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김연아, 4대륙 선수권 대회 우승
'피겨퀸' 김연아(19.고려대 입학예정)가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김연아는 7일(이하 한국시간) 오후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콜리시움 실내빙상장에서 치러진 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16.83점을 얻어 쇼트프로그램 점수(72.24점)를 합쳐 총 189.07점으로 우승했다.
이로써 김연아는 자신의 첫 4대륙 대회 데뷔 무대에서 우승과 더불어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점 기록(72.24점)까지 세우는 성과를 거뒀다.
김연아에 이어 개최국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23)가 183.91점으로 은메달을 차지했고, 쇼트프로그램에서 6위까지 밀렸던 지난 대회 챔피언 아사다 마오(19.일본)가 프리스케이팅에서 분발하면서 176.52점으로 동메달을 건졌다.
쇼트프로그램 때와 달리 점프 미스와 스핀에서 아쉬움을 남겼고, 기대했던 '꿈의 200점' 돌파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은반 위에 선 김연아는 배경 음악 '세헤라자데'에 맞춰 아라비아 공주로 변신, 첫 과제인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을 깨끗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쇼트프로그램에서 내려졌던 어텐션(!) 마크가 또 한 번 첫 번째 점프에 내려지면서 기본점 9.50점에 가산점이 0.6점에 그쳤다.
판정에 나선 9명의 심판 중에서 6명이나 가산점을 줬고, 감점을 준 심판이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정상적인 점프였지만 테크니컬 패널은 에지에 주의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김연아는 이어 지금까지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던 트리플 루프를 자신 있게 시도했지만 착지 불안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내 냉정을 되찾은 김연아는 연이어 트리플 러츠-더블 토루프-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했지만 첫 번째 트리플 러츠와 마지막 더블 루프가 다운그레이드돼 3.22점에 그쳤다. 200점 돌파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연아는 플라잉 싯스핀을 레벨 4로 처리하고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와 트리플 러츠에서 가산점을 챙기면서 연기의 절정을 달렸다.
하지만 플라잉 콤비네이션 스핀과 마지막 콤비네이션 스핀이 각각 레벨2와 레벨3에 그치면서 190점대 진입에는 실패했다.
키스앤크라이존에서 점수를 기다린 김연아는 종합 1위를 알리는 장내 방송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손을 흔들고 갈고 닦은 영어로 인터뷰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시상대에 올랐다.
김연아는 "트리플 루프에서 실수를 했지만 시도한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라며 "밴쿠버 교민 응원 감사하고 큰 힘을 얻었다"라고 밝혔다.
또 4조에서 가장 먼저 연기를 치른 아사다 마오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점프 난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프리스케이팅 1위(118.66점)로 6위에서 3위까지 뛰어올라 동메달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아사다는 애초 첫 번째 연기과제로 해왔던 트리플 악셀-트리플 루프(때로는 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한 단계 낮춰 트리플 악셀-더블 토루프 점프로 시도하려고 했지만 첫 번째 트리플 악셀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1회전반으로 처리하면서 후속 점프를 하지 못해 0.8점을 얻는 데 그쳤다.
연이은 두 번째 트리플 악셀에서는 가산점을 받으며 깨끗하게 성공했지만 난도가 낮은 트리플 토루프를 또다시 2회전으로 뛰는 실수를 하면서 점수를 깎였다.
하지만 쇼트프로그램에서 부진했던 세 차례 스핀에서는 두 개를 레벨4로 처리하고 스파리얼에서도 레벨 4를 받으면서 118.66점을 얻어 총점 176.52을 얻었다.
쇼트프로그램 2위를 차지해 역전우승을 노렸던 개최국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23)는 스핀 세 개를 모두 레벨4로 처리했으나 점프에서 두 차례 실수하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한국의 김현정(군포 수리고.121.64점)과 김나영(연수여고.120.28점)은 각각 14위와 16위를 기록했다.
