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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69
2월17일[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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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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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eETDDYLchPI
[서울대교구 이승규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둔촌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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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내렸을 것입니다.
이어서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날 저녁 레위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가 동료 세리들과 작별하는 송별식도 겸했습니다.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요즘으로 치면 조폭 두목 결혼식 피로연, 아니면 조폭 두목 어머니 칠순잔치 자리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덩치가 산만한 조직원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호시탐탐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한건 올렸다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여러분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틈만 나면 욕을 바가지로 먹던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애지중지 하신다는 마음으로 올해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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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장 완벽하고 손쉬운 겸손의 길>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기도 중에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늘나라 가장 높은 곳에 비어있는 멋진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저 의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누구냐고 묻자 천사는 “당신의 스승인 프란치스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제자가 프란치스코의 겸손을 시험하고 싶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세상에 분명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라네.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누구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도 분명 높은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으로 살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낮추려고 해도 나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항상 눈에 띕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처럼 여겨집니다. 이렇게 낮아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높아지기는커녕 구원에서 제외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사람이 세관일을 하고 있는 레위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왜 겸손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의 이름에 해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레위란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사제의 일을 맡기신 지파의 이름입니다.
레위는 이름 자체로는 사제의 일을 해야 하는데 누가 봐도 죄인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사제여야 하는 것을 아는데 죄만 짓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압니다.
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행동으로는 올바르게 살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누구여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신앙인의 수준으로 잘 살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는 것이 교만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셨음에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겸손해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인간의 수준으로는 잘 살고 있는데 굳이 하느님의 자녀로 믿어서 부족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인 인간이 되고 싶었지 죄인인 하느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께로부터 제외되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누구여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바로 자신이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치고 이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남을 판단할 만큼 온전하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오직 이 믿음만이 나를 겸손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태리 어느 시골에 마리오와 안셀모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리오는 위대한 설교가가 될 꿈을 안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제가 되었습니다. 반면 안셀모는 같은 수도원의 평수사로 살았습니다.
마리오는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셀모는 친구를 축하해주며 “항상 너의 사제직을 위해 기도할게.”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마리오는 교회의 저명한 설교가가 되었고 안셀모는 수도원의 궂은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마리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안셀모가 떠올라 기도를 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셀모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마리오는 안셀모의 시신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도원 원장이 마리오에게 물었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가?” “아닙니다. 안셀모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무언가 되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미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내가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래서 하느님임을 알면 그 주어진 본성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완벽한 겸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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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황당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7년 여름에 저는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드다빈치 공항에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수속을 하였습니다. 창구의 직원은 저의 여권을 한참 보더니 벨을 눌렀습니다. 곧 보안요원이 왔고,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인종차별에 가까운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야 했고, 토론토에서 동창신부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것도 취소되었습니다. 토론토 도착시간이 밤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인 사람과 저의 인상착의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사히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더 오래 전의 일도 있습니다. 1993년의 기억입니다. 동창 모임이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에서 있었습니다. 다들 모였는데 한 친구가 밤이 늦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을 때입니다. 친구는 진부령과 진부를 혼돈했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있는 진부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친구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늦었지만 별 탈 없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황은 그 원인이 본인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9년 7월입니다. 저는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그만 지갑을 놓고 내렸습니다. 지갑에는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신용카드, 현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은 따로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한국에 전화해서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은 새로 만들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남은 일정 얻어먹으면서 다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웃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고, 드디어 성지순례를 시작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2003년의 기억입니다. 자매님은 미국비자가 있는 구여권을 가져왔습니다. 구여권은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새로 발급받는 여권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집이 수원이었던 자매님은 부득이하게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그래도 순례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부주의와 나의 착각으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작이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름 부푼 꿈을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화려한 궁궐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축복하는 집에서 태어나기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물이 머무는 구유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 되었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난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고식치고는 무척이나 황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다.” 