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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흥 무관학교와 만주 군관학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만주 벌판을 지나며 나는 그 노래를 나지막이 불렀다. 일송정은 어디쯤일까. 소나무는 늘 우리와 함께 했다. 소나무 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고 배고플 때 소나무 껍질을 먹고 죽어서도 무덤가에 소나무가 자리를 지킨다. 이승을 떠나서도 소나무가 영혼을 지킨다. 이는 단순히 나무로서가 아니다. 삶의 원천으로서 푸른 정기와 올바른 기상 , 선비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 불현듯 혜란강이 보고 싶어진다. 용문교도 용주사도...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거친 꿈의 그들은 지금 우리의 산하를 지켜보는가. 이 가곡은 독립군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지켜보다 당시 윤두영씨가 작사를 하고 조구남씨가 목단강에서 작곡한 곡이다.
광복70주년을 맞아 극장가에 ‘암살’(감독 최동훈·제작 케이퍼필름)이라는 영화가 연일 만원이다. 영화적 완성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가치 부여로 또 다른 감동을 낳았다. 1000만 관객 고지를 향해 순항 중이다. ‘암살’ 속 곳곳에 숨어 있는 신흥무관학교, 간도참변, 의열단, 지청천부대, 김원봉, 김구, 데라우치 등 영화 ‘암살’이 던지는 메시지가 준엄하다. ‘암살’의 메가폰을 잡은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의 단초를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됐다고 한다. 이희영은 바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 운동가인데 그의 친손자가 나와는 아주 막역한 사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니 꽤 깊은 오랜 인연이다. 동네서 국회의원을 내리 5번이나 한 친구는 얼마 전 야당의 원내대표도 했었다. 그 친구는 어릴 적 아픈 추억이 하나 있다. ks출신이니 그 시절도 공부는 말할 것도 없이 잘했다. 아니 뛰어났다.
우리 때는 한 여름 멱을 감으러 냇가로 자주 나갔었다. 그 친구는 당시 학교반장을 할 때인데 의젓해서 친구 엄마한테 친구를 잘 데리고 놀라는 부탁까지 받았던 모양이다. 그 친구는 동네 친구이기도 하지만 담임선생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같이 냇가로 간 친구가 물에 빠져 그만 죽고 말았다. 친구는 대학 무렵부터 다시 안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소싯적 같은 반 여자아이였던 친구와 결혼을 했다.
솔직히 나는 친구가 당시는 명문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단순히 공부 잘하던 아이로 말수가 느려서 양반출신이 아니겠는가 하는 딱 그 정도 였다. 신문지상에 나와 있듯 독립투사 이희영의 친손자인줄은 나는 꿈에도 생각지를 못했다. 전 재산 600억을 독립운동에 바친 독립운동가,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 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나는 안양에 오르면 친구네 집에서 자곤 했다. 어울리다보면 갈 곳이 마땅치 않고 그런 때는 친구 집이 오히려 편했다.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 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 해서 반지가 안 들어갈 정도라 하더니 친구 부모님도 서민적이며 무척 검소한 삶을 사신 수수한 분들이다. 조선시대라 하면 당연 한양 땅 4대문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사실 그래서 나는 친구네 집안이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하지를 못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 친구네 역시 힘겹게 안양에 살았지만 자랑삼아 조상을 말하거나 너스레를 떠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난 친구가 가끔 TV에 나올 때 더딘 말투 때문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을 하곤 했다. 요즘 매체는 빠른 시간 내 자기 할 소리를 순식간에 다 털어놓아야 하는 제한성이 너무 높다.
인권변호 출신에 비주류로 담금질이 오래 걸렸고 정이 많아 일정이 늦어져 시간도 못 지킨다는 소리도 들은 친구지만 친구는 말보다는 행동을 그때그때의 응변이 아니라 뿌리 깊은 나무 같이 생각이 깊고 누구보다 진실된 입이 무거운 친구다. 올바르고 곧은 선조의 뿌리 깊은 의식처럼 나라와 약한 자와 가난을 먼저 생각하는 가슴 따뜻한 친구다. 늦은 귀가에도 꼭 시장통 야방을 돌아 집으로 향하는 투철한 의지를 갖은 친구, 대기만성 형으로 언젠가는 큰 빛을 보리라 늘 생각하는 친구다.