이영호 기자 horn90@yna.co.kr (밴쿠버=연합뉴스) /한겨레 2009-02-07 오후 02:52:41
[2000년] 타르야 할로넨(Halonen, Tarja, 1943.12.24~ ),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
← Tarja Halonen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집권당인 사민당 출신인 현직 외무장관 타르야 할로넨이 그 주인공이다. 할로넨은 2000년 2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당의 에스코 아호 전 총리를 누르고 임기 6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할로넨의 대통령 당선은 1994년 여성 국방장관이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를 이은 도전에서 성공한 것이었다. 할로넨은 "이번 선거결과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느 자리에서도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며, 여성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다소 큰 체격의 할로넨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진지함과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로 동성애자협회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사회 소수세력들의 권리를 적극 옹호해 온 할로넨은 1979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법무-보건-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현실주의적 시각도 잃지 않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개인적인 매력과 함께 핀란드가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매우 활발한 나라라는 점도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공직 진출권을 인정한 나라로 2000년 당시 여성의원수가 스웨덴, 덴마크에 이어 세계 3위였다. 할로넨은 3월 1일 취임식을 가졌다. /조선
[1999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 후세인 [Husayn Ibn Talal, 1935.11.14~1999. 2. 7]
요르단을 46년간 통치해 온 후세인 이븐 탈랄 국왕이 1999년 2월 7일 오전 11시43분 타계했다. 시신은 수도 암만의 하셰미트 묘소에 안장되었으며 요르단 정부는 40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8일 열린 영결식에는 한국의 김종필 총리를 비롯, 클린턴 미국 대통령,옐친 러시아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후세인 국왕은 46년간의 통치기간동안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화약고` 중동의 평화를 이끌어 온 거인이었다. 1953년 17세에 왕위에 오른 후세인은 냉전과 40년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요르단의 발전을 일궈냈다. 그의 왕위 등극은 험난한 인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51년 조부 압둘라 국왕은 한 회교사원에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됐다.
후세인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로부터 1년 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최대 시련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집트 편에 선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하는 바람에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잃게 된다. `평화의 중재자`로서 후세인의 면모는 1998년의 중동평화협상에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후세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후세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중재에 나서 와이리버 협정을 성사시켰다. /조선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 개막식
← 전이경 선수
제18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The 18th Olympic Winter Games)는 1998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일본의 나가노[長野]에서 열렸으며, 경기는 7개 종목, 68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20세기의 마지막 동계 올림픽이자 제11회 삿포로[札幌] 대회 이후 26년만에 일본에서 다시 개최되었으며, 72개국의 임원·선수 3,500여 명이 참가했다. 날씨가 나빠 경기가 여러 차례 연기되고 약물복용 파동, 지진 등 악재가 겹치기도 했으나 첨단 하이테크 기술과 환경보존이라는 2가지 개념이 조화를 잘 이룬 대회로 평가되는데, 일본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회준비를 위해 시설에 100억 달러, 경기운영에 10억 달러를 투자했다.
경기에서는 독일이 스키 알펜종목과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우세를 나타냈으며, 개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의 도약이 두드러졌다. 동계올림픽 출전 50년간 금메달 3개에 불과한 일본은 홈의 이점을 안고 금메달 5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7위로 뛰어올랐다. 네덜란드의 G.롬메 선수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5,000·1만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최고스타로 떠올랐고, 아이스하키에서는 체코가 러시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스키 알펜종목에서 오스트리아의 H.마이어 선수는 활강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3관왕은 놓쳤지만 슈퍼대회전·복합에서 우승하여 ‘스키 황제’가 되었고, ‘동계올림픽의 꽃’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는 16세의 미국선수 T.리핀스키가 라이벌인 M.콴(미국)을 누르고 우승했다.
