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교회로 돌아가자! 어떻게? : 인내와 저항”에 대한 논찬
내가 만난 앨런 크라이더는 <회심의 변질>(대장간)이었다. 처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사적으로 ‘회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타락해 갔고, 현대 교회에서 듣는 ‘회심’이 헐값에 통용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크라이더의 책을 찾아서 읽으면서 교회사가로서 그가 이 분야 뿐만 아니라 평화와 성찬을 비롯해 교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는 식견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가 처음 국내에 출시되었을 때 출판사로부터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때가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였는데, 백신을 맞고 비몽사몽 하던 때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코로나 역병 속에서도 또 다시 심장은 두근거렸다. 초기교회가 외부로부터의 박해가 창궐하던 때, 공개적인 전도 -초기교회는 언감생심 이것을 시도할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를 할 수 없었던 시절에,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의 생명력을 다른 것이 아닌 ‘인내’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왜 탁월한 학자인지를 새삼 인정하게 되었다.
오세준 목사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를 중심으로 현대 한국개신교가 잃어버린, ‘인내의 의미’를 고찰함으로, 인내를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초기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범람했지만 도대체 어떤 초기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초기교회를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공동체로 설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세준 목사는 크라이더가 로마 제국의 탄압 또는 부정적 정책 속에서 초기교회가 희한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점을 교회의 성장 전략이 아니라 윤리와 실천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내’는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것이 교회 공동체와 그 속에 속한 구성원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결정적 비결이었음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크라이더의 연구는 초기교회으 윤리와 실천이 어떠했는지를 네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인내’(Patience), ‘아비투스’(Habitus), ‘교리교육과 예배’(Catechesis and Worship), ‘발효’(Ferment)다“(2쪽). 실제로 교회 밖 사람들은 교회의 메시지보다는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한국교회가 공격적인 전도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감소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일명 그리스도인들의 신뢰도, 즉 윤리적 문제임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전도나 예배 참여를 위한 유인책도 전무했던 초기교회가 성장을 이어간 것과 달리 지금의 한국교회는 유인책은 넘쳐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교회가 ‘매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의 삶의 모습, 즉 윤리적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다(3쪽).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초기교회가 폐쇄적 태도를 견지한 이유는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크라이더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인내’가 절실했다. 이 부분에 대해 오세준 목사는 인내가 자칫 ‘게토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 “초기교회가 정체성을 강화한 것은 오히려 세상을 향한 믿음의 실천이었다”(5쪽)고 언급한다. 이것을 오목사는 ‘열린 정체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내’를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덕목일 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강조한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는 곧 제자도로 연결된다(6쪽).
인내를 제자도로 연결하는 시도가 탁월한 이유는 당시 교회가 외부의 박해 때문에 인내의 태도를 취한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의 한계, 위험성을 그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간혹 ‘지금의 교회가 감소하는 이유는 박해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설교를 듣는다. 하지만 이는 인내를 상황윤리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인내가 요청된 것이 아니다. 초기교회의 인내는 저항이었다. 현대 교회에도 인내가 필요한데 이유는 세속 사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크라이더는 ‘인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조급증’을 제시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는 인내를 잃기 시작했다. 사실 인내는 니체의 표현처럼 노예 도덕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인내는 저항이다‘라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였다. 오세준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연구자가 인내의 핵심을 언급하고자 하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가진 인내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오래 참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내’라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것쯤으로 단순히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인내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되었고, 니체가 염려한 노예도덕의 한 모습이 되었다”(14쪽). 이 부분이 인내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지점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불의한 권력에 대해 침묵과 기도를 강조하면서 인내하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입장이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고 용인하는 것이고 노예도덕임을 적어도 교회 지도자들은 알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오세준 목사는 “인내는 저항이다”라는 정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의 글 후반부에 평화교회와 생태교회를 제시한다. 평화교회는 글렌 스타센의 ‘정의로운 평화 만들기’(Just Peacemaking)을 예로 들고 있다. 스타센은 정의로운 평화 만들기를 위한 근거로서 산상수훈과 바울서신에서 찾고 있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초대가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였기 때문이다. 생태교회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교회, 특히 자본주의 논리에 부응하기 쉬운 개신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이다. “효율성이 최고 가치인 자본 논리가 내재화된 한국 개신교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경탄의 능력을 상실했다”(20쪽)는 오세준 목사의 지적은 통렬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애도와 경탄은 느림 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신교는 자본주의와 함께 태동했고 성장했다. 따라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개신교는 자본주의다”라는 명제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정의를 만드는 일이든, 타인의 아픔에 애도를 표하고 생태계 안에서 경탄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자본으로 만들어 가는 흐름에 저항해야 하며, 이러한 저항은 곧 인내를 요청한다.
결론적으로, 오세준 목사의 <초기교회의 인내와 발효>에 대한 이 글은 짧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그의 학자적 성실함과 통찰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로마제국이 명예-수치 체제를 강조한 반면 크라이더가 인내를 강조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명예-수치 체제에서도 그 기저에 인내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