아마 영화 [암살]을 본 사람들은 속사포(조진웅)가 거사에서 빠지려고 하다가, 과거 신흥무관학교 시절 '나뭇잎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소원' 이런 글을 쓰지 않았느냐는 추궁에 결국 참여를 결심하게 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그 대사는 1919년 7월 이후에 쓰여진 김경천의 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름이 장차 끝나가고 초가을이 오려고 한다. 여러 유지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면 군사행동을 하기가 불리하니 어서 무기를 준비하여 가지고 압록강을 한번 건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압록강은 고사하고 개천도 못 건너가겠다고 생각한다."
김경천, 그는 본명이 김광서이며 '백마 탄 장군'이라 불리웠던 인물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대한제국 말기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나왔었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당시 독립군 지도자 가운데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꼭 필요한 교관이었고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의 탄압을 받았고 출옥 후 가족이 이미 강제이주당한 카자흐스탄으로 갔고 거기서 간첩죄 누명을 쓰고 강제노동형을 받다가 1942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일기 [경천아일록]은 소련이 압수했다가 1959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후, 2005년 무렵 가족들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정보국이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출신이 독립군을 때려 잡자는 일본 육사지만 그의 행실은 올발랐다. 사람은 결국 어느 마음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고난 속에 나라를 찾겠다고 추운 시베리아를 떠돌던 독립군들을 얼마나 알고 또 기억하고 있을까. 명동성당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거부 ,높은 신분에, 명망있는 집안, 모든 것을 버리고 차가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한 가족, '일본 놈의 노예가 되어 호의호식 하느니 독립을 쟁취하는 데 가문의 모든 것을 바치자.'그렇게 신흥무관학교는 3500명의 독립군을 길러냈고 독립투쟁의 뿌리가 되었다. 학비와 식비는 전액무료, 그로 그 일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형제 중 4명이 항일운동 중 사망을 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1907년 신민회 발족과 헤이그밀사 파견 주도, 1911년 신흥무관하교 설립, 1919년 중국각처로 전전하며 독립운동. 1924년 다물단 조직, 1929년 김좌진 장군과 재민 한족연합회 조직, 그러나 1932년 일본경찰에 잡혀 끝내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몇 어록을 다시 떠올려 본다.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희망으로 양식을 삼아 먹지 않는 밥에 스스로 배부르고 곤란을 주춧돌로 삼아 집 없는 집을 여기 지어 올리노니 이에 남만주 사양보에 여러 사람의 열띤 마음을 융합해서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고 이름하기를 경학사라 한다. - 만주에 세운 독립운동 학교 경학사 설립문 중에서 "이젠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다. 심부름도 독립을 위한 일인데, 앞으로 노비 때 행색을 하면 엄벌하겠다." - 신흥무관학교에서 원래 종이었던 이를 꾸짖으며 "조국 광복의 큰 계획을 이룬다면서 빈손에 알맹이 없는 얘기만 하면서 북쪽 땅 한 귀퉁이에 모여 있으니 어느 세월에 무슨 기회를 답답하게 앉아 기다린단 말인가? 동지 여러분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몸을 보호하시오. 나는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해 오겠소." -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체포/암살한다는 소식에 망명 계획을 세우는 동지들 앞에서>
나는 신흥 무관학교를 말하자면 만주군관학교도 같이 떠오른다. 같은 무관 양성소인데 애국의 길로서는 천양지차로 다르고 해방 이후 그들이 걸어간 길도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솔직히 이 생각만 하면 화가 난다. 이번에 장춘에서 본 만주국 본산, 만주군관학교란 만주국이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를 말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경우 조선이나 대만처럼 총독을 파견하지 않고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청조(淸朝)의 폐제(廢帝)인 선통제(宣統帝), 즉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이라는 자리에 앉히고는 관동군 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수도는 신경(新京, 현 장춘),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상징하는 문양. 가운데 5색 별은 '5족(五族)'을,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의 주곡인 '조(좁쌀, 小米)'를 상징한다. 가운데 오색별은 만주국의 슬로건인 ‘5족협화(協和)’를 상징하는 것이며, 5족(五族)은 만주족, 한족, 몽고족, 조선족, 일본족 등을 말한다.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지역의 주식(主食)인 조(좁쌀, 小米)를 그린 것이다.
