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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시 4집 해설>
삶에 뿌리내린 서정과 반성적 인식
박 몽 구
(시인 ․ 문학평론가)
역사적으로 문학동인 활동은 전위적이고 비정규적인 문학 행위를 전제로 한다. 한국전쟁 시기에 즈음한 ‘후반기’ 동인들의 활동에서 보듯이 기성의 문단에 편입되거나, 이른바 몇몇 문단의 실력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매체를 통해서는 자신의 문학적 신념을 펼칠 수 없을 때 비상한 방법으로 문학적 행동을 펼쳐 나가고자 하는 것이 동인 활동이 본질이다. 1980년대의 엄혹한 상황하에서 기존의 문예지들이 지극히 시대 순응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살아있는 정신을 지닌 이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 같은 문학적 상활을 타개하기 위하여 결성된 ‘5월시’와 ‘시와경제’ 동인들의 시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점이 적지 않다. 1980년대 당시 각종 신문과 방송들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문학지들도 일제히 시대를 직시하는 주제와 소재를 담은 작품들을 암묵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런 가운데 동인지는 살아있는 정신을 지닌 이들에게 한 출구가 되어 주었다.
2천년대 우리 시단은 위에 적은 1980년대의 환경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시 전문지만 하더라도 200종을 훨씬 상회하는 등 지면을 크게 넓혀졌고, 정권 차원의 검열이나 규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양적인 팽창과 겉으로 팽배한 표현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결코 녹녹한 시단 환경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최근 들어 우리 시단은 지나치게 특정 시인이나 그룹 중심으로 전개되는 면이 강하다. 즉, 이른바 미래파로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이 횡행한 것도 그 같은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에 따라 2천년대의 우리 시는 다양성이 크게 훼손되고 주로 극단화된 도시 문화와의 갈등을 드러낸 포스트모던한 정서의 시들만이 크게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시 전문지들이 많이 발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 지면의 갈증은 더해가는 느낌이다.
역으로 이런 때일수록 지치지 않고 처음 시를 만났을 때의 감동을 간직하면서 함께 시의 길을 동지들의 중요성은 전에 없이 더해 보인다. 시적 이데올로기를 온전히 함께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처럼 하루가 다르게 시단 풍토가 바뀌고 특정 매체에 따라 시인의 경중이 농단되는 시대에는 더욱 지치지 않고 시의 위의를 지켜갈 매체의 확보 필요성은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4번째 동인지를 발간하는 ‘마루시’가 갖는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 동인이 갖는 동질성은 예전처럼 첨예한 시적 이데올로기를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늘의 시적 풍토에 정면으로 맞선 전위 의식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진솔한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우러난 시적 창작욕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같이 불타는 창작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의 전위에 나서거나 무국적의 시를 양산하는 데 부심하기보다 보기 드물게 순수한 시적 열정을 간직하며 시작에 정진해왔다. 이 같은 점들에 주목하면서 이번 마루시 동인지 4집에 실린 시들을 일별해 보고자 한다.
일상을 새롭게 들여다보다
마루시 동인들의 시를 접하면서 우선 발견되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진득하게 삶을 꾸려가면서 길어올린 체험들을 즐겨 시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일상성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시선과 함께 물질에 매여 있기보다 반성적 인식을 통해 스스로를 부단하게 일신시켜 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일상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로, 마루시 동인들은 흔히 서정시들이 택하기 쉬운 꽃과 나무 등의 시어나 어감이 좋은 아어(雅語) 등을 배제하고 있다. 대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일상어를 즐겨 시어로 채택하고 있는 걸 본다. 엘리어트나 파운드 등 이미지즘을 주창한 일군의 시인들이 명백하고 적확한(dry-hard) 시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거나, 리처즈(I. A. Richards), 랜섬(J. C. Ransom), 브룩스(C. Brooks) 등 영미 신비평가들이 현대시에 일상어를 채택할 것을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에서 일상어를 택한다는 것은 1:1로 대응하는 사전적 지시어가 아닌 다의성이 구현된 시어를 얼마나 사용하고 있느냐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다.
