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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킨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된다. 어떤 죄수는 3일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시간만에 운명하셨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이다.
오늘은 성 금요일.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 처절한 십자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그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고대 아프리카, 애굽, 바사, 헬라 등에서 유행했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하게 치욕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예나 반란자들, 극악한 강도들에게 이런 십자가형이 주어졌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약 3일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탈진과 아픔 때문에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난 후에 사흘째에는 절명하게 됩니다.
고통과 탈진이 너무나 심할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방법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형수의 시체는 연고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주어서 무덤에 장사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나
아주 극악한 사형수의 경우에는 십자가 틀에 내버려두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일을 계신 것이 아니라 오전 9시에 처형을 당하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한마디로 표현한
그 말 앞뒤에는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순간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렇게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하신 것입니다.
▣ 십자가 고통의 의미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한다.
▣ 갈보리 십자가
한때 남침례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셨던 엘리스 풀러 박사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성지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토요일날 사람들이 박사에게 말하기를 “풀러 박사님, 일요일 아침에는 갈보리로 가게 될텐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 지점에서 박사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박사는 설교를 해야 할 책임감 때문에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지만 도무지 합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서 설교를 할 자격이 도저히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는 잠도 자지 않고 마태복음의 십자가 고난의 기사를 그대로 암송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사람들은 갈보리로 걸어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모든 것이 죽음처럼 고요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할 시간이 되자 풀러 박사는 얼굴을 하늘 쪽으로 돌리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낭송을 마친 박사는 “저곳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 돌아가셨던 곳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작 왓트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합소서.
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발길을 돌렸을 때 그들의 마음엔 만약 목숨이 천 개가 있다면
그의 보혈로서 그들의 구원을 사실 예수님을 위해 천 개의 목숨이라도 다 드리기 원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이십니까?
▣ 십자가의 도
성경: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목사는 칼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의 도
어떤 신자가 목사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인 것 같습니다."
불만 섞인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는 즉시 성경을 펴들고서 말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래도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불신자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돌아갔다.
▣ 곱하기 십자가
십자가를 세워 놓고 보면 더하기표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등에 지면 곱하기표로 변한다.
기독교는 더하기의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하는 곱하기의 종교다.
100만원에 10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다. 그러나 100만원에 100만원을 곱하면 10억원이 된다.
더하기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해타산적인 사람은 희생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곱하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못 박는 십자가를 진다.
이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포함된 십자가다.
죄인 된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 죄인 된 나는 죽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다.
사명의 십자가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 받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자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사명의 십자가를 짐으로 곱하기의 기적을 이룬다.
▣ 텅 빈 십자가
지난주 어느날 기독교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분이 '십자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연약해 보이는 아가씨가 사람 키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매는데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봤더니
속이 텅 빈 십자가 였습니다.
얇은 베니어판으로 조립한 다음 겉에 나무결무늬의 벽지를 발라 만든 모양만 '십자가'였습니다.
아마도 교회당 강단 뒤 휘장 가운데 거는 십자가인 모양입니다.
아하! 십자가! 사형틀. 어깨에 매면 장정이라도 휘청거릴 만큼 무겁게 짓누르는 십자가!
내가 달려 죽어야 할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십자가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시골교회에서 둥이 휜 소나무로 만든 진짜 십자가가 휘장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반지르르 하고 멋진(?)십자가를 살 돈이 없어서 누군가가 서투른 솜씨를 냈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내 십자가를 내가 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십자가를 지되 '속이 텅 빈 무늬만 십자가'를 지지 말고, 울퉁불퉁한 옹이가 그대로 있는
무거운 진짜 십자가를 매야 합니다. 멋진 십자가를 사서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 '무늬만 십자가'를 진 아가씨를 보면서 쉽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 네 십자가부터 먼저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 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 간데 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 없단다
▣ 십자가를 진 사람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사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 내게 맞는 십자가
상점을 경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상점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십자가를 골라 보아라.”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골랐습니다. 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금십자가였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다른 것은 가볍기는 한데 표면이 매우 거칠어서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고르던 끝에 그는 방구석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부터 지고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작은 부스러기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 십자가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 가장 작고 가벼운 짐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마음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 가다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음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되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다.