만주국이 처음 세운 사관학교는 1932년 옛 수도인 봉천(奉天, 현 심양)에 세운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로 흔히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한 후 군벌 장작림이 설립한 목단(심양의 옛 이름)의 군관학교를 접수하여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훈련과정을 개설했다. 조선인은 4기생부터 입교할 수 있었는데, 1939년 만계(滿系) 군관후보 9기, 일계(日系) 군관후보 11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군수학교 졸업생 포함) 조선인으로는 3기 김정호 1명, 4기 강재호·김응조 등 7명, 5기 정일권·김백일·김석범·김일환·신현준 등 18명, 6기 양국진·최남근·박승환 등 7명, 7기 최철근 1명, 8기 석주암 등 3명, 9기 백선엽·윤수현 등 2명으로 총 39명 정도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린다. (신경 교외 라라툰(拉拉屯) 지역에 위치한 옛 신경군관학교 시설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2기생이 입교한 1941년 6월 20일 거행됐다. 조선인은 초기에는 만계로 입학했으나 1943년 5기생부터는 일계로 편입되었는데 졸업 후 일본군 예비역 소위 편입과 동시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때까지 만계 7기, 일계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임관은 3기생까지였다. 신경군관학교(경리학교 출신 등 포함) 출신으로는 1기생은 김동하(해병 중장)·윤태일(육군 중장·국회의원)·방원철(육군 대령)·이기건(육군 중장) 등 13명, 2기생은 박정희(육군 대장·대통령)·이한림(육군 중장·건설부장관), 김재풍 등 11명, 3기생은 최주종(육군 소장·주공 사장)·강태민 등 2명, 4기생은 예관수·장은산 등 2명, 5기생은 강문봉(육군 중장·국회의원)·황택림 등 5명, 6기생은 김동훈·육굉수·김윤근(해병 중장, 호남비료 사장)·김학림 등 11명,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여주대 학장) 등 4명으로 전체 졸업생 수는 48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북한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창군 초기 군부 내에서 ‘만주파’로 불리며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함경도파,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신경2기 출신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동하·박임항·윤태일·김윤근 등 신경 출신 선후배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여 도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은 박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해 이른바 ‘반(反)혁명사건’으로 몰려 권력에서 제거됐는데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부른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는 여부를 놓고 늘 논란이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전적으로 시대적 여건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군부는 신성불가침 지대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창군의 주역’으로 이미 한국군의 상층부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반민특위에서 그들을 체포,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출신들은 본의 아니게 반민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다만 2005년에 제정된 ‘일제 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서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출신자들을 조사대상자로 규정했다. 물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단서조항은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하사관까지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실로 안타깝다 싶은 것이 역사의 정통성이다.
삶의 기반이 열악하고 무너져버린 애국지사 독립군들의 후손은 다양한 패러다임의 산업사회에서 왜소해지고 외면당하고 소리 죽여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매스컴을 보면 친구의 표현이 거칠다고 하고 너무 급진 적이 아니냐 하는 말도 나온다. 친구는 90%의 독립애국지사 후손들은 가난속에 살고 있으며 정 반대로 애국애족을 헌신짝 보듯 한 인물들은 일제 때부터 탐식과 탐익을 도모하여 세상을 아우르듯 지금 떵떵거리며 살고 있음을 늘 개탄했다. 매국노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주로 큰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일본에 아첨하여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그 자식들은 지금 정관계를 주름잡고 있다. 우리의 그릇된 역사관과 모순적 역사적 단절은 많은 왜곡을 낳고 '엽전이 다 그렇지 뭐.'하는 안일한 의식과 그릇된 이기심을 양산하고 있다. 떳떳하지 않아도 괜찮다 싶은 현실을 스스로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것인데 잘만 살면 되지. 독립군의 자식이라고 누가 거들떠나 보는가. 역사가 바로 서야 국가의 백년대계 또한 탄탄해진다. 36년의 긴 일제시대, 먹고살자니 아부하고 어쩔 수없이 창씨개명도 하고 들쥐처럼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아둔한 백성의 세월일 뿐 국가란 큰 틀에서의 결곡한 역사는 제대로 평가되어야 하고 참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편하고 좋다고 그것으로 족하고 세상만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가의 번영은 단순히 물질에 있지 않다. 가슴 아프고 힘들어도 값이 아닌 가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을 정녕 잃으면 갖출 수 없으며 정당성은 사라지고 만다. 나치는 지금도 찾아 단죄를 하고 있다. 국가의 올바름이 바로 정치이고 정치는 명분으로서 올바른 정통성 확립에 있다.