마루시 동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어들은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포착된 일상어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지시어에서 벗어나 풍부한 내포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게 돋보인다. 시를 쓰기 위해 사특한 소재를 찾는 데 분주하지 않고, 스스로 꾸려가는 일상사의 재해석을 통해 주제를 견인해내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죽겠는데
어쩌자고
개나리는 샛노란 빛으로 눈길을 잡아끌고
매화는 자꾸만 향기로 말을 건네는 거야
우산 챙길 시간도 없는데
어쩌자고
봄비는 내리고 야단이야
볼일 보고 밑 닦을 시간도 없는데
어쩌자고
진달래는 온산에 불을 놓아 불러내고
벚나무는 교실 안까지 연분홍 연서를 보내는 거야
빨래할 시간도 없는데
어쩌자고
흙탕물을 튕기고 난리야
-강진순, 「어느 여교사의 봄」 전문
가리봉동 124번지 일대에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서
멀쩡한 집을 버리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
비둘기 가족만이 찬 가을 밤을 견디고 있다
남부순환로 고가다리 밑에 집을 틀고
녹슨 철근 사이에도 아늑한 둥지를 튼다
라면 박스 아파트에 알을 품고 따뜻한 잠을 잔다
꿈 없는 잠을 베고 꿈을 꾼다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도
눈부신 햇살 슈퍼맨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울창한 빌딩숲 우듬지를 한 바퀴 휘돈다
가장 높은 십자가 위에 올라 앉아
그 옛날 성화 위를 날 때처럼 행복해하다가
석면 가루 뒤덮인 채
재개발 공사가 멈춘 자리
커다랗게 뻥튀기 된 꿈만 많이 자라는
가리봉동 일대에 다시 내려앉아
라면 박스 아파트 담벼락에 언 발을 닦는다
눈뜨면 독에 물든 회색 도시 속에서
온종일 종종 걸음으로 배회하며
성호도 긋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희뿌연 희망을 물어다가
철거지에 새로운 집을 짓는다
-김선, 「가리봉동 비둘기」 부분
위에 든 시의 작자들은 시선을 먼데 두지 않고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출근길 풍경에 대한 묘사를 통해, 분주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정경을 통해 자신들의 사유를 견인해내고 있다.
강진순은 일선학교 교사로 몸담고 있는 사람인데, 교단에 서기에 앞서 벌써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분주함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다. 화자는 첫 대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죽겠는데/ 어쩌자고/ 개나리는 샛노란 빛으로 눈길을 잡아끌고/ 매화는 자꾸만 향기로 말을 건네는 거야’라고 설유함으로써,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계절의 표정마저 제대로 읽을 수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직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출근시간에 대기에 빠듯한 풍경을 넘어,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많다는 페미니즘의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우산 챙길 시간도 없는데’ 내리는 봄비, ‘빨래할 시간도 없는데’ 튀기는 흙탕물 등의 알레고리는 개인사로 인한 분주함을 넘어 가족과 이웃까지 넉넉하게 챙겨야 하는 ‘코라’적 모성을 잘 보여준다. ‘코라(cora)’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문예이론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신을 혁신하기 위한 대사회적 투쟁을 하면서도 돌보아야 할 아이와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보면 넉넉한 품으로 감싸지 않을 수 없는 이중적 여성상을 의미한다. 강진순은 이같이 코라적 여성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면서도, ‘볼일 보고 밑 닦을 시간도 없는데/ 어쩌자고/ 진달래는 온산에 불을 놓아 불러내고/ 벚나무는 교실 안까지 연분홍 연서를 보내는 거야’라는 물음을 통해, 교사로서 아이들을 도야하는 일 못지않게 비본질적인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상을 비판적으로 투시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평범하게 전개되는 일상의 배후에 숨은 진실을 끌어냄으로써 삶이 곧 시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다.