▣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를 지배하며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일화입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노래를 배울 수조차 없는 처지였지만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기에 교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뉴욕의 맨해튼 홀에서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끝난 뒤 많은 백인 기자들이 신문에 악평을 써댔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오늘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이 만큼의 생활이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과 재주와 명성도 좋지만, 모든 것보다 은혜를 얻어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 십자가를 지는 삶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챈트니는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5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보편적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구적인 것이다.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한 번만 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져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 당하신 것과 같이 봉사할 때도 몸이 아프도록 일해야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드려서 수고해야 하고 쾌락에 쓸 수 있는 돈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손해도 맛보아야 한다.
다섯째,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 두 개의 나무 십자가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 가구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동생은 집안 일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동생 춘팔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형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날도 춘팔이는 도박판에 가서 어울리다 돈을 모두 잃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형 춘삼이 크게 다칠 뻔한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춘팔은 형에게 애걸을 합니다.
도박빚을 갚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 남은 통장을 달라고 조릅니다.
형은 할 수 없이 도박빚을 갚고는 삼남매가 행복하게 살자며 통장을 내어줍니다.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운좋게 돈을 많이 땃지만 돌아오는 길에 따라붙은 깡패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채 집으로 뛰어들어온 춘팔이 공포에 질려 형에게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경찰이 집을 포위하고 스피커로 자수를 외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형을 각오하며 걸어나가려는 춘팔을 돌려세우고 형 춘삼은 피묻은 옷을 벗겨 자기가 입습니다.
만들다 만 나무 십자가를 꼭 쥐어주며 춘삼은 달려 나갔습니다.
경찰의 정지 명령에도 마구 달려 나갔습니다.
마침내 총성이 들리고 춘삼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경찰은 후에 죽은 것은 살인자 춘팔이 아니고 형 춘삼이였음을 알게 되었으나
형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에 춘팔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춘팔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박을 끊고 형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던 십자가가 점점 형의 아름다운 작품을 닮아갔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삶도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어느 날 형의 무덤을 찾은 춘팔은 두 개의 나무 십자가를 무덤에 꽂습니다.
하나는 형이 만들었던 것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춘팔의 십자가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당신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이것은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 아내가 진 십자가
스틴리 존스 박사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고향을 떠나 있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이를 모르는 아내의 신뢰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는 불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아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가 당장 떠나 버려요! 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아내에게 고백하면서 자기의 죄가 아내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비난은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내는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당신을 떠나진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사랑 속에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아내의 사랑으로부터 십자가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간부터 “나는 구원받은 자였습니다.”라고 그 사람은 고백했습니다.
▣ 자기 십자가
성경: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귀찮게 여긴 안경이 생명을 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통령이었던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구해 주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독한 근시였던 루즈벨트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나는 가까운 곳을 보고, 또 하나는 먼 곳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을 벌이던 중에 밀워키(Milwaukee)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쉬렌크라는 남자가 그를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루우즈벨트는 다쳤지만 연설을 마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상처를 검사했는데 그의 조끼 주머니 속에 있었던
강철로 된 안경집이 총알을 그의 심장을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통령은 대단히 놀라와하면서 부러진 안경집과 그 안에서 부서진 안경을 보면서
"나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갖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했는데..." 라고 말하며,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그것을 사용하셨구나" 라고 했습니다.
이제 안경은 더 이상 귀찮은 도구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자기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십자가의 사랑
본문: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느 신앙인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습니다.
내 가슴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에의 불타는 사랑을 담자.
이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 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한다.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리라.
이것이 나의 종교다. 나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다.
