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0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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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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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A_xz8K-T78 (김도훈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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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와 우상숭배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바알 예언자들의 무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헛된 신을 믿고, 그 신을 불러내느라 안간힘을 다하며 쌩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가련함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번제물로 준비한 황소 앞에 조잡한 제단을 쌓습니다.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목청이 터져라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응답도 없자 바알 예언자들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끔찍하고 기괴합니다.
다들 다리가 성한 예언자들이었는데, 일부러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 주변을 돌았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바알 신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무튼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멀쩡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칼과 창으로 찔러댔습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바알 신을 불러내느라 생쑈를 다하는 예언자들이 모습이 가련하기까지 합니다.
바알 예언자들의 기괴하고 유치한 행동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 역시 입으로는 유일무이하신 하느님, 천주의 창조주, 절대자이신 하느님만 흠숭한다면서 실제로는 다양한 잡신과 우상에 빠지고, 그에 의지해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물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잡신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길일이요 매일이 축복과 구원의 날입니다. 따라서 아무 날이나 이사를 가도 되는데, 굳이 거금을 주고 이삿날을 정하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머무는 그곳이 하느님의 성전이요 명당입니다.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님 모실 명당을 찾아서 전국 산천을 돌아다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며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가에 따라 우리 미래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자녀가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어야 하는지 점집을 찾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은 이제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손길 안에 온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당신 따뜻한 품에 꼭 안고 계십니다.
따라서 남아있는 분들이 고인들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채 못 다한 사랑의 실천을 대신 채워드리는 것, 그것이 고인을 향한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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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TQ7vP1KD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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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라
1932년 LA 올림픽 때 이반 펠레 선수는 뜀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저건 나도 하겠다.’라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의 양학선 선수의 모습을 보면 가히 신기할 정도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반 펠레 선수는 연습을 게을리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해 올림픽 2관왕이었습니다.
1908년에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공중 2회전이 금지되었습니다. 너무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10살만 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시에는 그런 기술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못 한다고 믿으면 못 하고 한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만들어준 분에게서 옵니다. 이 지상에서 나를 만들어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기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우리를 향한 꿈을 꾸고 계십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피카소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군인이라면 장군이 될 것이다. 사제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나는 화가이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피카소가 무엇일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명품이 될 것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 부모님의 믿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기대라고 하면 어떤 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계명’, 곧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가 목적이 아닙니다. 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라서 내려주시는 규정들입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새의 발만 수천 번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수천 번의 그림을 통해 새의 발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새의 발만 봐도 그 특징을 잡아내어 바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주시는 지시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넘어진 숫자보다 걸은 숫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는 부모는 자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효도하고 싶다면 더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불완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호락호락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최고의 작품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면 최고의 걸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세리 선수를 쫓아다니던 아버지는 박세리 선수가 그냥저냥 한 선수가 되기를 바랐을까요? 김연아 선수를 쫓아다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고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일점일획도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작품이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모습이 되어가려는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창의력’입니다.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 연주자는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습니다. 공연장의 소리로만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이 듣는 것만이 아니라 행위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장에 존재하는 모든 소음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음악가입니다. 음악가가 이런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은 최고라는 자존감입니다. 이미 최고이고 최고가 될 것이기에 자기 스스로 모든 과정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최고를 만듭니다.