김선은 급속하게 변모되어 가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가리봉동 일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가리봉동은 산업화의 전성기 수출하기 위한 옷가지와 가발 등을 생산하는 공장지대가 밀집해 있고 시골에서 올라온 산업역군들이 밀집해 살던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인구 밀집형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기술집약형 산업들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그에 따라 재개발 붐이 일면서 토박이들 가운데 설자리를 잃은 이들이 적지 않은 곳이다. 시인은 출퇴근길에 만나는 전철역 부근의 정경 묘사를 통해 현실을 투시하는 한편 인간다운 삶의 길은 어떠해 하는지 모색하고 있다.
시인은 ‘가리봉동 124번지 일대에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서/ 멀쩡한 집을 버리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 비둘기 가족만이 찬 가을 밤을 견디고 있다/ 남부순환로 고가다리 밑에 집을 틀고/ 녹슨 철근 사이에도 아늑한 둥지를 튼다/ 라면 박스 아파트에 알을 품고 따뜻한 잠을 잔다’라고 묘사함으로써 토박이들의 설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사정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비둘기 가족’을 환유로 삼아, 개발과 투기의 열풍을 넘어 작은 배려만으로도 가나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따스한 삶의 공간을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을 펼쳐 보인다. ‘고가다리 밑’, ‘녹슨 철근 사이’, ‘라면 박스 아파트’ 등은 비인간적인 투기를 넘어선 인간적인 공간의 환유이다.
화자는 결구에서 ‘눈뜨면 독에 물든 회색 도시 속에서/ 온종일 종종 걸음으로 배회하며/ 성호도 긋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희뿌연 희망을 물어다가/ 철거지에 새로운 집을 짓는다/ 나도 철거지 속 남은 집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라고 언술함으로써 날호 비인간화되어 가는 도시를 새롭게 건축하기 위해서는 번쩍이는 재개발, 눈앞의 이익만 노리는 독점적 주거 조성 못지않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견인해내고 있다. 생경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실감나는 환유를 통해 은근하게 시인의 내면을 표백해내는 역량이 돋보인다.
오늘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담아내다
이와 함께 이번 동인시집을 통해 마루시 동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삶을 반성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점들도 눈에 띈다. 소시민적 인식하에 자신들이 꾸려가는 삶에 안주하기보다 뭔가 모자람은 없는지 새롭게 들여다보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고정된 눈으로 세계를 보기보다 새롭게 보고, 안주보다 일탈을 꿈꾸는 것은 시인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루시 동인들의 시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소시민적인 안주보다는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손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비스듬한 안락의자에 누웠다 천정은 높고 창문은 비좁았다 식은 커피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지난 풍경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기억이 몽롱해졌다 균열은 몸을 둘러싼 지붕이 아니라 몸을 촘촘히 떠받들고 있는 기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겨진 쪽지를 건네주며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내 유년시절도 먼지처럼 떠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누이를 위해 지붕이 불타기를 기도했다 흰 연기가 꼬리곰탕처럼 끓어올랐다 썩지 않은 누이가 썩은 지붕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속에서 오물거렸다 지금까지 내밸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상담료를 지불했는데 커피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놓았다
-김연종, 「카우치에서 시를 읽다」 전문
김연종은 2천년대 들어 새롭게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의사 시인으로, 우리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의료 현장의 경험들을 시로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다. 내과 임상의로서 자신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환자들의 외양을 소재로 삼기보다 인술(仁術)이라는 외약 속에 은폐된 비인간화, 치료 못지않게 깊어져 가는 내면적 상처와의 괴리 등이 그의 주관심사로 보인다. 이번 동인지에 선보인 몇 편의 신작들 역시 그 같은 사유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번 발표작들의 제목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카우치’라는 말은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안락의자로 자유로운 연상을 돕기 위해 침대 모양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의자이다. 하지만 김연종의 시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같은 사전적 의미를 넘어 ‘카우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갈망하게 마련인 구차스런 삶과 단절된 안란 및 현실에서의 일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환기한다. 즉 카우치는 고급 소파 브랜드로, 주말에도 외출을 하지 않고, 소파나 침대에 누워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카우치 포테이토족의 전유물이다. 이들 카우치 포테이토족은 유즈브레인넷을 즐겨 사용하는데, 집게손가락에 '모션링'을 장착하면 손가락만으로 마우스를 제어할 수 있으며, 모션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나 게임기 등의 제반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다. 이처럼 안락한 현실 이면에 숨어 있는 위축되고 황페한 정신을 함축하는 상징어로 파악된다.