확실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황하셨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표징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표징은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십자가 없는 부활을 얻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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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27절) 하셨다.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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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며, 영적으로 일치함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원임을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여 분리해야만 하였던 바리사이들에게 이 선언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의인들의 공동체가 병든 이들을 잘라 내어 배제시킨 건강한 이들만의 공동체였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병든 이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로서 병자들 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들을 돌보고 섬기시는 분이시며, 병자들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치유되는 이들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죄인이라 느끼고, 주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이나 의인이 아닌 병든 이들과 죄인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와 죄인, 레위를 부르신 것처럼, 풍파에 얼룩지고 빛바랜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죄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치유되도록 봉사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이웃을 배제하거나 분리하지 말고, 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우리를 고쳐 주시기만 하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도 하시려고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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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이 아니라 ‘나’>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는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는 일이고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의사가 치료하기 위해서 ‘병든 이들’을 만나는 것처럼, 당신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만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죄인들과 의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죄인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고, “너희도 죄인들이다.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나는 의인이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로마 3,9ㄹ-11)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3-24)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따라서 ‘죄인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 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니고, ‘나’입니다.>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를 ‘그들’과 구분해서 분리하는 것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의인인 나’와 ‘죄인인 그들’을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 바로 그것이 바리사이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건강한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병든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 되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로 바꿔서 표현하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바로 ‘병든 이’입니다. 내가 이웃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나는 건강하고 그 이웃은 병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병자이기 때문이고, 함께 치유되고 함께 건강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 사제 자신은 건강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이는 병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제 자신도 ‘병든 이’이고, ‘죄인’입니다. 물론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용서한단 말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해성사의 용서는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제는 그 은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랑의 성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먼저 회개한 죄인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이고 선교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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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 마음 속에 곧잘 좋은 것에 대한 동경을 두고 삽니다. 그중에 하나가 넉넉한 경제사정, 아이들이 대학도 그렇고 좋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지요.
한 어머니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데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는다고 한탄을 합니다. 자식이 대학원까지 나왔는데도 취직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몇 몇 회사는 되었는데 눈에 차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시켰고 또 좋은 대학인데 자기가 원하는 유명한 회사가 안되는 것이냐?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같이 경제도 어렵고 또 직장 구하기도 어려운데 꼭 대기업 회사만 기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보다 어머니 기대가 더 커서 더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눈높이’이가 너무 높으니까 원하는 만큼 얻지를 못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눈높이는 바로 소외된 사람들이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문이던지 가정이 좋다는 기준을 갖고 제자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고 낮고 미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에 손가락질 받는 죄인 부류에 들어가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는지 모릅니다. 복음대로라면 지나가시다가 "나를 따라라."(루카 5,27)고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마태오도 어부출신 제자들이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마태오는 평소 지내던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기 집에서 큰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러한 광경을 보고 수군거리지요. 이런 분위기를 부치기는 사람들이 누구겠어요? 다름아닌 바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눈높이로는 예수님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만나 희희덕 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찰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며 제자들에게 불평을 털어 놓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30절) ‘사람 봐 가며 사귀라.’는 뜻이지요.
비단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뿐이겠어요? 드라마에서도 집안이 좋지 않다고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 자식들간의 갈등을 주제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인 것이지요.
외적 조건을 갖고 사람을 판단하며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지금도 복음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고국의 드라마 중에서 ‘왕가네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 식구의 막내 딸이 중학교만 나온 청년과의 결혼은 극구 반대를 합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교감인 아버지도 딸을 설득하기에 바쁩니다.
그 드라마의 결과는 막내딸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눈높이로 이웃을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그것까지도 사실 안되는데 다른 사람과 연대해서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1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으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겉으로 회개하는 ‘겉저리 식 회개’가 아니라 내 삶의 깊숙이 차지하는 오만과 착각에서 속까지 새롭게 변화 되는 ‘묵은지 식 회개’를 해야 합니다.
특히 가깝다고 함부로 하고 비꼬는 말투, 깔보는 모습으로 상처를 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상처 받으면 절대로 안되고 남들은 ‘속이 좁아서’라는 쉬운 말로 밀어 놓는 것은 아닌지요? 남이 회개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투덜거리며 살지 맙시다. 이왕이면 이웃을 좋게, 인격적 대접을 하며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삽시다.
