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맹산 誓海盟山
기사승인 22-06-08 17:10
- 작게+ 크게
공유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지난 일요일 ‘그대가 조국’을 관람했다. 행여 매진이라도 될까 싶어 일주일 전에 사전 예매를 해 두었다. 하필 이날은 학회가 있는 날이었다. 내게 이 학회는 ‘간찰 초서’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지만 학회를 제쳐놓은 채, 기어이 영화관을 향하였다. 관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는 그만 설움에 복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관람객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고작 6명에 지나지 않았다.
오도된 여론을 철석같이 믿으며 ‘조국’을 저주하였던 그 수 많던 인간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양심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이 '영화'를 보아야만 한다. 5.18이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굳게 믿는 인간들은 단 한 번만이라도 ‘망월동’에 가서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했어야 옳다. 당신들의 비난이 정당하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최소한의 균형을 갖추어야 옳다.
돼지고기 먹는 저급한 머리로 자신이 레거시 미디어에 세뇌된 줄조차 모른 채, 언론이 홍보하는 대로 의심 없이 믿고 마는 그 단순 무지에서 벗어나 현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자신이 믿는 바대로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중시한다면, 양심이 순기능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저급한 욕망을 비워내야만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반드시 고쳐야 할 치명적 단점 중 하나가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편견이 지나치게 심하여 배타적 성향이 매우 강한 민족이라는 것이 늘 부끄러웠다. 우리는 냄비처럼 쉽게 뜨거워지고 또 쉽게 식어서 천지를 진동할 것 같던 사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 쉽게 잊고 마는 냄비 같은 근성을 가진 민족이다.
예로부터 진실을 바르게 규명하려는 노력에 몹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저 시류에 편승하여 군중 속에 숨어서 돌이나 던지며 ‘낙인찍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사문난적’으로 낙인을 찍던 성리학의 시대가 그랬고, ‘친일파’로 낙인찍던 해방 전후의 시대가 그랬으며, ‘빨갱이’로 낙인찍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그랬다.
메카시 광풍이 휘몰아치던 지난 3년, 검찰 특수부는 참고인과 피의자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했다. 뿐만이 아니라 문서를 조작하고 진술을 기만하는 등의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검찰은 국가에서 공인된 ‘범죄 조직’이었다. 법원 역시 이에 동조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일에 매우 편파적이었다. 이미 답은 저들끼리 정해져 있었다. 검찰의 충견을 자처한 언론은 대대적인 여론몰이로 분위기를 몰아서 파렴치한 범죄자로 일가족 모두에게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고 말았다.
장관 후보자의 생방송 청문회 도중 그의 아내를 소환 조사 한번 없이 의혹만으로 전격 기소하는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공권력의 횡포에 의하여 조작된 증거와 낙인찍기로 한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야만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2019년 서울은 ‘범죄의 도시’였고, 대한민국은 ‘범죄의 국가’였다.
혹자는 조국을 ‘예수’에 비견한다. 그의 고난은 십분 공감하지만, 이 비유는 동의하기가 좀 어렵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고함치는 성난 군중은 영락없는 대한민국 언론의 모습이었으며, 예수를 거칠게 심문하던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야당 청문 위원들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역겨운 대제사장들과 공회의 이름들은 이와 같다.
‘여상규’, ‘김도읍’, ‘김진태’, ‘장제원’, ‘주광덕’, ‘오신환’, ‘이은재’, ‘정점식’ 그리고 싸가지를 상실해 버린 제자 ‘금태섭’ 등이다.
여기에 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닮은 꼴이 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며 손을 씻던 ‘빌라도’ 총독이다. 그는 대한민국 행정부 수반의 모습과 일란성 쌍둥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세 명의 인간을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내면에 마그마가 끓어 올라 스크린에 뛰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느라 호흡이 가빴다.
그 첫 번째 인간은 고졸 학력을 박사로 위조하여 27년간을 감쪽같이 대학 총장을 해 먹었던 모해위증 범죄자인 동양대 총장 ‘최성해’였다. 두 번째 인간은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의 칼을 사적 감정으로 마구 휘두른 깡패 검사 출신의 검찰총장 ‘굥서결’이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인간은 자신의 손에 피 묻히기를 싫어하여 차도살인 만을 고집하다 끝내 결자해지를 하지 못하고 청기와 하우스를 떠나버린 ‘빌라도’ 총독이었다.
과연 인간 ‘조국’은 앞으로 이 땅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것 역시 이미 불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있는 고통 앞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맨정신으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담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잊혀질 권리조차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맹자는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근골을 힘겹게 하고, 몸을 굶주리게 하는 등 그를 곤궁하고 결핍하게 만든다. 그 사람이 하는 바를 어긋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성품을 강인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하늘이 그를 단련시킨 것에는 까닭이 없지 않을 것이다. 조국 전 장관은 취임에 임하기 전 자신의 각오를 이순신 장군의 ‘서해맹산(誓海盟山)’에 빗대어 소회를 밝힌 바가 있다.
예수에게 자연인의 삶이 아닌 ‘공생애’의 삶이 있었던 것처럼, 조국 전 장관이 이제 자연인으로의 삶이 불가능하다면, 오히려 서해맹산과 같은 굳은 의지로 ‘공생애’를 살아서 그의 삶에 반전을 이루어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 그렇다면 비록 예수에 견줄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이순신 장군과는 충분히 견줄 만한 위대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누군가? 칼 찬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 아니었던가?
지극히 몽매한 나의 관견(管見)으로 모질고 잔인한 주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차기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하여 심판을 받은 뒤 이재명 등과 대권 경합을 벌인다면, 모름지기 국민의 성원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에게 간곡한 심정으로 두 가지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하나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자신이 지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서 했던 말로 내가 윤색하여 번역하였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반드시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딛지 않고 일어나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
또 다른 하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른다.”
부디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에게 ‘평안’과 ‘명예의 회복’의 길이 속히 이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첫댓글 명문입니다. 가장 죄가 많은 자는 ‘빌라도’ 총독이네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