위에 든 시는 정신과 병원의 진료 풍경을 소재를 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 가치가 몰각된 현대인의 삶을 이중구조로 알레고리화하고 있다. 화자는 첫 부분에서 ‘식은 커피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라고 언술함으로써, ‘김’으로 상징되는 모호함으로써 점철되어 있는 가운데, 본말이 전도된 삶에 끌려가는 현대인의 삶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라는 말로 암유하고 있다.
상징론자들은 긴 문장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말들만으로도 화자의 내면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 분석가들은 현대를 가리켜 ‘기표(記表) 우위의 시대’라고 말하는 데, 의미 언어인 ‘기의(記意)’가 아닌 그 수단인 기표가 더 우선시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도 ‘이미 죽은 사람’, ‘먼지’, ‘썩지 않은 누이’, ‘썩은 지붕’ 등의 시어를 통하여 표면적으로 누리는 삶과 정신적 목표의 불일치 및 불안정성으로 인하여 끝없이 노마드(nomad; 유랑, 유목)를 체질화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풍경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구로 가면서 화자는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속에서 오물거렸다 지금까지 내밸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상담료를 지불했는데 커피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놓았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가치는 뒤로 물러난 채 겉핥기식의 사랑과 그럴듯한 말, ‘껌딱지’로 상징되는 수명이 짧은 천박한 상품들만이 두드러진 현대의 우화로 읽힌다. 김연종은 의료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내면의 공간을 활짝 열어 현대의 허상을 반성적 인식으로 들여다보는 안목을 지닌 시인이다.
사철 푸르고
빈틈없는 나무에
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김정원, 「여백」 전문
동두천행 전철을 탄다.
발 디딜 틈 없는 평일의 아우성을 밀친다.
어린 시절 윗목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자양滋養의 햇살로 뿌리를 정하고
이마 가득 날개를 꿈꾸어야 할 때
내 삶의 늦은 약속이, 미로처럼
꼬불꼬불해진 지방질로 둘러싼 몸을 늘여
노후 된 균형을 지탱할 손잡이를 찾는다.
지상이 두려운 조선족 여자의 볼멘 목소리는
팔리지 않는 속도만 더듬다가
옆 칸으로 사라지고
방학, 도봉, 도봉산……. 지상의 날들을 지나고 있었다.
-박노복, 「피곤한 하루」 부분
김정원은 자연 속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면서, 현상 뒤에 숨은 철리를 예리한 안목으로 들여다보고 있고, 박노복의 경우에는 그가 몸담고 있는 삶에 한 풍경으로 담기지 못한 채 벌어지는 틈새를 잘 투시하고 있다. 두 시인은 행간의 여백을 아낌없이 남겨두는 간결어법, 군더더기 없는 일상을 묘사해 가는 완곡어법으로 두 시인의 레토릭은 사뭇 달라 보인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돔담고 있는 현실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보다 반성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맑은 눈이 숨어 있다.
선문(禪門)의 화두처럼도 보이는 김정원의 시들에게는 현실을 뒤집어보는 전복적 사유가 깃들어 있다. 화자는 ‘사철 푸르고// 빈틈없는 나무에// 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는 간결한 화법을 통하여, 이 세상에는 남의 경계를 넘어 제 몸에 맞지 않는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짧은 시이지만, 이 시대를 사람들이 숙명적으로 안은 채 살아가는 확장 의지, 출구를 모르는 욕망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경구이다.