예배가 아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 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 휴지 같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들이다. 아름다운 결단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신앙의 결단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최후는 최초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밤에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각양각색의 십자가가 진열된 전시관에 갔다.
“이 중 하나를 지고 가십시오.” 천사의 말에 그는 ‘가장 가벼워보이고 편해보이는’ 십자가 하나를 골라 짊어졌다.
그러나 보기와는 딴판으로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다른 걸로 바꾸면 안될까요?”
그가 사정하자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그는 더 간편해보이는 십자가를 골랐다.
그러나 두번째 십자가는 더욱 힘들었다. 그는 다시 간청했고 천사가 허락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그는 다시 바꾸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그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제발 바꿔주세요”라며
애원하고 최후의 선택을 했다. 그러자 그 십자가를 본 천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국 처음에 택한 십자가를 지셨네요. 이제는 바꾸지 않겠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 십자가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각 사람에게 맞는 적당한
십자가를 정해두고 계십니다. 이미 져야될 십자가는 정해져 있고 누가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이라는 것은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사단은 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평안하고 안일하고 재미있게 놀기 좋은 세상 유흥 놀이시설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게 하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고난을 더 이상 연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기에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함과 만족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벗어놓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등에 맵시다.
잃어버린 십자가를 되찾아야 합니다. 천국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천국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폴란드의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도록 지시를 내렸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다.
그런데 가르볼린 지역의 학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열렬한 공산당원은 법은 법이라며,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 버렸다.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다.
공산당원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 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에 들어갔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다.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해
폴란드 교회 성직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 즐거운 교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 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돈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지폐로 가득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가 섞인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그러다가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보이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긴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르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신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즐거워하신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우신 ‘즐거운 교환의 장터’이다.
▣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이전에 봤던 한 영화가 생각난다. 한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산 속으로 도망간다.
적들이 사냥개를 몰고 피 냄새를 맡으며 쫓아간다. 사냥개들은 점점 그에게 가까이 온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그는 한참을 도망가다 강을 발견한다.
그리고 강에 몸을 담그자 집요하게 따라오던 사냥개의 추적이 멈췄다.
사냥개들이 피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문제를 집요하게 고소하는 사냥개와 같은 사탄의 소리를 잠재운다.
십자가는 큰 은혜의 강이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누구라도,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받는다.
등산을 하다 갑자기 산불이 나서 불길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내 주위에 맞불을 지르면 된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장소에 서 있으면 불길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다.
내가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면 된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나는 사랑한다. 이 놀라운 십자가에 나는 감격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김원태 목사
▣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
어떤 사람이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닌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입니까?
▣ 죽으심의 대가
본문: 요한복음 3장 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은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바글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범일동 매축지 근처에 살았는데 부산 항구에서 화차가 석탄을 잔뜩 싣고 범일동 매축지까지 와서 기관차를
바꿉니다. 그 시간이 10분내지 한 15분쯤 걸립니다.
그동안 피난민들은 개미떼같이 그 화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립니다.
그래서 그 석탄을 각각 그릇에 담고 혹은 보퉁이에 담아서 연료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생사를 걸어놓고 서부활극처럼 차위에 올라가 석탄을 끌어내리면
군인들은 연방 그들을 밀어냅니다. 그 석탄은 훔쳐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옆에 서 있었는데 한 40대 남자와 한 10살쯤 되는 아들이 그 석탄을 모으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들은 올라가서 석탄을 퍼내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그러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다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기어서
그 열차 밑에 들어가서 그 석탄 덩어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찰나에 덜커덩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쏜살같이 아버지가 뛰어 들더니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열차 바퀴가 아버지의 허리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서 항상 잊혀지지 않습니다.
▣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 십자가 정신
핀란드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왕에게는 한 가지 말못할 고민이 있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것이다.
왕은 왕업을 이을 사윗감을 찾는다는 방을 붙였다.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단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시험을 통과한 10명에게 왕이 말했다.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무를 일주일 이내에 구해오너라” 일주일 후,
청년들은 저마다 웅장하고 괴상한 나무를 가져왔다.
