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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연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명절을 지나도 휴일이 며칠 더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느긋해집니다. 추석을 맞던 어제 이른 새벽에는 잠깐이지만 구름 사이로 밝고 둥근 달이 머리맡으로 빛을 한 아름 부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작 한가위 날 저녁에는 보기 힘들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지역마다 조금 다르기는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건데 그 날이라고 유별난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렇게 의미를 담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튼 휴일 겸 주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지나 새 달입니다. 드디어 시월! 가을이 찐하게 익어가는 달입니다. 위에서부터 색동옷을 입고 내려올 것입니다. 봄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더욱 우아하게. ㅎㅎ
점점 가족이 모이기 어려운 문화가 되어가지 않는가 싶어도 아직은 다행히 명절 교통체증은 여전한 것을 보며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한 십 년 후를 상상해봅니다. 우리 앞 어른 세대는 많이 떠나있겠지요. 어쩌면 그 때쯤에는 머리 희끗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더 지나면 일인가족 명절을 보내야 하는 때가 오지는 않을까요? 하기야 누가 가족이냐? 하는 질문도 해봅니다. 꼭 혈연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이웃사촌으로 맺어지는 가족이 더 흔해지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사회도 의식도 문화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치만 끈질기게 구태를 붙들고 있는가 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잘 아는 푸시킨의 시를 생각하며 새 달을 맞으렵니다. 시월에는 더욱 건강하고 ‘즐거운 날’의 희망이 더욱 빛나기를 바랍니다. ^)^
2023년 9월의 마지막 날 김종우 목사 드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 : 8)
<타겟>
최근에는 전화도 함부로 받지 않습니다. 문자가 와도 섣불리 열어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확실하게 판명된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덮어두고 넘어갑니다. 얼떨결에 한 번 눌렀다가 어떻게 당할지 몰라 두려워집니다. 때로는 이 전화가 왜 자꾸 오는 거지?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눌러 통화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겁이 나서 아예 무시하고 넘어갑니다. 생각하면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슬퍼집니다. 많이 편해지기는 했는데 그만큼 불안요소가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차라리 불편해도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세상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중고품을 사려고 해도 직접 상점에 찾아갔습니다. 좋은 점은 금방 점검을 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작동은 제대로 되는지, 어디 흠은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로서의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용이 가능한 것인지 현장에서 볼 수는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직접 운반을 하든지 아니면 차량을 불러 운반해야 합니다. 작고 가벼운 물건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그 모든 것을 집에 앉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판매자는 자기 사용하던 물건에 대하여 가능한 자세한 정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합당하다 싶은 가격을 알립니다. 구매자는 설명과 사진을 보며 확인하고 가격의 합리성을 따져봅니다.
중고품 거래량이 굉장히 늘어났답니다. 하기야 그만큼 모든 소통수단이 발달되었고 서로가 편하기도 합니다. 일일이 물건을 내놨다 들여놨다 할 필요가 없고 말 그대로 말만 하면 집 앞에서 집 앞으로 옮겨집니다. 이런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비용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한 생활을 원하고, 뿐만 아니라 시간도 절약이 되고, 어쩌면 중간 수수료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개인 대 개인으로 연결하여 팔고 사는 일입니다. 여기 중요한 점이 상호 신뢰입니다. 서로 믿어야 돈이 오고가고 물건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사회 속에서 그것을 빌미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가끔 나옵니다. 애꿎은 피해자가 생깁니다. 물건을 속인다든지, 돈만 받고는 잠적해버린다든지 합니다. 구매자는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듯 당합니다. 물론 경찰에 고발하고 수사를 요청하지만 개인 사정만 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지하세월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내기로 작정합니다. 이런 놈은 혼나봐야 해. 맘을 먹고 뒤지고 기다립니다. 분명 한번으로 끝낼 놈이 아니라는 거죠. 비슷하게 거래 요구가 인터넷에 뜹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내서 쫓아다니며 사기꾼임을 알립니다. 장사(?)가 될 리 없습니다. 그 놈이 가만있을까요? 이미 악한 마음을 먹은 좋지 못한 놈입니다.