박노복은 자신이 꾸려가고 있는 생활에 대한 보고서라고 보일 만큼 냉정한 시각으로 그의 동선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첫 대목에서 ‘동두천행 전철을 탄다./ 발 디딜 틈 없는 평일의 아우성을 밀친다’라고 언술함으로써, 여백 없이 꽉 짜인 일정표에 끌려다니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단 ‘전철을 탄 사람’을 환유로 삼았지만, 평행선을 그으며 끝없이 나아가는 철길과 함께 모든 것이 짜인 스케줄대로 진행되는 현대인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는 건, ‘ 아우성’, ‘미로’, ‘지방질로 둘러싼 몸’, ‘노후된 손잡이’, ‘팔리지 않는 속도’ 등의 시어들 통하여 화자의 현실 인식을 다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난 화자는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속도에 떠밀려 흘러가기보다 이에서 벗어나는 시간에 더 크게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꿈이란,/ 날개를 달자마자 불구의 나락 속으로/ 곤두박질치기 쉬운 것/ 햇살이 두려운 피곤은 다가오는/ 오후의 시간을 잡아두지 못하고/ 서둘러 지하철 계단을 내려온다’고 언술함으로써, 불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그만의 햇살을 더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시는 속도와 멈춤의 대비를 통하여, 집단화와 쏠림 현상에 편승하기보다 비록 낮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강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토실토실한
빵에
영화가 구워지고 있어
망루에 올라간 화염병은
아버지를 던지면서
즐거운 아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어
깜빡깜빡 신호등이
깜빡깜빡 우리의 얼굴을 씹어먹고
어느 날은
달력이 알통에 매달려
피크닉을 갈 것이야
소소한 빵 영사기를 굴리며
빨갛게 퍼렇게 익어갈 것이야
화가 난 잔디밭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어
물대포를 쏘는 농성자들
여기 더 이상의 천국이 없다는 듯
빨갛게 퍼렇게 낄낄대고 깔깔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토실토실한
빵에
영화가 구워지고
훈장을 달고 온 아버지는
스크린 속에서
빨갛게 퍼렇게 웃고 있어
-정연탁, 「말랑말랑 공산당 2」 전문
정연탁 시인은 헤체적 사유를 바탕으로 시적 사유를 펼치고 있다. 첫 대목에서부터 ‘토실토실한/ 빵에/ 영화가 구워지고 있어’라는 제시를 통하여 낮은 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워가는 ‘빵’과 ‘영화’는 함께 구워질 수 없다는 전복적 사유를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 꾸는 꿈과 현실은 같은 평면에 놓을 수 없다는 구조가 그의 사유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화자는 ‘망루에 올라간 화염병은/ 아버지를 던지면서/ 즐거운 아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어/ 깜빡깜빡 신호등이/ 깜빡깜빡 우리의 얼굴을 씹어먹고/ 어느 날은/ 달력이 알통에 매달려/ 피크닉을 갈 것이야’라는 제시를 통하여, 용산 재개발 현장의 갈등을 떠올리는 한편, 그것이 비극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어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이항대립어로 재구성하면 ‘화염병’, ‘아버지’, ‘비명’ 등의 시어는 우리 시대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시어들일 것이며, ‘신호등’, ‘달력’, ‘피크닉’ 등의 시어는 그 대척점에 있는 시어들일 것이다. 즉, 앞의 시어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하층민들이 아무리 망루에 올라가 멀리 보려고 해도, 그들에게 ‘피크닉’으로 상징되는 밝은 미래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비극적 인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갈등과 대립을 넘어 함께 잘 사는 밝은 세상으로 가야 하리라는 시인의 결의도 읽을 수 있다. 정연탁은 해체론적 방법론을 강구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이 시대의 낮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함께 그들에게 밝은 미래가 꼭 도래해야 한다는 사유를 행간에 함축하고 있다.
