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포장 시대
시골에 살면서 아내가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며 다양한 채소를 심기는 하나 제대로 수확하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애호박 서너 포기를 심은 것이 올해는 예상 밖으로 많이 열려 가끔 교회에 가져가 교우들과 나누기도 했다.
채식 위주로 식단을 꾸리는 우리 집은 이웃에 사는 이 장로님과 김 권사님께서 종종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주로 택배를 이용하거나 읍내 마트에서 사다 먹는 것이 더 많다.
오늘이 쓰레기 수거일이라 빈 종이상자를 챙기다 보니 모두가 농산물 상자이고, 내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과포장되었다. 시대가 그러하니 농산물도 상품이라 어쩔 수 없기도 하겠지만, 이리하지 않아도 농산물은 포장의 화려함보다 품질만 좋으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사 먹을 텐데…. 두터운 종이와 화려한 인쇄가 아니라도 실용적인 포장에 소박하나 선명한 상품명과 생산자 표시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모은 쓰레기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나가다가 보니 마당에 주차한 내 조랑말이 버티고 섰다. 이 차는 2012년식 모닝 경차인데 어언 10여 년이 넘어 사람 나이로 치면 내 나이와 비슷한 것 같다. 언젠가 후배 장로님 한 분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장로님, 안전 문제도 있고 하니 올해는 새 차로 한 대 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전이야 하나님께 보험 들어 놓았고, 그동안 중요한 부품을 몇 번 갈긴 했어도 아직은 잔고장 없이 고속도로에도 잘 달립니다.”
사실은 나도 좋은 차 타고 싶다. 그러나 품위를 위해서라면 내게 애써 유지할 만한 게 없어 나의 이 변명이 그분에겐 청빈(淸貧)을 뽐내는 허세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어제도 교회에서 호박을 받은 한 교우가 인사를 한다. “장로님, 잘 먹겠습니다. 올해는 호박 농사가 풍년인가 봐요?” “네…”라고 대답한 후 생각해 보니 텃밭에 애호박 서너 포기 심어놓고 내가 마치 널따란 농장이라도 경영하는 농장주처럼 으스댄 것 같았다.
이 아침, 동구 밖 쓰레기 집하장에 종이상자를 버리고 오면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내 인생에도 이처럼 과포장된 부분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어제 제직회에서 항존직 직분자들의 퍼스펙티브스 선교훈련 독려를 위해 행한 말도 듣기에 따라서는 손녀 자랑질이나 연륜을 과시하는 것으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미 마음 정한 분께는 매우 죄송하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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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인생에도 과포장된 부분이 많이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