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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0일
말씀 : 고후7:10~11
제목 :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믿음의 뿌리를 십자가 보혈에 두는 것과 세상에 두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보혈에 뿌리를 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을 열매로 맺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과 교제와 사귐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믿음의 뿌리를 세상에 두면 말씀을 세상의 것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고, 세상의 화려함과 세상의 문화를 따라 욕심과 탐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이것이 종교생활이 되고 교리적이 되고 그래서 삶 속에 말씀을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대하는 껍데기 신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망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갈망은 영적인 갈망이요, 이것은 우리의 기대로 사는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로 사는 갈망의 삶입니다.
이런 갈망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소원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원하지 않고 갈망하지 않은 일들이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일들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갈망하는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요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로 사귐으로 만족하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갈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지침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의 종교지침서는 율법과 전통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침서는 무엇입니까? 의식과 형식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지요, 이 말씀이 종교적 지침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의식적 행위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과 지침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고 변화되지 않으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의식적 지침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심령에 철필로 새겨질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길이 되며 진리가 되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종교적 행위만으로 만족합니까? 현실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 보혈에 믿음의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후7:10~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얼마나 유익되는지 아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 즉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즉, 그리스도 보혈에 믿음의 뿌리는 두고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을 말합니다. 이와 비교해서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세상에서 마귀는 분노와 원망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의 삶입니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두 가지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벨과 가인, 아브라함과 롯,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다윗과 사울, 베드로와 가룟유다, 등의 같은 시대 같은 삶의 배경에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디에 뿌리를 두고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결과입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세상을 향하고 있느냐, 이것을 좀 더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회개하는 삶을 살았느냐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 보혈에 두면 이처럼 보혈을 통해 구원을 이루게 되며 이 구원의 복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충만함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때 우리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고 사모하게 하는가? 이 말씀으로 얼마나 변증하게 하고 얼마나 분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얼마나 사모하게 하고, 얼마나 열심 있게 하고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하는 구체적으로 7가지의 실례를 들고 있는데요, 저번에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들어오면 회개와 통회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합니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 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각자 삶이 다 다릅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근심도, 두려움도, 고난도 형통함도 각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빚어내고 다듬고 계시며 누구도 이런 일로 인해 각자 처해진 일로 인해 손해 보게 하지 않는 것을 아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일만이 복이라고 할 수 없고, 나쁜 일이 저주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의 뿌리는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믿음의 뿌리는 두면 성경말씀이 지침서, 혹은 종교서적이 되고 맙니다. 왜 성경이 지침서나 종교성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말씀을 내 삶 속에 새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 앞에 우리가 서 있으면 생명의 말씀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데 온전 연합되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여 우리가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십자가 보혈에 두면, 말씀을 보고 들을 때 문자적으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상대방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은 보면 용서 못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니까 사람들이 불쌍한 것 아닙니까?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합니까? 긍휼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누가 기다립니까? 아버지께서 기다리십니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도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죄하는 것으로 가는 사람은 지침서에서 위배되니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종교관에서 교회 생활을 하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열하고 탐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감동’은 영어로 God-breathed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뜻입니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자로 기록된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숨결로 기록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숨결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스님도 읽습니다. 종교연구가도 읽습니다. 학자들도 읽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가끔씩 변화 받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문자로 읽고 교훈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뿌리를 세상에 둘 때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게 실천하지만 이 말씀에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말씀을 받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부터 믿음을 십자가 보혈에 두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말씀을 통해 찾고 구하고 갈망하는 심령들이 되십시오.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겠습니다.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 것을 부모들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상처로 빚어진 세상으로만 봅니다. 오은영 선생님의 금쪽상담소가 방송으로 계속 나오는데 저는 보지 말라고 그분이 출연할 때부터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설교시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자꾸 끄집어내며, 아이들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상처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 있을 경우가 될 때 자연이 치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께 상처를 받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해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상처가 자연히 치유된다는 말입니다. 무의식속에 담겨 있는 상처를 끄집어내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있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치유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창조사역에서 회복의 관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로 가면 자연히 회복되는 경우가 참 많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처가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오은영씨의 상담을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본주의적인 접근법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인권과 아이들의 입장만 계속 강조하니까, 아이들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요,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문제로 야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들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니까 질서가 무너지고 권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은 아이들 상처를 겁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의도를 모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셔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자식들을 모질게 다루었습니다. 특히 언어로 모질게 했습니다. ‘호로돌놈의 새끼, 문디자즉 나가 디져라라,’이런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께 전혀 상처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 6살 정도였을 것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국밥을 펴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많이 먹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라’ 그런데 형님은 안 것입니다. 우리 먹이려고 어머니가 국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형님은 국밥은 남깁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왜 안 먹어, 더 먹어라 남기지 말고 먹어라’, 그럴 때 제가 ‘그러면 형 것도 내가 먹을까?’ 그런데 어머니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시고 제가 성장했을 때 어머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형이 대견했다고’말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형이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 때 어머니께서 좋은 것 먹이지 못한 것이 몹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김’을 사서 식사 때마다 김을 형님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음을 이제 드디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가끔씩 어머니가 이야기하셔요, 형님밖에 줄 수 없는 상황인데 저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에 고마왔다고, 어머니는 마음이 쓰리고 아팠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니까 어머니가 모질게 몰아붙여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아니까 상처가 있을 수 없지요.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알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중하고 그래서 함께하는 것, 자녀와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셔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간에 그분의 의도와 뜻을 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가슴에 철필로 새기면 그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 성품으로 살 수 있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성경 구절 액자를 걸어놓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꽤 있습니다. 액자 걸어놓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좋아서 걸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좋은 말씀 액자에 걸어놓듯이 성경에 좋은 구절 색연필로 줄치지 마시고, 좋은 구절 암기하지 마시고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과 뜻을 깨달아 변화의 삶을 살기 위해 늘 십자가 보혈에 믿음의 뿌리를 두고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 액자에 쓰여진 성경구절이 ‘서로 사랑하라’ 이 구절을 걸어놓고 부부가 대판 싸우고 사는 가정은 아닙니까?
부부가 각방을 쓰면서 남편 방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액자가 걸려있고 아내 방에는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 는 액자가 걸려서 말씀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십자가 보혈에 두는 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최고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이것 또한 엄청난 복으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그 거룩한 곳에서 교제는 엄청난 축복인데요, 일단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거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혈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어떻게 이곳에서 교제가 일어납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합니까? 그것이 사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사귐의 방법으로서 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임재 가운데 사귐으로 교제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가지는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면 이 특권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특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토해내고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특권, 이런 특권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하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우리가 만인 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있었던 곳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실감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성막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그곳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영광을 나타내는 곳이며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이런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본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성소를 통해 알 수 있는 본질은 무엇입니까?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분을 부르고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고 나가는 것에서는 우리가 완전한 거룩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거룩을 가지고 나갈 때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만나는 것처럼 만남의 장소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사귐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깊은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보십시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의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죄 없다는 선언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보지 못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론과 실제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라는 말입니까?
먼저는 기도라는 자체가 얼마나 거룩한 행위인지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흉측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로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한 놀라운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와 사귐으로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축복이 내 삶에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가 얼마나 거룩한지에 대해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의 ‘의식’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치르는 의식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도의 기쁨과 기도의 축복을 놓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와 교통 가운데 사귐이 있는 이 귀한 삶과 특권을 놓치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