한국에서는 빙상·스키·바이애슬론·루지 4개 종목에 올림픽 출전 최대인 6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세계9위로 3회 연속 세계10위권에 진입했으며, 그 이외의 종목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쇼트트랙에서는 총 6개의 금메달 가운데 3개를 획득했고, 역대 대회를 통틀어서도 총 16개 가운데 9개를 차지하여 세계최강임을 재확인했다. 전이경 선수는 쇼트트랙 여자1,000m·3,000m 계주 우승으로 2관왕에 오르면서, 동계·하계올림픽을 통틀어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4관왕에 오르는 신기원을 세웠다. 또 김동성 선수는 쇼트트랙 남자1,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채지훈·이준환·이호응·김동성 팀은 5,000m계주에서 캐나다(7분 06초 07)에 0.7초 차로 뒤져 아깝게 2위를 차지했다.
독일은 지난 대회 소련에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며 금메달 12개로 다시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노르웨이(금메달 10개)·러시아(9개)가 그 뒤를 이었다. 북한은 제16회 알베르빌대회에 이어 6년만에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 2종목에 출전했지만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naver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 조인
유럽공동체(EC) 12개 회원국이 1992년 2월 7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1991년 12월 EC 정상들이 합의한 EC 단일시장 및 단일통화-정치통합 실행을 골자로 한 유럽통화조약을 정식 조인했다.
마스트리히트 시청에서 거행된 이날 조인식에는 자크 들로르 EC위원장과 에곤 클렙시 유럽의회 의장을 비롯, 1992년 의장국인 포르투갈의 아니발 카바코 실바 총리, 1991년 하반기 의장국 네덜란드의 루트 루베르스 총리, 차기 의장국 룩셈부르크의 자크 상테르 총리와 각국 외무·재무장관들이 참석했다.
3백13페이지에 이르는 본문과 부속문서로 돼 있는 EC 통합조약은 늦어도 1999년까지의 역내 단일통화 도입을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의회의 권한증대, 외교안보 분야에서 회원국간 결속 강화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각국의 이견과 덴마크의 비준거부 등으로 비록 당초목표인 1993년 1월보다 10개월 늦은 1993년 11월 조약이 발효됐으나 EC 12개 회원국 3억4천6백만 유럽인들의 정치-경제적 운명은 이제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밀히 묶어지게 됐다.
발효와 함께 EC는 유럽연합(EU)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1999년까지 EU 회원국이 단일통화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권한의 상당부분을 통합기구에 위임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어 각국의 반대가 심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0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비준해 실효를 보게됐다. /조선
[1986년] 필리핀 17년 만에 대통령선거
필리핀의 미래를 결정할 대통령선거가 1986년 2월 7일 실시됐다. 마르코스(Marcos, Ferdinand)로서는 대규모 반정부운동과 공산게릴라의 준동, 미국무성의 압력 등으로 마지못해 실시한 선거였다. 투표부터 개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은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민간 선거감시기구와의 개표결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예상대로 마르코스는 재선됐다.
그러나 아키노(Aquino, Corazon, 1933~ )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양측의 대립이 심각해져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22일에 이르러 사태가 급반전됐다. 마르코스의 측근이었던 엔리레 국방장관과 라모스 참모총장대행이 마르코스에 반기를 들었고 가톨릭의 신추기경도 반정부입장을 표명했다. 24일 마르코스는 필리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지만 아키노를 지지하는 흐름은 막을수 없었다. /조선
[1984년] 제14회 동계 올림픽 개막 (2.7~19, 유고 사라예보)
제14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The 14th Olympic Winter Games)는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인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Sarajevo)에서 동계 올림픽 사상 최대인 49개국의 선수·임원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984년 2월 7일부터 19일까지 13일에 걸쳐 열렸다. 경기는 10개 종목, 39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비동맹국에서 열린 대회답게 한국과 북한, 중국과 타이완이 함께 출전했으며, 동독이 소련과 북유럽 3국을 누르고 처음으로 세계정상에 섰다.
