 머리칼이 곤두서서 신들린 무당처럼 용을 쓰겠구나; 배드민턴 선수 나뒹구는 걸 보면 허 거 참 너희들 지금 팔을 재주껏 벌렸는데 라켓이 셔틀콕에 미치지 못했구나, 당구공이 쓰리쿠션으로 목적구를 순조롭게 맞추면 허 거 참, 큐대 쥔 손에 힘을 알맞게 잘 주었구나, 마치 내 자신이 당구공이나 셔틀콕을 치는 것처럼, 내 자신이 낚싯대를 끌어당기며 릴을 감는 것처럼 흥분되고 아찔아찔하다.
그렇다. 일흔을 넘기니 무엇을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일이 돌아가는 낌새를 거의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목포에서 강진, 장흥, 보성, 순천 가는 국도 2호선 길가에도 어김없이 개나리가 만발하여 나그네의 기분을 흔쾌하게 가볍고 밝게 해준다.
강진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어디로들 떠나시려나, 대합실 의자에 빈자리가 없을 만큼 강진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가득하다.
강진 정류장 부근의 길거리 노점상 가게. 하늘하늘한 머플러와 아주머니들이 뒤집어쓰는 햇빛 가리개가 때마침 쏟아지는 봄볕과 허리를 간질이는 봄바람에 눈부시게 한들한들 휘날려 요지경을 들여다보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살짝 현기증까지 일게 한다.
저 싼 머플러라도 한 장 마나님 사다주고 싶은 마음이 잠깐 일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선물 사왔다고 핀잔을 들을까 봐 얼른 마음의 문을 닫고 만다.
튀밥기계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주인아저씨가 왜 찍느냐고 묻는다. “하도 오랜만에 보니까 기념이 될까 해서요.” 서둘러 찍기는 찍었는데 뭔가 찜찜하다. 옛날 손으로 돌리던 기계가 아니라 스위치를 넣으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였다. 속으로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는데, 오래지 않아 등 뒤에서 펑, 튀밥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네킹에 초점을 맞추자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와 왜 찍느냐고 묻는다.
“강진 온 기념으로 한 장 찍겠습니다.”
“그래라 잉, 잠깐만, 가만 있어보시요.”
마네킹들의 차림새를 부리나케 다듬어준다. 사진 속에 이마가 훤히 들어난 마네킹은 주인아주머니가 얼굴 잘 나오라고 모자챙을 위로 올려준 덕분이었다.
“사진작가시요?”
“아니요, 그냥 놀러다니요.”
사진작가냐는 질문을 받고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빨개진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하나같이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였다. 특별한 스승이 따로 없었다. 그저 남 하는 것 어깨 너머로 훔쳐보고 그냥 시늉을 내는 데에 불과했다. 어느 것 한 가지에도 똑떨어지게 자신 있게 내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모니카 피아노 아코디언도 독학이었고, 바둑도 작은할아버님한테 경기규칙이나 배운 정도였고, 테니스도 레슨 두어 달 받다가 그만두었고, 수영은 동네 개울에서 개헤엄 친 게 고작이었으니, 아무튼 내 인생에서는 정식으로 사부님을 모신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다가 아마추어 인생, 돌팔이 인생, 엉터리 인생, 허깨비 인생, 영양가가 전혀 없는 인생, 삼류인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래도 작가냐는 질문이 무척 기뻤다. 작가가 별것이간디. 복장 좀 정갈스럽게 입고, 빵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수염 좀 거창하게 기르고, 목소리 좀 착 낮추어서 점잖게 말하면 작가처럼 보이겄제. 그도 그렇고 값비싸고 로켓처럼 우람한 카메라를 한 대 준비해야겠구나. 겨우 똑딱이 사진기로 찍는데 이 옷가게 주인아주머니 날더러 사진작가냐고 놀리는 거로구나.
시골 시가지의 특징은 도로가 비좁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전체적으로 답답하고 옹색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서울에 사는 미남 탤런트 조인성 씨가 멀리 남도문화답사 1번지 강진에까지 내려와 멋스럽게 양복을 차려입고 따스한 봄 햇살을 듬뿍 받으며 수상쩍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나는 강진의 로터리 교차로가 퍽 마음에 든다. 나는 민주주의도 엄격한 교차로 신호등 방식이 아니라 신호등이 없어도 서로 참고 기다리고 배려하며 느긋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돌아가는 로터리 방식이 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전에는 솟을대문에 붙어 있던 새봄맞이 축문이 오늘날에는 커피숍 출입문 유리에 붙어 있다.
명심하라. 세월이 바뀌면 집도 바뀌고, 대문도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뀐다.
강진중앙초등학교 중앙 현관 부근. 옛날 읽은 어떤 책에는 덴마크에서는 학급마다 한 대씩 버스가 있다 한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기 학급 학생들을 태우고 돌아다니면서 소풍이나 견학이나 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 한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테제.