단순히 온라인상의 전투가 아닙니다. 인터넷과 통신의 귀재임을 몰랐던 탓이겠지요. 개인의 신상을 다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개인의 생활을 따라다니며 망가뜨립니다. 이미 주소와 연락처는 알려졌으니 그곳으로 시키지도 않은 배달이 줄기차게 날아듭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자신의 움직임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 모든 사정을 들고 경찰을 다그칩니다. 이래도 안 도와줄 겁니까? 어쩔 수 없이 함께 상대방을 찾아 나섭니다. 상대방의 거처를 알아내서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사건이 그냥 사기사건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건이 좀 더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동료가 희생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냥 좀도둑의 사기행위로 여겼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괜히 벌집을 건드렸구나 싶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는 물러설 길도 없습니다. 맞닥뜨려 싸워야 합니다. 생활은 이미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당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치근덕거리는 상사가 사기 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한 근거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상사마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한 번 그 몹쓸 놈과 직접 부딪칩니다. 그리고 인질이 됩니다. 경찰이 발견하여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결국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잘 도와주던 경찰이 사망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이런 놈은 결코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질기지요.
세상이 발전하여 그만한 기술과 지식이 있으면 맘껏 쉽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것을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남을 해하는 범죄도 생깁니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게 유지되려면 상호간의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악용하려는 못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들고 일어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예방하며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유지해야 합니다. 악은 결코 선을 이길 수 없다는 자연법칙을 믿고 말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 21) 영화 ‘타겟’(Don't Buy the Seller)을 보았습니다.
<말 없는 소녀>
영화를 보고 나서 소녀의 파란 눈이 특히 빛나는 사진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마치 깊고 푸른 바다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 깊은 곳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짐작은 합니다. 소녀의 눈빛을 보며 그런 상상을 합니다. 도대체 저 속에 무슨 생각들이 들어있을까? 그런데 소녀의 그 깊은 속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가족도 이웃도 잠시 함께 해주던 친척 가족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 자식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쁩니다.
‘통 말이 없는 아이로군요.’ ‘그래도 할 말은 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정말 말이 없습니다. 하기는 그다지 말할 필요가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때로 질문에 대답은 합니다. 말을 못하고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대사 중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었단다.’ 우리네 대화 중에 꼭 필요한 대화는 몇 %나 될까요? 물론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대화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꽤나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하며 친분도 쌓고 서로를 알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 인하여 화를 당하는 경우도 봅니다.
때로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하는 가정에는 없고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은 가정에는 계속 생깁니다. 거참! ‘코오트’의 집에는 코오트의 형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또 임신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줄줄이 있으니 엄마 혼자서 가정을 꾸려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말썽이나 부리고 술이나 마시고 도박에 빠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도움은커녕 해나 끼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을 아끼고 잘 돌봐주는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귀찮아하는 모습입니다. 코오트를 맡기러 가면서도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원하면 계속 데리고 있으라고 그래.
아무리 가족이 따돌리며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아도 그래도 가족입니다. 그중 엄마는 자식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합니다. 환경이 따르지 않아서 방학 동안만 맡기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두 부부만 살고 가정형편도 한결 나으니 코오트가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기꺼이 승낙해준 것만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코오트는 낯선 집으로 옮겨옵니다. 자기가 원한 것도 미리 안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방학과 함께 맡겨져서 이사(?)온 것입니다. 부모와 비슷한 연배의 두 부부가 사는 곳입니다. 처음 보는 부인이지만 매우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런데 남자는 아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습니다. 말이 없고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표정도 없습니다.
가지고 온 옷은 입고 있는 것뿐입니다. 부인은 가지고 있던 옷을 찾아줍니다. 그런 대로 입을 만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얼마 전에 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들 옷입니다. 그만한 때야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처음으로 바지를 입어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일하기는 그게 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갑니다. 아주머니는 이야기도 해주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오트는 집에서보다 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마도 아저씨 ‘션’이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아이’라고 동네 사람에게 대답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코오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집니다. 아주머니 따라 요리도 돕고 아저씨를 따라 농장 일을 돕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 어른에게서 자기 엄마 아빠와는 사뭇 다른 부부의 모습도 봅니다.