탄탄한 서정으로 세계관을 표현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마루시 동인들의 시에서 우리 시대에 걸맞는 탄탄한 서정을 만나게 된다. 흔히 서정시는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가 자신의 비련을 노래한 데서 보듯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이다. 서양의 경우 유사 이래 중세에 이르는 동안 영웅을 찬미하는 시나 신화(神話)를 담은 시, 극시 등이 주류를 이루었을 뿐 인간의 개인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는 극히 보기 드물었다. 개인의 감정이 중요시는 서정시가 시문화의 전면에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과 함께, 신과 전제적 권력으로부터 민중들이 벗어나면서부터였다. 서정시는 신이나 왕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가공된 감정이 아닌,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된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주로 산업사회의 산물이며, 개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읽는다.
고대에서는 서사시나 극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서정시는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으나 근대에 와서 포우나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 서정시는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 씌어진다. 개인적인 체험이란 말을 바꿔 말하면 주관적임을 뜻한다.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抒情詩集)』의 서문에서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했다.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는 말이다. 그의 시의 주제는 시의 모든 고전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시는 ‘인간의 산 언어’로서 양치기나 농장에서 일하는 비천한 사람들의 언어까지도 구사하여야 한다고 주장된다. 오늘날 워즈워드나 콜리지의 시적 견해는 감정 과잉의 낭만주의로 폄훼되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담이나 신화 등 비현실적인 소재에서 탈피하는 한편, 가난한 농민과 평민의 편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서정시는 흔히 문예사조상의 낭만주의와 한 묶음으로 논의되기도 하는데, 이 사상은 영국의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으로 문명개화의 사상과 자유주의 정신의 고양과 질풍노도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개인주의, 자연숭배, 원시주의, 중세와 동방에 대한 관심 등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이상주의, 자유사상과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한 역설적 경향, 정치적 권위와 사회관습에 대한 반항주의, 육체적 정열의 고양, 정서와 감정 자체를 순화의 경향 등이 나타나고, 초자연적이고 병적이고 우울증에 대한 계속적 유지경향 등으로도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이후 들어 비로소 장르로서의 서정시가 확립되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김준오의 경우에는 서사나 극과 구분되는 시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서정시는 근대 정신의 산물인 자아를 진솔하고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장르라고 하겠다. 서정시의 개인의 희로애락의 감정 가운데서도 정제된 것을 풀어내는 형식이다. 또한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 정신 또는 시적 비전이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마루시 동인들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공통점을 갖는다면, 현실을 새롭게 보려는 서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꽃과 나무, 고향 등 정서적인 소재들을 시의 바탕으로 삼은 시들이 적지 않지만, 그보다는 개인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세계관,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탄탄하게 담아내고 있는 점들이 동인 의식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흔히 전통시, 순수시 등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타성적인 삶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하여는 서정시의 본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햇빛과 자줏빛이 만나 한 세상 이룬
등나무 아래,
하늘 한 켠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한 역사役事를 본다
소리 소문도 없이
한 세상 열어가는 등꽃의
역사歷史를 읽고 또 읽는다
등꽃 역사의 행간 속에서
등 따순 햇빛과 등 시린 달빛으로
번갈아 천 번쯤 두들겨 맞고서야
꽃잎이 피었다는
등꽃의 야화를 본다
-박백남, 「등꽃 아래서」 부분
마악 나뭇가지 사이로 발을 내뻗어
나뭇잎마다 발자국을 환하게 찍고 있는 아침 해를 바라보다 문득
저 텅 빈 허공이
해의 발자국을 나뭇잎까지 끌고 온 길이었음을
본다.