소외되고 무관심으로 밀쳐냈던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멋진 하루를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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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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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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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저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지고 싶은게 많아 돈이 필요하고,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며, 사랑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괴로울 땐 위로가 필요하고, 마음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내 삶을 주관하시고 살피시는 하느님이 필요한,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허물도 많은, 평범은 고사하고 한참 모자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슬픔과 괴로움에 빠진 이들에게 필요한 이가 되고 싶습니다. 공동체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보다 어느 부분에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이 못되더라도 최소한 어느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 그의 참된 행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필요한 사람’에서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나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곤경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그만큼 내것을 더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 문제를 겪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담이 필요하고 그만큼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정 결핍이 심한 사람일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받지 못하고 주기만 하는 일방적 헌신을 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세심한 배려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신경쓰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 머리가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생각하다보면 내가 정말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오늘 부르신 레위는 사람들의 무시와 냉대,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으로 마음 속에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그걸 돈과 권력이라는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고 애쓰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보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쪽에 더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 조건없는 용서와 사랑을 받았고, ‘나는 니가 필요하다’는 인정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흠모하고 따르는 이로부터 ‘너는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함께 한다는건 참으로 마음 뿌듯하고 기쁜 일이지요. 그 힘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던 사람이었던 레위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인 마태오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이제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주님을 필요로 했을 때 당신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셨듯이, 도움과 보살핌, 위로와 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내가 가진 재물과 능력을, 내 시간과 삶을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가 했던 회개의 모습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저 잘못을 뉘우치는게 아닙니다. 나의 필요에 응답해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 또한 다른 이의 필요에 사랑으로 응답해주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참된 기쁨의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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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나리라 죄인을 부러 회개시키러 왔다.” (5,30~31)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의인으로 아니면 죄인으로! 레위는 분명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 기준으로 보자면 의인이 아닌 죄인이었고 이는 본인도 그렇게 알고 살았으리라 봅니다. 레위 존재 자체가 죄인이 아니라 그 존재와는 상관없이 그가 하는 일,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나를 따라라.” (5,27) 는 예수님 초대의 말씀을 듣고, 그는 행동 중심에서 존재 중심의 삶으로 회개하고 변화하려고 모든 세상적인 재물과 평판 등 “모든 것을 다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5,28참조) 어쩌면 이사야의 선언처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그의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58,11) 라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레위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레위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서, 자신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동료와 이웃들을 불러 함께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 잔치를 보고 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며,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5,30) 라고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 중병, 곧 교만과 위선이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임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1~3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레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세상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습니다. 가장 의인다운 의인은 바로 하느님께서 죄인임에도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치는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누군가와 함께 먹다 보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고 누군가로부터 초대받는다는 것은 친밀함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때론 불편한 관계로 서먹서먹하던 사이도 함께 식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해도 친교도 이루어지는 자리가 바로 식사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이 붕괴되는 가장 첫 단추는 가족들, 곧 식구食口들이 함께 식사하지 않는 순간부터 출발합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가정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시고 자신이 선포한 참 생명에 합류하도록 초대하는 방법으로 식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셨다고 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일 경우,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초대해 주신 주님과 함께 열린 마음으로 기쁘게 먹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함께 먹는 식사의 자리는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하느님의 뜻을 살았기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식사함은 하느님 친교의 자리로 초대였던 것이고,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돌아서고,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섹스 심벌로 알려진 마릴린 먼로는 3번의 결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목숨을 끊었는데, 가정부가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 보니 전화선이 뽑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끝내 어떤 누구와도 통화하지 못해 죽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척도인 부와 명예는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더 좋아지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어 관계를 더 복잡하게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재물과 동일시할수록 지저분한 기분, 부정적인 태도, 관계 장애도 더 커진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지수는 삶의 좋은 것들이란 물건들이 아니라, 좋은 관계의 지표는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통념에서 의인이 아닌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고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먼저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느님과의 친교 밖에서 산다면, 의인들도 죄인들인 그들과의 친교를 맺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대의 종교적인 통념과도 다르게,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먼저 율법대로의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거나 하지 않거나 상관없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병자들이요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가 더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은 구원을 필요 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데 장애나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자비에 내어 맡길 때, 죄가 오히려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나아가는 발판이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자비가 더 풍성하게 내리는 까닭은 바로 인간의 행위나 행업이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먼저 작용하고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5,31)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의사로서, 의사인 자신이 환자와 같은 죄인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 나섰으며, 그들을 만나면서 과거 잘못된 생활로 인한 병의 진단보다는 우선 그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달래주시고 위로해 주시면서 그들이 자진해서 스스로 그 원인을 고치도록 인도하신 명의名醫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그들의 필요를 꿰뚫어 보시고 그들을 초대하여 환대하고 자비를 베풀어 주어 하느님과의 친교를 되찾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비로운 처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을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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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재작년에 코 수술을 받았습니다. 