오랫동안 눈이 오지 않아 우려했지만 대회 2일 전 폭설이 내려 경기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핀란드의 M.헤멜라이넨 선수는 5·10·20km 크로스컨트리에서 우승하여 여자 스키에서 첫 3관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남녀 선수 15명이 스키, 스피드 스케이팅, 피겨 스케이팅 외에 처음으로 바이애슬론에 출전했으나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으며, 다만 동유럽 공산권과의 경기를 통하여 스포츠 외교면에서 성과를 얻은 데 만족해야 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9개의 동독이 차지했고, 소련(금메달 6개)·미국(4개)·핀란드(4개)·스웨덴(4개)이 그 뒤를 이었다. /naver
[1981년]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 사망
1899.12.22 ~ 1981.2.7
호 설초(雪蕉).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 후 17년 도일, 1923년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자화상》과 《추억》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데뷰하였다.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파리에 유학하여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수학, 1927년 살롱 도톤전에 《모부인(某婦人)의 초상》 《인형이 있는 정물》 등을 출품하고, 1928년 귀국하여 제l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회화연구소, 다시 중앙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 선전(鮮展)에서는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다.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1951년부터는 홍익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고전적 사실화풍과 후기의 정감적이고 자연관조적인 동양적 취향으로 대별된다. /naver
[1979년]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金殷鎬) 사망
1892년 6월 24일 ~ 1979년 2월 7일
인천 출신이며 아호는 이당(以堂)이다.
인천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인흥학교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측량기사의 조수로 일하고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다가 이왕직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에 편입하여 화가가되었다. 서화미술회 편입에는 사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도움이 있었다.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 3·1 문화상(1965)과 예술원상(1968)도 수상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두드러진 친일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 /위키백과
[1973년] 한국에 4-H운동 보급한 미군 군정관 앤더슨 사망
앤더슨 [Anderson, Charles A., ?~1973.2.7]
한국에 4H 운동이 처음 소개된 것도 미군정 때였다. 1947년 경기도 군정관이던 찰스 앤더슨(Charles A. Anderson) 중령은 구자옥(具滋玉) 경기도지사와 함께 4H 운동을 경기도에 도입하기로 하고 각 시군에 농촌청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첫 싹을 틔운 4H 운동은 1952년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채택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1953년 발족한 한미재단에 예비역 대령이 된 앤더슨 씨가 고문으로 부임(1954년)하면서 4H 운동은 날개를 달게 됐다.
1954년 민간후원단체인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가 결성됐고 제1회 4H중앙경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정부의 정책적 후원을 바탕으로 4H 운동은 전후 복구와 농촌 재건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앤더슨 씨는 1973년 2월 7일 숨을 거두었으나 4H 운동은 새마을운동과 결합해 농어촌 환경 개선과 생산기반 시설 정비, 자급기반 확충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의 뜻을 이어갔다. 당시 농어촌에는 네잎 클로버 문양과 함께 4H 표어를 안방에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4H 운동은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 농어촌 인구의 감소 등으로 위축돼 지금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책갈피 속의 오늘) /동아일보 2006년 2월 7일
[1974년] 그레나다(Grenada) 독립
← 그레나다 국기
1974년 2월 7일 그레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그레나다는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카리브 해 동부에 자리잡은 서인도 제도 최남단 섬이다. 아라와크족이 원주민으로 거주하던 그레나다를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1498년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온 카리브 인디언들이었다. 1650년에는 프랑스 총독 마르티니크가 프랑스 회사로부터 이 섬을 사들여 세인트조지에 주거지를 세웠다. 1672~1762년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이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동안에는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885∼1958년은 영국령 윈드워드 제도 정부의 본거지였다가 1958∼62년에 서인도제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영국과 연합하여 자치주가 되었고, 1974년 2월 7일에는 독립주가 되었다. 독립헌법에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그레나다의 총독과 양원제 국회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었다. 1984년 12월 총선거를 통해 민주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브리태니커