그 길 위로
또 하루 고단한 삶을 묻으며
가볍게 발을 내딛는 한 무리의 새떼들
스스로 제 몸을 열어 길이 되어준 허공엔
비와 바람과 온갖 소리들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의 흔적을 묻어두었을까
손가락보다 가는 나무의 몸에서
수천 수 만송이 꽃송이를 끄집어내고 열매를 둥글게 끼워내는
허공의 저 부드러운 손길
땅속 깊이 겨울잠에 든 나무들 뿌리를 깨워
여름내 한 뼘씩이나 일으켜 세우더니
생을 다한 잎새들의 마지막 슬픔까지
가만히 끌어안는 허공의 가슴팍
잎새들은 더 진한 슬픔의 빛깔로 무너지고
잠시 저 슬픔 쪽으로 살포시 마음을 기대었을 뿐인데
기우뚱 기울어지는 계절로 한바탕 몸살 앓는 가슴에
먹먹하게 내려앉는 허공
-이광복, 「허공의 힘」 전문
이젠 버거운 것일까 헐렁해진 다리가
지팡이도 후둘거린다
아들의 팔을 지아비 팔 인양 꽉 움켜잡고
웃는다
주름골마다 수줍은 미소가 숨어있다
예총회장으로 취임하는 맏이를 위해 비틀걸음으로 찾아오신
껍데기
맏이 얼굴 보기만 해도 풍선꽃처럼 피어난다
한 술의 흰죽과 물 한 모금이 주는 위안이 참으로 객쩍다
그리 애절할 줄 몰랐다
이리 보고플 줄 몰랐다
생각만 해도 속이 먼저 울어버릴 줄 몰랐다
내 껍데기
엄마, 부른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올 줄 몰랐다
호박오가리 말리던 굽은 등이
고구마순 따던 덕석 같은 손이 자꾸만 만지고 싶은데,
이렇게 맥없이 부러울 줄 정말 몰랐다
겨울소나기 밤늦도록 퍼붓겠다
-이우림, 「껍데기」 전문
처음엔 감자바위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실핏줄이
눈으로 몰리는 걸 느꼈고
어쩌면 그건 감자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가 두고 온 바위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화석이 되었어야 할 그리움이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애는 그동안
감자와 바위 사이를 오갔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나 겨울 눈 끝내 영악해지지 못했고
알 수 없는 보복심만이 바위처럼 굳어갔다
누군가 일출을 얘기할 때면
외면히 음력의 날짜라도 세듯
저녁노을 속으로 숨었다
-이춘희, 「이 씨의 연대기」 부분
위에 든 시인들의 경우에는 꽃과 나무 등 자연에서 소재를 얻고 있지만, 단순히 소재를 넘어 사물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대한 사유로의 확장을 통하여 각기 개성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박백남은 ‘등꽃’을 통하여 인간이 지닌 노동의 고귀함께, 그것이 개인 차원을 넘어 역사를 아로새겨 간다고 힘주어 말한다. 화자는 첫 두 연을 ‘햇빛과 자줏빛이 만나 한 세상 이룬/ 등나무 아래,/ 하늘 한 켠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한 역사役事를 본다// 소리 소문도 없이/ 한 세상 열어가는 등꽃의/ 역사歷史를 읽고 또 읽는다’고 말한다. 키 작은 등나무가 벽을 구불구불 타고 올라가 서로 몸을 엮어 넉넉한 그늘을 이루는 것은 숭고한 인간 노동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다. 시인을 그같이 숭고한 인내와 수고의 결실을 등꽃으로 은유하고 있다. 시인은 ‘역사(役事)’와 ‘역사(歷史)’라는 대구(對句)를 통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밝은 역사를 열어가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소명하고 있다.