그런데 존 페로라는 청년은 왕 앞에 십자가를 내밀었다.
“폐하, 십자가의 세로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지요.
가로막대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왕은 존 페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십자가정신’을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 피묻은 십자가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불꺼진 십자가와 피 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이다.도시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 도
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될 것이다.고난주간에 즈음하여 십자가가 더욱 그리워진다.
▣ 십자가에 관한 성경 말씀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2)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눅23:26)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6)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 십자가에 관한 금언
예수의 십자가는 세계 역사의 중심이다.(루사후오도)
십자가는 천국 문턱에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높으며 유일한 사다리다.(죠지 다나 보드맨)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져라. 그리하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토마스 아 켐퍼스)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겜비스)
십자가 없는 신앙은 결빙되리라(루사오 오도)
십자가 없는 종교는 헛것이다.(롱손)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마르틴 루터)
십자가는 끌고 가는 것보다 지는 것이 가볍다(오우구스)
십자가의 신학은 빛의 신학이다.(마르틴 루터)
아! 희생의 사랑 없이 어찌 십자가의 섭리가 이뤄질 수 있을까.(성 어거스틴)
중생한 성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난자이다.(제임스 클럭 막스웰)
예수를 아주 없애버리려던 십자가는 도리어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는 자석이 되었다.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 지는 자에게는 너무 무거워 지기 힘이 드나,
기쁜 마음과 신앙으로 지는 자에게는 매우 가볍다.(사무엘 루터포드)
십자가는 호도와 같다.
십자가의 거죽은 못이 가득한 듯 하나 그 속에는 큰 축복이 숨어 있다
십자가와 감사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한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시골 교회의 발전과정을 보면서 나는 가끔 요즈음의 교회
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전쟁을 어수선하던
때이고, 교회를 세운 주역들도 전쟁통에 피난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의 처
지와 교회의 모습은 서로 비슷했다. 그때에 그 교회는 찬송 곡조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전도사님이 시무했다. 그의 설교는 자장가와 비슷했고 설교의
격식도, 내용도 빈약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교회의 능력이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
인들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십자가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토담
초가집에 멍석을 깐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40년
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세우고,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가 있고, 그 교회에 출석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그 때의 힘이
없다. 그때의 능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입은 성공 사례와 교회의 부흥
과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소리는 죽었고 그들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나는 텅빈 예배당 구석에 앉아서 하나의 대답을 얻었다. 그
들은 이제 유대인의 종교성도 찾았고, 헬라인의 지혜도 찾았으나, 그 대신
'오직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알기로 하던 그 신앙'을 잃었다
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은 이제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와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잘난 교인들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었
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잃어 가는 어리석은 한국 교회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
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만
을 외치는 교회로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목수의 십자가
어느 목수의 십자가 독실하게 예수를 잘 믿는 어떤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으로만 구원 받기에는 무엇인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확실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그위에 나의 공로와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에베소서 2장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신 말씀을 제시하며 설명해 주어도 어쩐지 믿음으로만 구원받기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출입문짝을 그 목수에게 맞추었습니다. 목수는 하나님의 집에서 쓸 성물이라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문이 다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목수를 찾아갔습니다. 완성된 문짝을 한참 바라본 목사님은 목수의 솜씨를 칭찬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문작 위에다 사과 궤짝을 덧붙여 못을 잘 박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수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잘 만들어 드렸는데 문짝에다 왜 사과 궤짝 나무판을 붙인단 말입니까?" 이때 목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더하거나 감하여도 안됩니다.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내게 맞는 십자가
상점을 경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상점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십자가를 골라 보아라.”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골랐습니다. 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금십자가였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다른 것은 가볍기는 한데 표면이 매우 거칠어서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고르던 끝에 그는 방구석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부터 지고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작은 부스러기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붉은 십자가 외에는