[1967년] 신민당 창당
← 김대중
1967년 2월 7일 전통야당의 맥을 이어받은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야당계열인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 형태로 창당된 신민당은 인권존중, 반독재민주주의 국가 완성, 민생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1970년 9월 29일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선거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뒤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양분됨에 따라 법정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2년 유신헌법으로 국회가 해산하고 정당활동이 중지된 뒤, 반유진산계의 일부 의원들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했다. 1974년 김영삼이 총재가 되면서 대여 강경노선을 전개했으나 1976년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대여 온건노선인 중도통합론을 지향했다. 김영삼이 총재가 된 1979년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로 분열되다가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공포와 함께 해산되었다./브리태니커
[1966년] 박정희대통령 동남아순방 등정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말레이시아를 비롯, 태국과 자유중국 등 동남아 3개국을 공식 순방하고 상대국간의 우의증진과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했다. 박 대통령은 2월 9일 첫 순방국인 말레이시아의 국회의사당 귀빈실에서 라만 수상과 공식회담을 하고 월남사태와 관련된 자유 아시아의 공동방위문제와 양국의 경제협력문제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박대통령은 4일간의 태국방문 중 타놈수상과 한 정상회담에서 태국은 통한에 대한 한국정부정책을 지지했다. 또 월남을 지지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문화교류에 관해서도 협의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순방국인 자유중국에서 장개석총통을 만나 자유아시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유대강화에 최선의 길을 모색할 것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선
[1964년] 비틀즈 미국 상륙. 비틀즈 열풍 시작
← 비틀즈의 첫 미국 발매 앨범 'Introducing The Beatles (US)'
1964년 2월 7일 낮 1시 30분, 미국 케네디 공항에서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청춘문화의 상징이 된 비틀스가 미국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공항에는 비틀즈를 보기위해 3,000여 명의 소녀들이 몰렸으며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는 7,3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포크송과 트위스트에 식상해 하고 케네디 암살 후 새로운 영웅을 원하던 미국은 비틀즈에 열광했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 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며 2월 첫 주에 전미 히트 차트 1위에 오른 비틀즈는 4월 4일의 빌보드 차트 랭킹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 상륙한 1964년에만 18주동안 전미 차트 1위를 독점한 비틀즈는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 인형, 기타 등을 유행시켰다.
비틀즈는 1956년 고등학생인 존 레넌이 '퀴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존 레넌은 곧 폴 매카트니(1957년), 조지 해리슨(1958년)을 합류시켜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고,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류해 멤버가 갖춰졌다. 19~22살의 더벅머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하며 등장했다.
1970년 4월 10일 해체하기까지 9년간 공식적으로 211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과 흥분으로 몰아간 비틀즈는 해체와 함께 전설로 남게 됐다. 앨범 판매량은 20세기 최대 음반판매 기록인 1억 6,000만장이었다./조선
[1964년] 한국-케냐(Kenya) 국교 수립
← 케냐 국기
한국은 1963년 8월 15일 주(駐)케냐 대한민국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2월 12일 케냐 승인 후 1964년 2월 7일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과 함께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주한 케냐명예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케냐는 비동맹주의 온건국가로서 독립 이후 친한적 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직접 대화, 남북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동시가입, 북한의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 수용 등 한국의 기본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비동맹국가라는 입장 때문에 UN 등에서 한국에 대해 소극적으로 동조 입장을 취해오다가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의 케냐 방문,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등을 계기로 적극적인 지지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1990년 9월 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의 방한으로 양국의 협력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케냐 대한민국대사관) /naver
[1948년] 미군정 시기 2·7 사건 발생
2·7 사건은 1948년 2월 7일에 훗날의 대한민국 영역에서 일어난 파업 및 봉기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2·7 파업이나 2·7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2·7 구국투쟁으로 부른다.