당시 행정력이나 군부를 통솔할 인재들이 없다보니 그들이 기여를 했다고 하여 무마되고 넘겨질 일이 아니다. 최소한 속죄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앞으로 누가 애국지사가 될 것이며 조국을 마음속에 기리며 찾겠는가. 일송정 푸른 솔은 바로 우리 가슴의 올바른 정신 속에서 굳건히 자리한다. 결국 올바른 국가관은 국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자기가 설 땅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 나는 이 땅위에 엄연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올바른 정신 그리고 똑바른 행위로 거듭나야 할 우리의 대한민국이 아닐까. 난 그것이 실로 안타깝다. 혹시 기억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노덕술을. 그는 해방 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주선으로 수도 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어 경찰 내 반(反) 이승만 세력을 숙청하고 좌익분자를 검거하는 명분으로 다시 독립 운동가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앞장서기도 했었다. 우리 역사는 어디서 부터 이토록 꼬이고 잘못된 것일까. 정통성은 올바른 의식의 확립에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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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우리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게 있다. 그들은 게릴라 부대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나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인민해방군, 소련의 침공을 막아낸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과는 다르다. 게릴라는 원래 일정지역을 자신들의 ‘해방구’로 만들고 그를 토대로 현존하는 체제와 대립하는 반체제를 만든 다음 이를 국가와 같은 거대 정치체로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만주에 형성된 독립군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것이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게릴라는 주로 적군의 후위부대나 보급부대를 골라 공격하는 비정규전을 치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독립군은 비록 전략상 유인책과 기만전술을 적절히 구사하기는 하였으나 적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병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당당히 정규전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조직임을 자임하며 병영을 운영하고, 엄격한 편제를 유지하는 정규적 군인들이었다.
낮 동안 생업에 종사하던 마을 주민들이 밤에 유격대원으로 변해 활동할 수 있는 것이 게릴라였다면, 독립군은 비록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규군으로서 당당히 일제의 군대와 맞선 것이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 1919년 3월1일 전국에서 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으나, 조선은 독립되지 못했다. 맨손으로 일어선 조선 백성에게 일제는 대포와 총칼로 대응했다. 이후 독립운동도 무장투쟁으로 변해갔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는 점차 무장 의병운동으로 일제에 맞섰다. 식민지 조선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동포가 근간이 되었다. 당시 한국독립군의 주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서로군정서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였다. 서로군정서는 요령성에서 활동하였으며, 북로군정서는 길림성에서 활동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는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산 속이었다.
일제와 맞서던 때 북로군정서군은 백두산을 향해 이동을 하였고 청산리에 이르러 전투가 벌어졌다. 1920년 10월 21∼26일 길림성 화룡현 (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일본군과 싸워 대파했다. 대첩의 주역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였다. 당시 청산리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철기 이범석은 이렇게 묘사했다. 청산리는 삼도구(三道溝)라고도 하는데 외곽에는 두 갈래의 큰 길이 있어 한 갈래는 남으로 두만강에 통하니 바로 그 강 건너에는 조국 땅 무산군(茂山郡)이 있다. 청산리 서쪽은 충신장(忠信場)과 맹가장(孟家莊)이니 이곳은 중국인들의 고장이다. 이 청산리 일대의 농사의 주인은 모두가 우리 교포들이었다.
이에 앞서 일본군과 맨 처음 벌어진 전투는 1920년 6월 4일 화룡현 길림성에서 벌어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다. 소규모 교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싸움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둔자전투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투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고 귀환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군이 1개 중대 병력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약 4백여명의 병사로 편성된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삼둔자 전투 이전부터 두만강을 넘어와 국경에 배치된 일본군을 수차례에 걸쳐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갑산·혜산·자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으며, 만포진에서는 7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인 독립군은 천 2백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백여 명 정도였다. 당시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에 비밀행정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세금을 걷어 행정력과 무장력을 뒷받침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곧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독립군 장병들은 무기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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