에드워드 하이머씨는 유명한 조각가인 동시에 알프스 산의 등반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마티호온이란 험한 정상을 오르지 못해 늘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이태리 등반대들과 함께 그 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등반대는 네 명의 등반가와 세 명의 안내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정대로 모든 것 이 잘되어 그들은 드디어 그 정상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하이머 씨는 그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밧줄을 타고 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두의 안내자가 먼저 밧줄을 몸에 감고 발 디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던 한 등반가가 비명을 지르며 선두 안내자에게로 덮쳐 내렸습니다. 이에 놀란 그 뒤의 두 등반가도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산장에 남아있던 두 안내자와 하이머씨는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다시 중심을 잡도록 밧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밧줄이 힘없이 끊어지면서 네 사람은 4천 피트나 되는 빙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붉은 줄이 들어간 규격품의 알프스 클럽의 밧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무서운 사고를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도 다른 대용품이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밧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끊어져 버림으로 구원을 잃게 합니다. 당신은 붉은 줄을 섞어 만든 밧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줄로 말미암아 분명히 거듭나야 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날마다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비행기 사고와 십자가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다.사고현장 가까이에
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
는 것이다.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불꺼진 십자가와 피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다.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이다.도시마
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도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
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
게 될 것이다.고난주간에 즈음하여 십자가가 더욱 그리워진다.
십자가 위의 비둘기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목회자의 경험담이다.
어느날 밤 오십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성령의 은혜를 받기 위해 단순하게 춧점을 맞추어 함십기도로 집중해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몇 시간인가가 흐르고 새벽무렵이 되었을 때 목사가 일어나 찬송을 시작하려는데 난데없이 강당 중앙의 십자가에 한 마리의 흰 비둘기가 날아와 앉았다.
의아한 목사가 이 비둘기가 웬 것이냐고 물었고 한 성도가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니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모였던 다른 성도들도 입을 모아 "아멘!"하였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기쁨으로 들뜨게 되었고 목사 자신도 더 생각할 겨를없이 스스로 신령한 목사가 된 듯하고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얼마전 중이 되겠다고 머리를 깎았던 한 청년이 일어서더니 "내가 집에서 갖고 와서 예배당에 날렸던 비둘기입니다."라고 하더니 다시 비둘기를 붙잡아 들고는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그 청년이 속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속아 하나님과는 별개로 그날 밤을 기쁨에 젖어 보냄을 성도들은 서로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그 자리는 한참동안 어색한 채 지나갔다.
십자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명저[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 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십자가의 고통을 좇을 것이니라"
일본의 기무라라는 목사가 예수가 당한 그 고난을 보다 잘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그런 경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교인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못과 망치를 준비해 놓고 기도를 하는 중에, 어느교인이 그것을 치워버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외에도 예수의 고난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다. 어느 서양 청년은 실제 손에 못을 박고 매달려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무모한 짓이다.
손바닥에 못을 한번 박아 보고 또 매달려 본다고 해서 그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알 수 있겠는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다리
히 10:20; 골 1:20; 시 34:1; 갈 6:10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 살고있는 루이스는 어느 날 근처의 얼어붙은 호수를 어린 동생과 가로질러 가다가 얼음이 갈라져 틈이 생긴 곳에 이르렀다. 그 틈은 어린 동생이 건널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루이스는 자신의 몸을 엎드려 다리를 만들었다.
어린 동생은 루이스의 몸 위를 걸어 그 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곤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의 다리가 되기를 요구받으면, "이것은 사랑의 행위지만 너무나 지독한 요구다."라고 항변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넘을수 없는 틈을 다리를 놓놓고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십자가 다리처럼 커다란 희생은 할 수 없어도 수시로 작은 손길, 작은 다리를 필요로 하는 곳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다리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십자가 사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주 최대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러브 스토리 (love story)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 성서는 사랑의 편지, 성령은 사랑의 영,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속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다.