급식소인가, 도서관인가, 체육관인가, 얼른 분간이 안 가는 건물 위에 ‘꿈꾸러기’라고 쓰여 있다. 참 신기하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이다. 잠꾸러기, 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 심술꾸러기라는 말을 들어봤어도 ‘꿈꾸러기’라는 말은 처음 본다.
강진군의 대표 상징물은 청자. 대구면에 청자 도요지가 있었다. 지금도 강진에서는 고려청자의 꿈꾸는 듯 아련한 청자 빛을 재현하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다.
강진시립의료원 언저리의 ‘삼일운동기념비’
이렇게 고즈넉하고 정갈하면서도 간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념비를 보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강진 시립의료원 뒤뜰의 벚나무. 강진에서는 가장 빨리 개화한 나무인 것 같다.
강진고등학교 정문 앞에 내걸린 포스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이제 너를 부르마. ‘정의, 자유, 자주, 평화’ - 전남교육청, 강진고등학교.”
나는 해직동지 장석웅 선생이 전남교육감이 된 뒤의 신선한 변화를 강진고등학교 포스터에서 읽는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어느 학교에서도 이런 문구를 구경할 수 없었다.
강진고등학교 옆에 ‘1318 해피존 푸른누리 지역 아동센터’
현수막 ‘2018년 복권기금 아동 청소년 야간 보호사업’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여기 다니는 어린이들은 참으로 행복하겄다. 어린이집 이름이 한자나 영어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순우리말이다.
푸른 + 들 + 어린이 + 집 = 푸른 들 어린이집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순우리말을 널리 써야 하는 것이 우리말 사랑의 기본이라고나 할까.
“서문 맛집” 가게 간판을 보니 강진에도 읍성이 있었던가 보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은 성의 기본이었다.
영랑 생가 들머리.
영랑 생가 가까이에 조각상. 그 위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읽어본다.
[3.1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
[시문학파 시인 김영랑 건국포장, 정지용 금관문화훈장 추서 경축]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을래요.
모란은 해마다 다시 피건만 한번 떠난 임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영랑생가 옆의 ‘시문학 기념관’에 걸린 백석 시인의 사진. 나는 특히 백석의 시를 좋아한다.
- 열여섯에 40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여우난골족)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
영랑 생가. 문화해설사인가, 누군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 한 장 부탁했다. 내가 얼결에 전원 스위치를 셔터라고 가르쳐주는 바람에 그 아주머니가 셔터라고 누르기만 하면 렌즈가 닫혀버려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늙을수록 헷갈리는 것이 많아진다.
영랑 생가. 모란이 피려면 아직 멀었지만 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동백꽃도 저 꽃처럼 재래종 외꽃이 질 때에는 톡 떨어지고 뒤끝이 깨끗한데, 요즘의 겹동백은 필 때는 화려하지만 시들 때나 떨어질 때나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영랑 생가 입구.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을 듬뿍 받으며 노란 장다리꽃이 활짝 피어났다.
길거리에 내걸린 포스터.
[ 제22회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 4.19 - 21. ]
강진읍은 옛 성의 자취가 묘연한데 병영성은 성 전체를 복원해서 한 번 가 볼만하다.
강진군청. [ 남도 답사 1번지, 맛의 1번지. 더불어 행복한 강진, 군민이 주인입니다 ]
현수막 세 개를 길게 늘어뜨렸다.
- 전국 지방재정계획 우수사례 대통령상 수상. 시상금 5억 원 확보
- 강진읍 도시재생 뉴딜사업 선정. 예산 55억 원 확보
- 강진읍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선정. 예산 150억 원 확보.
왼쪽 초가집이 사의제(四宜齊). 기와집들은 사의제 한옥체험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 강진 땅에 유배를 와서 처음 머물렀던 주막집. 주인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아 1805년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단다.
사의제란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히, 언어는 적게, 행동은 무겁게.
희게 빛나는 건물 뒤의 희미한 기와집이 향교인 듯. 걷기에는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멀리서 줌을 잡아당겨 찍었더니 흐릿하게 나왔다.
1398년에 처음 지었다 함.
은파 어린이집. 이름도 참 예쁘다. 내가 나주교회 유치원에 다닌 게 1951년, 전쟁 중이었다. 학예발표회 때 내가 나주극장에서 독창을 했다. 68년 전 이야기다.
은파 어린이집 아이들을 보니 다시 68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또는 지금이라도 다시 유치원 선생을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
“음, 참 잘했어요. 다시 한 번 더 불러 봐요.”
“야! 너는 누구한테 배웠는데 그렇게 춤을 잘 추니?”
“뭐라고? 엄마 아빠가 싸웠다고? 그런 때는 니가 목청껏 우는 거야.”
아주 고풍스런 소규모 미나리꽝. 요즘의 대규모 미나리 재배단지 말고 이런 아담한 미나리꽝 미나리가 더 맛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요즘 봄 미나리강회 참 연하고 보드랍고 맛날 텐디....... 미나리 낙지 초무침도 아주 그냥 끝내줄 때인디.......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늘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