개요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이 이같은 여론을 선도했고, 이 사건 이틀 후인 1948년 2월 9일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두 달 뒤에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제주 4·3 항쟁의 전초전이 되었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더 규모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개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했다.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며 이루어졌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 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4.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약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의 및 영향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 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위키백과
[1929년] 한국 동양화가 서세옥(徐世鈺) 출생
호는 산정(山丁).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나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미대 출신 작가들과 함께 묵림회를 창립,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70년부터 국전 운영위원을 역임하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 등을 지냈다.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이탈리아 국제 비엔날레 및 프랑스·독일(서독)·벨기에·말레이시아 등에 초대 출품했다. 1949년 제1회 국전 국무총리상, 제3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1970년 국전 초대작가상을받았다. 대표작으로 〈꽃장수〉(1949)·〈작품〉(1962)·〈장생 長生〉(1970)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06년]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출생
← 푸이
1906. 2. 7 중국 베이징[北京]~1967. 10. 17 베이징.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1907~12 재위) 또한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1934~45 재위).
청제 때의 연호는 선통제(宣統帝). 1908년 11월 14일에 큰아버지인 광서제(光緖帝)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載灃)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푸이는 몰래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고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다. 1964~65년에 영어로 된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가 간행되었다./브리태니커
[1898년]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閔弼鎬) 출생
1898. 2. 7 서울~1963. 4. 14.
본관은 여흥. 호는 석린(石麟). 1910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이듬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12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졸업했다. 같은 해 신규식(申圭植)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7월 신규식의 딸과 결혼하고 신규식의 비서로 일했다. 1923년 10월부터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 13년 동안 재무의 실무책임을 맡아 경비조달에 진력했다. 1937년 10월 난징[南京] 교통부의 전정사(電政司), 12월 장제스[蔣介石]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로 일했다. 그뒤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내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복간, 발행했다. 한편 중국정부와 협의해 임시정부 무장경비대를 조직했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 계속 머무르면서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을 주선하는 한편,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부단장으로 교포들의 교육과 보호에 힘썼다. 1948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갔다가 1949년 우리 정부로부터 초대 중화민국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신병으로 사임하고 1957년 7월 귀국한 뒤 중일전쟁중 충칭[重慶]에 창설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재건해 한국·중국 간의 우호와 문화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저서에 〈한중외교사화〉가 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96년] 독립운동가 유득신(劉得信) 출생
1896. 2. 7 서울~1950.
이명(異名)은 홍익수(洪益洙).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교회부속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간도로 건너가 류허 현[柳河縣] 신흥학교(新興學敎)를 수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12년 3~7월에 일본 도쿄 신학회[東京神學會]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교육을 받고 귀국한 후 경상남도 고성군 대하면 송강학교(松江學校) 교사로 잠시 재직했다.
1920년 10월경 김상옥(金相玉)의 권유로 암살단에 가입한 뒤 김상옥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3발을 받았다. 그해 10월 10일 엄준(嚴俊)과 함께 경기도평의원 임원상(林原相)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해 김상옥에게 주었으며, 10월 30일에는 이만응(李晩應)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해 임시정부 특파원 홍준(洪俊)에게 건네주었다. 그뒤에도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정구창(鄭求昌)·김영두(金永斗)·이범렬(李範烈)·김만원(金萬源) 등에게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1921년 1월 동대문경찰서의 추적을 받아 엄준이 먼저 체포되었으며, 그도 1월 17일 김경배(金敬培)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85년] 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출생
← Lewis, (Harry) Sinclair, 1885. 2. 7 ~ 1951. 1.10