콧속에 혹이 나서 냄새를 맡지 못했고 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안을 꽉 막고 있는 솜으로 인해 답답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택은 계속 누워만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 만 반복하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이틀 동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를 ‘걷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두 다리를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도 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또 돈이 없다면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아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도 경험해 보니 아프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지요. 그렇다면 정신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 감정을 몰아내고 긍정과 희망의 감정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더 큰 힘이 됩니다.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이는 이 희망 안에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절망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걷지 못할 때, 얼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줄기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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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랑>
“나를 따라라.”(루카 5,27)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랑
아무도
부르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사랑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랑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는 사랑
아무도
마음 쓰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 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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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인 체하는 죄인>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을 하느라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불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원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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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꼭 필요한 사람>
어제 저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고 욕망을 끊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라고 아주 짧은 강론을 한 바 있는데 오늘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회개가 바로 사랑과 선행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단식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과 선행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이 고생하는 이를 흡족하게 하고, 병든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지금 세계적으로는 전쟁과 지진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고, 멀리 가지 않고 우리 주변만 해도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 많은데 자기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 우리가 단식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주님을 위해 단식한다 해도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지요.
비근한 예로, 지금 형제가 가난하고 병까지 들었는데 그런 형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모에게 보약을 지어드린다면 그 돈으로 형제 도우라고 하시지 보약 드실 부모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약이 필요 없고 우리의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보약이 필요하고 우리 사랑이 필요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지
하느님께 애정결핍이 있으시거나 그래서 우리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하느님은 Self Sufficient God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으시고,
하느님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고 자체적으로 흡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웃을 흡족하게 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흡족하게 하실 거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불만이 많고 우리의 불만을 채워달라고 자주 징징대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느님께.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남을 흡족하게 하냐고 또 징징댈 수 있는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하느님과 복음의 주님은 이제 애 짓은 그만두라고, 언제까지 애처럼 젖 달라고 징징댈 것이냐고, 이제는 네 젖을 아기에게 물릴 어른이요, 엄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사랑할 수 있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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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예수님 감사!>
오늘 복음(루카5,27ㄴ-32)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함께 음식을 먹은 레위나 세리들은 로마의 협력자로서,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신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ㄴ)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예수님 감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인입니다. 아직 완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본질이요 핵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구원 받는 길'은 언제나 이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관심은 언제나 죄인들이 있는 낮은 곳으로, 죄인이라는 고백이 넘쳐나는 낮은 곳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9-10)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은총과 복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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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Z_EqQz0k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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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오늘의
새로운
붉은 해가
뜨겁게
솟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이라는
잔치와
부르심의
식탁에 몸소
오셨습니다.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에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있기에
식탁이 있고
죄가 있기에
회개의 기쁨을
체험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식탁에서
우리의
이름을 얻고
식탁에서
주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영혼의 허기와
영혼의 갈증을
주님의 식탁에서
채워주시며
세상에 없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여기 이곳에
기쁨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이
먼저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처음으로
앉아보는
우리들의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식탁에
회개의 길이
분명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형제적 나눔과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파놓은 함정에
결코 빠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회개와
기쁨으로
바리사이들의
편견과 억측을
되받아치십니다.
회개로
만들어가시는
사랑의 참된
기쁨을
알려주십니다.
식탁에서
회개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가장 좋은
기쁨의 날입니다.
회개의 잔치에
기쁨으로
응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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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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