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죽은 생명이 맞이하는 극적 변화다. 씨앗이 죽어, 씨앗과 전혀 다른 모양의 나무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죽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란 게 바울의 설명이다. 예수께서도 부활을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나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그게 가야 할 길이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베드로는 ‘항변’했다(마 16:22). 부활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임당하면 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비를 믿지 않고, 현실에 밝은 베드로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 야고보, 요한을 더해 제자 셋이 예수를 따라 산에 올랐다. 현실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형된 예수를 보며 제자들은 부활을 어림했을까. 라파엘로는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예수를 그리며 무력해진 중력을 표현했다. 중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중력이야말로 땅의 현실이다. 현실에 매이지 않은 예수를 보고 난 베드로가 산에 집을 짓자고 한 것은 자연스런 신심이다. 이만 한 신심은 있다.
라파엘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말고 산 위에 남자 2명을 더 그렸다. 나무를 배경으로, 나무처럼 다리를 땅에 묻은 듯 선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손을 모아 기도하는 성싶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중력 따위 무시해 버리는 예수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왼손을 편 채 오른 집게손가락으론 마을을 향한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면 마을에 남아 있는 아홉 제자들이 보인다. 사람들이 뇌전증으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고치지 못했다. 두꺼운 책을 살피며 방법을 찾는 시늉을 하고, 산을 향해 왼손을 쭉 뻗어 예수의 부재를 말하기도 하고, 다른 제자들 뒤에서 은밀히 속삭일 뿐 아이를 치료하지 못한다. 산에서는 예수도 모세와 엘리야처럼 중력에서 자유롭지만 마을에선 누구도 중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믿음이 적은 까닭”이라 하신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이 마을로 옮겨질 것이라고 하신다. 지리상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겠다. 믿음이 있으면 중력만큼 강한 땅의 현실을 초극해 마을 또한 산처럼 신성한 공간이 된다는 의미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력같이 강하고 벗어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아픔과 고통이 있다기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중력에 잡혀 아프고 고통스럽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까닭에 죽는다 해도 부활이 있다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도 없기 때문에, 현실의 중력에 잡혀 버린다. 교리를 외울 뿐, 진리를 믿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중력에 잡히지 않고 한 뼘만큼 솟아오른 산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믿음으로 마을에 옮겨진 산이 되라 하신다.
첫댓글 우리도 가끔 꿈속에서 중력을 극복하는 체험을 하곤 하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