말이 없던 아저씨도 말을 붙입니다. 농장 일을 하면서 같이 있는데 말이 없을 수는 없지요. 때로는 아주머니가 볼 일 보러 외출한 사이 두 사람만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뚝뚝하지만 션이 먼저 나가면서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던 과자를 식탁에 남겨줍니다. 코오트가 얼른 집어 듭니다. 두 사람의 정이 나타나는 증표이지요. 그렇게 농장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시간은 흐릅니다. 주일미사에 가야하는데 입고 온 그대로 교회에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해서 시내에 함께 나가 새 옷도 사줍니다. 가게 주인은 딸로 착각을 합니다. 아주머니의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미 출산도 하여 코오트에게 또 남동생이 생겼답니다. 아무튼 곧 개학이니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뜻하지 않게 감기가 걸린 코오트를 보며 아빠는 감사는 고사하고 불만을 토합니다. 그런 아빠의 눈을 피합니다. 션 부부는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코오트와도 작별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돌아갑니다. 그 뒤를 갑자기 코오트가 뜀박질하며 쫓아갑니다. 차에서 잠시 내려 울타리 문을 열고 있는 션에게로 달려가 안깁니다. 뒤에서 아빠가 쫓아옵니다. 그런데 코오트가 션에 품에 안겨 가만히 부릅니다. ‘아빠!’ 누구를 부르는 소리일까요? 영화 ‘말 없는 소녀’(The Quiet Girl)를 보았습니다. 2021년 아일랜드 작품입니다. 누가 가족인지, 누가 가족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종인가 마귀의 종인가?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매 번 그곳을 지나가도 여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답답하지요. 이것저것 참고해보려 해도 말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인데 서로가 다르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 번, 스무 번 읽어도 그 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마치 안개 속을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그러면서 10년, 20년 신앙 연륜만 늘어갔습니다. 그러니 햇수를 많이 쌓았다고 해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배우는 사람이나 수십 년 배운 사람이나 크게 차이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겉으로 드러난 것은 단지 직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저 딱하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러자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라고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어려워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의 내용이 함께 들어있지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와 교훈이 있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며 교훈입니다. 삶에 대한 가르침이지요. 그것은 어려울 것도 이해하기 힘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언입니다. 예언은 당장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지요. 장래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모두가 다 알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마귀는 하나님 백성이 잘 되는 것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예를 듭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번성하니까 마귀의 도구가 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억압정책을 씁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도록 하지요.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가 태어났다고 하니 마귀의 도구가 된 헤롯은 베들레헴 근방의 사내아이는 모두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마귀가 미리 알게 된다면 그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미리 말씀은 하셔도 알지 못하도록 감추어두셨습니다. 분명 말씀은 있는데 알지는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봉했다,’ 라고 표현합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그렇게 봉해져 있으니 무식하든 유식하든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자로서는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겠지요. 체면이 안 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나름대로 연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예를 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로 말씀을 받습니다. 물론 장래사입니다. 자기가 받아서 기록은 하였으나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단 12 :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궁금하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9절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 봉했던 것이 열리는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바로 그 묵시가 곧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예언이 실상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 전에는 하나님이 감추어두셨으니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알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참 후 백년이 될지 천 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말씀이 사건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름 받았는데 모른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겠느냐 하면서 나름대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29 : 9 - 10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선지자나 선견자는 같은 말입니다. 먼저 아는 자나 먼저 본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 곧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목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소경처럼 된 것이지요. 놀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루실 일을 위해서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면과 자기 욕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일방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종에서 마귀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때까지 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가 오기까지는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임의로 연구해서 가르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이 되겠지요.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물론 그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들도 모두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만히 기다리는 자들에 비해서 더욱 열심과 열정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열심뿐만 아니라 고집도 특별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그래서 옛적부터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신 9 :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그렇다면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마귀가 우리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한다는 것이 또한 이상하고 신기합니다. 마귀의 주된 일은 하나님 백성을 무너뜨리고 넘어뜨리는 일입니다. 무엇부터 손을 댈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만든다.’ 시작이 무엇입니까?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우리 생각으로 침투합니다. 의심하게 하고 곡해하게 하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세상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그 일을 자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메시야를 보내주마 약속하셨습니다. 그 메시야는 구약성경 여기저기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려둡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겠습니까? 하늘에서 오시겠지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세상이 놀랄 대단한 퍼레이드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억압받고 있는 그 하나님 백성을 악한 무리들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세상이 진동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선지자 이사야의 말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 34 : 4 - 5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원수는 심판을 받고 우리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는 기대가 충만해집니다.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야 지난 이야기이니 알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메시야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리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는 이런 저런 이적을 행하며 메시야 행세를 하고 다닙니다. 