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보배를 발견한자 왕하4:8~17절 2019,1,27 찬송91,268,284장
* 말씀의 가치를 아는 자
수넴 여인은 말씀이 뭐냐를 깨달은 자이다.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말씀으로 명하시면 그 명하신대로 되어 진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는 생명력이 바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차단이 된 죄인인데 이러한 죄인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말씀 속에 있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축복의 통로가 바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 여인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 수넴 여인은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당시 말씀의 종 엘리사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고 그곳을 지날 때 마다 들러서 음식을 먹게 했던 것이다. 성경은 이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에 비춰볼 때 이 여인의 믿음이 너무 귀하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말씀에 붙들려 그 나라 왕을 중심해서 불의의 길을 가는 모든 자들과 맞서 싸우는 주의 사자임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의 하수인으로 녹을 받으며 아부하는 거짓된 선지자들이 많았고 그러한 자들이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는 그런 시대에 엘리사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어렵고 힘든 말씀의 길을 가는 사역자임을 발견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엘리사를 위해 9절에 남편에게 엘리사가 유할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갖추어 편히 쉬게 한다. 이 여인은 엘리사가 소중한 것은 말씀 때문이다. 말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음이다
최초에 창조함을 받은 아담에게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말씀이 있으면 살고 말씀이 없는 것은 죽음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말씀을 버림이 하나님과 단절로 죄의 종이라는 말씀의 절대성을 보인 것이다.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과 단절된 아담에 의해서 태어난 인류는 말씀의 중요성과 가치를 모르고 오직 떡의 종 되어 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선민이란 이스라엘까지 말씀이 아닌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 죄의 종으로 살고 있을 그때 이 말씀의 가치를 깨달아 말씀을 추구해서 사는 자들이 바로 엘리사였고 오늘 본문에 나온 이름 없는 여인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보배일까?
말씀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는 말씀이 없는 자들과는 관계하시지 않는다. 마7:22~23절에 아무리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해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살아온 자들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신다. 우리의 신앙의 중요성은 말씀에 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 미신적은 사고로 그를 섬기게 된다.
* 아들을 선물 받은 여인
이 여인은 자기에게 주신 자녀는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며 그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 세상 끝날 까지 남기고 보존 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는 나그네 삶이다. 짧은 나그네 기간을 마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가 걸어온 믿음의 과업이 하나님이 주신 그의 자녀에게 대물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녀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계속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손길이고 섭리인 것을 깨달은 여인이 17절에 아들이라는 생명을 선물 받은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자녀라는 생명보다 더 귀한 보배는 없다. 우리의 가정에 생명을 주신 것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주신 하늘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워 주신 것은 이 생명을 선물하시기 위해서이다.
자녀는 내일을 있게 하는 끈이고 보장이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끝날 까지 남기고 보존할 교회로서 전수자입니다.
이 여인은 아예 포기하고 살았던 자녀를 얻었으니 그 기쁨과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들이 죽어 버린 불행이 오게 된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과 슬픔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배를 잃어버리고 빼앗길 때이다. 욥은 1:19~21절에 자녀들과 재물 자신의 건강까지 다 빼앗길 때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탄식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라"고 합니다.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이러한 불행과 슬픔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과 슬픔을 막아보고 피하여 보려고 애쓰고 소원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거부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을 받음
이 여인에게 또 하나의 귀하고 값진 보배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을 선물 받는 일이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로 저주받은 죽음의 장소이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으로 생명은 없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가 왕 노릇 하는 저주의 세상이다. 마치 공동묘지와 같은 죽음의 세상에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생명을 맛본다는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기적인 것이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아들이 성장하지도 못하고 죽게 될 때 이는 뭔가의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과 슬픔에 빠져 낙망하지 않고 말씀의 종 엘리사를 찾아 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리사는 죽은 그 아이의 몸 위에 자기의 몸으로 덮어 죽었던 아이가 살아나게 한다. 이로써 이 여인은 죽었던 자기 아들을 죽음에서 살아난 새로운 생명으로 선물 받게 된다.
이 여인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을 통해서 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보다 더 큰 은혜요 깨달음인 것이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하나님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다.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또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원한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어떤 일에서도 감사에 의해서 살게 된다.
바울은 롬4:17~22절에 부활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깨달아 믿었던 자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자신과 자기 아내가 죽은 자 같음을 알고도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그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약속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 속에서 감사에 의해서 삶으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이 여인의 믿음이며 앞서간 주의 종들의 믿음이다. 이들의 믿음은 말씀이 뭐냐를 깨달은 것이고, 자녀가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한 자이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부활이고 생명 되심을 발견한 자들의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은 하지만 말씀이 뭐냐를 몰았고, 부활이고 생명이신 약속의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미신과 우상의 신앙으로만 흘러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감사는 없고 원망과 불평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눈을 뜨고 부활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면 감사에 의해서 살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감사에 의해서 사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