1885년 2월 7일 미네소타주(州) 소크센터에서 출생하였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U.싱클레어를 중심으로 시작된 실험적 사회주의 공동생활체인 헬리컨 홈 콜로니(Helicon Home Colony)에 참가하였다. 졸업 후 편집 조수, 파나마에서는 운하공사장·건축공사장·신문사 등에서 일하면서 각지를 전전하다가 드디어 최초의 장편소설 《우리 회사 사원 렌 Our Mr.Wrenn》(1914)을 발표하여, 사실주의 수법·유머·풍자 등을 개성적인 재능으로 잘 표현함으로써 알려졌다. 이어서 3편 정도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후 이상주의 기질의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중서부의 시골 특유의 인습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 및 규격화된 미국생활을 풍자한 문제작 《메인 스트리트 Main Street》(1920)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이후 중서부의 전형적인 도시를 무대로 인습적인 분위기에 한때 반역하지만 결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토지·가옥 중개업자를 묘사한 《배빗 Babbitt》(1922), 주위의 상업주의와 싸워가면서 끝까지 과학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세균학자를 다루어 퓰리처상을 받은(루이스 자신은 상을 거절하였다) 《애로스미스 Arrowsmith》(1925), 종교계의 위선을 폭로한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1927), 어느 자동차 제조업자의 전통과 예술에의 각성을 소재로 한 《도즈워스 Dodsworth》(1929) 등의 역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1930년 미국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의 주요작품에는 여류 사회사업가를 주인공으로 한 《앤 비커즈 Ann Vickers》(1933), 호텔업자를 호의적으로 그린 《예술작품》(1934), 파시즘의 위협에 대하여 경고를 던진 《그것은 이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1935), 중년의 재판관과 그의 젊은 아내를 중심으로 부부생활의 문제를 취급한 《캐스 팀벌렌 Cass Timberlane》(1945), 흑인문제를 다룬 《피의 선언 Kingsblood Royal》(1947), 《단편집》(1935) 등이 있고, 사후(死後)에 《서간집》(1952) 등이 출판되었다. 루이스는 미국생활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규격화되어 있다고 하여 일상용어를 교묘하게 활용하며 미국생활의 이모저모를 풍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미국인의 형태를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미국문학을 힘차게 대변하였다. /naver
[1812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출생
← 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년 2월 7일 태어남 / 1870년 6월 9일 죽음
"다른 사람에게 허비한 날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 허비한 날은 아니다." - 찰스 디킨스
디킨스는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로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1838),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1849~50),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1860~61)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어렸을 때는 궁핍에 시달려 학교에도 거의 다니지 못했으며 구두약 공장과 상표를 붙이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15세에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환이 되었다가 속기를 배워 이듬해 법원의 속기사로 들어갔다. 이후 신문사의 통신원이 되어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사회의 부조리 및 서민들의 애환과 단순한 흑백의 변증법, 뛰어난 유머가 담긴 작품들을 발표해 생전에도 큰 인기를 누렸다. 심각한 인물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인물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창조해내 이미 20대부터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799년] 중국 청나라의 6번째 황제 건륭제 사망
←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의 팔기군이 산해관으로 들어간 다음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네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이며, 연호는 건륭(乾隆)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히여허 한(Abkai Wehiyehe Han), 몽골어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Tengeriin Tetgesen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이며,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서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 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과 야사가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위키백과
[1477년]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 출생
← 모어 [More, Thomas, 1477. 2. 7~1535. 7. 6]의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영어:Thomas More, 1478년2월 7일 - 1535년6월 6일)는 잉글랜드 왕국 시기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영국 성공회의 성인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위키백과
[1151년]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사망
← 김부식은 송나라에 여섯 달 동안 머물며 송나라 휘종에게 [자치통감]을 선물로 받았다. 김부식은 이를 보며 [삼국사기]에 대한 집필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김위영이 고려 태조(太祖)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된 이래 경주 일대에 세거하였다.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높은 지위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김부식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 사록(司錄)과 참군 녹사(參軍錄事)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仁宗)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또한 1126년과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白壽翰)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 가운데 오직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서경의 서기(瑞氣)를 조작한 일이 탄로나고,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 등에 의하여 찬진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에 관한 기전체의 정사인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29의 제1장 작삼국년표 갑자, 을축 부분 및 권 36의 제3장 임성군, 황산군, 비풍군 연혁 부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NIKH.DB-fl_001_002_001_0029)>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조광·유담 등은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金安),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하였다. 김부식은 중군장으로서 좌군장으로 김부의(金副儀), 우군장으로 이주연(李周衍)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다. 서인들은 묘청·유담들을 죽이고 항복하였으나, 조광(趙匡)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하고, 그 이듬해인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 김부식은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政敵)인 윤언이(尹彦頥)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 후 집현전 태학사·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 개국후(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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