그 하는 말도 범상하지 않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혹시 이 사람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그런데 백성의 목자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마 9 :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나님의 보내신 거룩한 자가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면서 어찌 안식일을 자꾸 범하는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자기네가 목숨처럼 지켜온 하나님의 율법과 배치되는 이 자는 없이해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막 3 :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생각이 다르니 하시는 일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 같은 줄로 착각합니다. 아니면 우리 같기를 바랍니다. 어찌 보면 경거망동이지요. 어찌 됐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 계획을 예언으로 말씀하셨고 그리고 때가 되어 그 말씀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이루는 시점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루고 이룬 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다르지요. 그래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는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거지같은 동네에서 온다고?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라면서 그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거지 나부랭이 같은 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뭐나 된 것처럼 행세를 하는 젊은 것이 뭘 안다고 떠들어? 그야말로 자존심 상하고 무엇보다 자기네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메시야를 우리 각자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성경대로 메시야를 그리지 않습니다. 사 53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런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 마음속에 메시야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육체의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그 하신 말씀까지도 우리의 상상으로 지어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마귀의 장난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자꾸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마귀의 뜻입니까? 분간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상 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대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 생각대로 바꾸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뜻이지요. 그러므로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라 부름을 받았지만 사실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셈입니다. 마 24 : 1 - 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눕니다.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며 감탄을 하지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은 자랑이고 자부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다 무너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다니 말이 안 된다 싶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곧 하나님 백성이 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막히고 놀랄 일이지요. 두렵고 떨리고 결코 당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난다는 말인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묻습니다.
그 마음으로 묻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런 일’ 곧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때는 하나님 백성이 심판을 받아 망하는 때이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이며 그 때가 ‘세상 끝’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상 끝’은 지금 교회들이 말하고 있는 세상 끝과는 상관없는 말입니다. 교회들이 말세라고 말하는 지구촌의 마지막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네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생각에 들어간 마귀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입니까, 마귀의 종입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집하여도 실제로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알고서야 그러겠습니까? 자기 안에 마귀의 영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모릅니다.
성경 다른 곳을 봅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죄를 없게 하시려고’ 오신 때는 초림 때입니다. 그런데 그 오신 때를 가리켜 ‘세상 끝’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세상 끝이 두 번 있게 됩니다. 이미 한 번은 지나갔습니다. 초림이지요.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 재림입니다. 마 24장에서 제자들이 물었던 ‘세상 끝’은 바로 재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재림 때의 징조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지요. 장래사입니다. 예수님이 장래사를 말씀하시니 곧 예언이고 성경의 예언은 이룰 때까지는 비밀입니다. 봉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룰 때까지는 모릅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시고 그 이룬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만이라도 깨우쳐주어야 했습니다. 눅 24 :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풀어 곧 열어서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즉 당신이 구약의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앞에 일어날 일입니다. 초림의 사건은 지나간 역사이고 우리 앞에 이루어질 재림의 사건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마 24장에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나중에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잘 아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사건이고 어쩌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서입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하면서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계 1 :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니 당연히 봉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해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을까요, 틀릴까요? 맞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봉해놓으셨는데 자기가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말합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입으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면서 딴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이룰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육신을 입고 오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영으로 오십니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육신)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4 :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림 때는 예수님의 택하신 목자가 그 가지고 있는 육신에 예수님의 영을 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목자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예언도 와서 이루고 이룬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예, 요한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떠난 사도 요한이 부활해서 오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 요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 하여 엘리야를 기다린 것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그 엘리야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재림 때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도 요한 역할을 할 당신의 종을 택하여 재림의 사건을 이루고 증거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것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가르친다면 확실하게 마귀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초림 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합니다. 그 하는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분명 다릅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재림 때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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