성도의 기도란 사랑의 밀어, 전도는 사랑의 전달, 사랑의 중매, 찬송은 사랑의 노래,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 예수가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십자가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이 땅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니고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읍니다.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자기 자신을 숨기시거나 저들에게서 위로를 거두어 가시면 그들은 곧장 불평을 말하거나 낙담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특별한 민족이나 위안을 위하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마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최상의 위로와 기쁨을 누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그들에게 위로를 전혀 내려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주님을 찬양하고 언제나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속의보화
여러 해 동안 늙고 병든 부인을 신실하게 정성껏 돌봐준 간호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호하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부인의 모든 재산은 그 부인의 유언대로 아주 먼 친척에게까지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원의 희생적인 봉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간호원은 다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은 노부인이 남긴 크고 검은 나무 십자가를 전해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간호원은 실망해서 그 십자가를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았습니다. 그것은 별로 귀한 나무로 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집안을 청소하던 중에 그녀는 그 나무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그 십자가를 주워들고 과거를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그녀는 그것에 열쇠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열고 닫게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노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왜 자기에게 작은 열쇠를 주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열쇠는 너무 작아서 맞는 자물쇠가 없었습니다. 그 간호원은 열쇠를 찾아서 십자가의 열쇠구멍에 맞춰보니 놀랍게도 꼭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크고 검은 나무 십자가는 열려졌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석들은 이미 법적으로 그녀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녀는 자기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십자가가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검고 추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심한 중병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등이 그러한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또는 가정의 문제나 직장에서의 갈등.
우리를 언짢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동료들이 검고 추한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에는 보배들이 숨겨져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제목: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여기에는 고통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십자가의 참뜻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형국의 고통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그분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이 십자가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
십자가에못박히는것
고 A.W.토저 박사에 의하면 한 젊은 신자가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으로 오래 믿은 신자에게 접근하였다. 그 성숙한 신자는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세가지를 뜻한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둘째, 그는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세째, 그는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첫째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한꺼번에 두가지 방향을 대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두마음이다. 그들은 천국엘 가기 원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롯의 부인과 같다. 그들은 한 길을 달리고 있으나 또 다른 것도 바라보고 있다. 둘째로. 못박힌 자들은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그에게 끝이다. 커텐은 드리워졌다. 드라마는 끝났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종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그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셋째로 못박힌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없다. 그는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차를 꿈꾸지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끝낸 것이다. 그의 쇠사슬은 모두 끊어졌고 그 매력도 다 가버렸다. 이러한 세가지 면에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십자가의 능력
검투사 시합을 보려고 콜로세움으로 몰려가는 군중들을 보기 위해 어느 날로마에 도착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텔레마쿠스?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날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는 무리에 휩쓸려 떠밀려갔습니다. 그는 두 명의 검투사가 한 사람이 죽기까지 싸우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두 사람이 더 나왔습니다. 텔레마쿠스의 영혼은 혐오감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경기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멈추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군중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검투사들은 그를 옆으로 밀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끼어들어서 그만두라고 애원했습니다. 군중들은 화가 나서 검투사들에게 그를 찔러 버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검 하나가 번쩍이더니 무방비상태인 텔레마쿠스는 운동장에 쓰러지고 경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의 피가 주변의 땅을 물들이자 콜로세움의 맨 꼭대기 층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떠나가서 마침내는 그 큰 콜로세움이 텅비어 버렸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경기장에서는 한 번도 다른 검투사 시합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텔마쿠스가 죽었던 자리에는 이런 말이 쓰여진 십자가가 하나 서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영혼속에 온 세상의 소망이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상실하는..