이광복의 「허공의 힘」 역시 인간이 부단한 욕망과 의지로 불가시의 공간인 허공을 가시의 공간으로 변모시켜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화자는 ‘저 텅 빈 허공이/ 해의 발자국을 나뭇잎까지 끌고 온 길이었음을/ 본다./ 그 길 위로/ 또 하루 고단한 삶을 묻으며/ 가볍게 발을 내딛는 한 무리의 새떼들// 스스로 제 몸을 열어 길이 되어준 허공엔/ 비와 바람과 온갖 소리들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의 흔적을 묻어두었을까’라고 설유한다. 이를 통해 허공은 빈 공간이 아니며, 인간이 부단하게 햇살과 바람을 나르는 가시의 공간이라는 아이러니를 제시하고 있다. 즉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며 뒷사람이 건널 수 있도록 변모시켜 가는 모름지기 인간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이우림은 어린 것들을 도야하므로 자신의 가진 것 다 내주고 껍데기만 남은 어머니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마르고 빈 존재가 아니라 애벌레였던 어린 것들을 내보내고 넉넉하게 든든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화자는 ‘아들의 팔을 지아비 팔 인양 꽉 움켜잡고/ 웃는다/ 주름골마다 수줍은 미소가 숨어있다/ 예총회장으로 취임하는 맏이를 위해 비틀걸음으로 찾아오신/ 껍데기/ 맏이 얼굴 보기만 해도 풍선꽃처럼 피어난다‘라는 구절을 통하여 어머니의 가진 것이 아들에게 다 옮겨왔다는 점을 밝힌다. 나아가 그것은 단순한 소멸이나 상실이 아니라 듬직한 결실이라고 인식한다. 화자는 ’껍데기‘와 ’풍선꽃‘을 은유의 고리로 연결함으로써, 비어 있는 것은 곧 가득 찬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대하는 듯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춘희의 「이 씨의 연대기」는 ‘감자’로 상징되는 한 인간상을 통하여, 모름지기 인간다운 삶은 굴곡으로 얼룩진 삶의 신산을 견딘 자만이 넉넉하게 거둘 수 있다는 사유를 담고 있다. 가장 토속적인 소재인 감자를 통하여, 삶의 비의를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다. 화자는 늘 어려움을 도맡아 왔음에도 수확에서는 늘 소외되어온 인간상을 가리켜, ‘그의 생애는 그동안/ 감자와 바위 사이를 오갔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나 겨울 눈 끝내 영악해지지 못했고/ 알 수 없는 보복심만이 바위처럼 굳어갔다’라고 말하고 있다. 묵묵히 비바람을 맞으며 흙을 지켜온 ‘감자’는 곧 ‘바위’와 통한다는 전복적 사유가 흥미롭게 읽힌다.
이제까지 이번 마루시 4집에 실린 시인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았다. 이 동인들은 하나같이 탄탄한 세계관이 바탕이 된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시를 먼 데서 찾지 않고 묵묵히 꾸려가는 일상 가운데서 채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순응적이거나 소시민적 인식에 머물지 않고 깨끗한 희망이 펼쳐지는 세상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국적의 소재, 파편적인 사유로 치닫고 있는 최근 우리 시에 한 출구가 되어줄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으로 이들은 어둡고 낮은 데 있는 존재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으며, 물질직 풍요로 일궈진 현대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부단한 반성의 눈으로 돌아보고 있다. 목소리가 높지 않은 가운데 현실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펼쳐 나가고 있어,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초상을 바로잡는 데도 일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이 긍정적인 점들을 높이 사면서, 한편으로 앞으로의 더 큰 결실을 위하여 한두 가지 바람을 더한다. 즉, 일상적인 데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주제의 빠른 부각보다는 더욱 다양한 측면에 대한 모색과 함께 더 깊은 천착이 필요해 보인다. 또, 동인들의 직업군이 다양한 데서 온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의 소재와 주제가 분방하다는 느낌을 준다. 앞으로는 매호 동인지를 내면서 모종의 공통 주제를 중심으로 한 시들을 모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 시에 대한 진지한 열망을 보여주면서, 일상과 유리되지 않은 채 시적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마루시 동인이 우리 시의 밝은 미래를 여는 창이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