내가 알고 있는 시골 교회의 발전 과정을 보면서 나는 가끔 요즈음의 교회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전쟁으로 어수선하던 때이고. 교회를 세운 주역들도 전쟁통에 피난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와 교회의 모습은 서로 비슷했다. 모든 개척 교회가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만 교회도 초가집 마루방을 빌어서 시작하였다가 버려진 땅을 다듬어서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때에 그 교회는 찬송 곡조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전도사님이 시무했다. 그의 설교는 자장가와 비슷했고 설교의 격식도. 내용도 빈약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교회의 능력이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인들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십자가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토담 초가집에 멍석을 깐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세우고.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가 있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그때의 힘이 없다. 그때의 능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입은 성공 사례와 교회의 부흥과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소리는 죽었고 그들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나는 텅빈 예배당 구석에 앉아서 하나의 대답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유대인의 종교성도 찾았고. 헬라인의 지혜도 찾았으나. 그 대신 .오직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알기로 하던 그 신앙.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은 이제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와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잘난 교인들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십자가를 잃어가는 한국 교회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만을 외치는 교회로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십자가의다리
여러 차례의 강도 상해죄를 저지른 두명의 범죄자들이 한 은둔자의 도움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그 두사람은 은둔자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어떻게 삶을 살면 좋을 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은둔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할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십자가의 무게가 대단했지만, 아직 그 정도를 짊어질 힘은 충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어깨가 붓고 저려왔다.
두 사람은 십자가를 변형시킬 생각을 해냈다. 그들은 어느 마을 목공소로 들어갔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쪽을 잘라냈다.
"자 이제 훨씬 짧아졌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십자가지."
또 한 사람은 십자가의 두께를 반으로 쪼개어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더니 그 중에 하나는 바닥에 내려 버렸다.
"자, 이제 훨씬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엄연한 십자가지."
두 사람은 이제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먹을 것조차 찾기 힘든 사막 지역에 들어서자, 사정은 또 다시 악화되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도시를 발견하고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앞에 깊은 골이 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널 만한 다리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한 사람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리 십자가로 임시 다리를 놓읍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한사람의 십자가는 길이는 맞았지만 두께가 너무 얇아 약했다. 그래서 그 두사람은 그 자리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우리도 가끔 우리의 십자가를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가볍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제목: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는 것
30년 동안 연극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형적인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 옮기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에 접근하여 남편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그 십자가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그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그에게“이것은 연극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주님과 교회에서도 그와 같습니다. 내가 그러한 일에 아무런 값도 치루지 않는다면, 내가 피와 땀과 수고와 고통을 그 일에 쏟지 않는 다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염두에 두어야 할 희생이며 값입니다. 그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과 하나님의 손에 먼지와 재로 돌아올 것입니다.
십자가의삶
가가와 도요히꼬가 어느 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설교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오는데 두 학생이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나는가가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상 오늘 그분의 말을 듣고 좀실망했어. 별로 말을 하지 않더군.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보니 성경을 눈앞에 바짝 대고 겨우 읽더군.” 이 말을 들은 다른 학생이 말하였습니다.“자네는 그가 왜 성경을 그처럼 눈에 바짝 대고 읽는지 아나? 몇 년전 그가 고베의 빈민굴에서 살 때 한 거지가 그에게 하룻밤 잘 곳을 청했지. 가가와는 그 거지를 자기 오두막에 데려와 함께 자다가 그 거지가 갖고 있던 트라코마라는 눈병에 전염된 거야. 이 병 때문에 그는 거의 소경이 될 뻔했지. 그리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는 별로 많은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가가와는 고아였습니다. 그가 폐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진실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한 명상」이라는 책을 쓰면서 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된다”고 가가와는 말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삶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바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표준
잠 22:2; 룻 3:10; 시 49:2; 계 13:16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룻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22:2).
이 성경의 진리는 어느 날 워싱턴 D.C.의 갈보리 침례교회에서 새교인을 받아들인 일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설명된다. 그 교회의 담임자인 그린 목사는 어느 주일아침예배 때 귀족이며 고위 법관인 찰스 에반스 휴즈와 함께 중국인 한 사람과 세탁부로 일하는 여자 한 사람을 새 교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기 앞에 어색하게 서있는 그들을 보고 그린 목사가 말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맨 밑의 땅이 언제나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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