모든 자수 성공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렇게 성공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 두려움 없는 용기가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고 실제로 그들을 최고로 올려놓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가 한창 포항제철을 밀어주고 있을 때 그 철을 이용해 커다란 배를 만들어 팔면 이윤이 많이 남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기술, 돈, 수요였습니다. 배를 만들 기술도 없었고 조선소를 지을 돈도 없었으며 당연히 배를 사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루어 냈습니다. 우선 기술부터 자문받아야 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영국의 조선 기술 기업 ‘애플도어’의 회장이었습니다. 이제 기술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애플도어 회장은 ‘버클레이 은행’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정 회장은 조선소를 지을 백사장이 찍힌 사진만 들고 무작정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정 회장은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1,500년도부터 이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800년도부터지만 우리가 쇄국정책을 해서 그렇지 그 기술은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버클레이 은행 사장은 웃으며 추천서를 써 줍니다.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우선 돈을 빌려줄 때 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출보증기구에서는 조선소를 지어도 배를 살 사람이 없으면 차관을 갚을 수가 없으니 수주계약을 먼저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정 회장은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인 말이어서 조선소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을 들고 배를 살 사람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처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 해운업자 선박왕의 처남 ‘리바노스’였습니다. 그는 26만 톤 두 척을 현대에 주문했습니다. 이 주문서를 수출보증기구에 알렸고 차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돈과 기술력으로 5년 뒤에 전달할 선박을 2년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기업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했고 그 창의성이 결국 성공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유일의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뜻, 곧 계명만 잘 따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꾸시는 꿈을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참 효도의 길은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기를 바라는 이의 율법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결심이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믿는 대로 되는 과정에 창의력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같은 기대를 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빗자루질하더라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처럼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계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빗자루질하던, 요리하던, 봉사하던 그곳에서 최고가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미 그러한 결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에 보답하는 일은 그분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아주 작은 그분의 계명까지 꼭 지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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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계명도 하늘나라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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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셨을 때, 그 일을 ‘하느님의 기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죄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이 유대교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율법을 세우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율법과 예언서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들, 계명들, 율법들을 뜻합니다.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에서 ‘완성’은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계명들과 율법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어서, 완전하게 실천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안 오셨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3-37)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의 ‘율법 실천’을 완성해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율법 실천의 완성’은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죄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그런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의 본래의 정신을 깨닫고,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한 자 한 획도’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에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도 없고, 불완전한 부분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폐지되거나 변경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구약 율법을 폐지하신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을 폐지하신 일이(마르 7,19) 좋은 예입니다. 원래 구약시대의 음식에 관한 규정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한 세부 실천 지침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상위법인 하느님 계명의 실천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위법인 실천 지침을 폐지하셨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규정만 남기고 유대인들의 관습들과 세부 실천 지침들을 모두, 특히 할례를 폐지했습니다.(사도 15,29)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들을 폐지하거나 개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변경한 일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마르 2,28)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계명 실천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말씀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계명들과 율법들이 없는 나라인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사람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고 섬기기 때문에(묵시 22,3-4) 그 나라에는 성전이 없습니다.(묵시 21,22) 성전이 없다는 것은 종교 제도가 없다는 뜻이고, 다른 것들도 모두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폐지가 아니라, 종교의 완성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계명들을 크고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크고 작은 것 없이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큰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서는 전부 다 큰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는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이들, 종교 지도자들, 사제들, 교사들을 뜻합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그들의 죄는 더 큰 죄가 됩니다. 잘못 가르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대단히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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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06년입니다. 당시 캐나다에서 영화 ‘300’을 보았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가 수백만의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용맹한 군사가 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페르시아 군이 들어오려는 길목을 장악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여러 번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 스파르타 군의 용맹함에 고무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싸움은 숫자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잘 훈련된 군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군사를 하나로 묶어줄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수나라의 군대를 맞이해서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화해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수나라는 자신들의 수와 힘을 믿고 계속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적은 군사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강을 둑으로 만든 뒤 수나라 군대가 강으로 들어오면 둑을 열어서 공격하는 수공을 펼쳤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입니다. 맞습니다. 싸움은 숫자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 예언자만 남았습니다. 바알에는 450명이 넘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누구의 신이 강한지 증명하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도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께서 먼저 제단을 불사르고 제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450명이라는 숫자를 믿고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를 돌면서 바알의 신에게 청하였지만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가득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친 황소를 제물로 받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이었습니다.
202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러시아는 엄청난 군사와 화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3일이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5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인과 국민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서 군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를 도와줄 그리스 연합군이 있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에게는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려는 이웃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들은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이번 전쟁의 부당함을 이야기하였고, 평화적으로 전쟁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이미 세상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 있는 강자가 약한 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전쟁도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본당 사목도 비슷합니다. 신자 수가 많고, 공동체의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성당도 있습니다. 본당신부와 보좌신부가 있어서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사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사 시간을 정하는 것도, 친교를 나누는 것도 미국 본당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신자 수가 적기에 사제를 모시는 것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사랑이 넘치는, 친교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매주 친교를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장례가 나면 모두가 와서 연도를 합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모두가 빠지지 않고 전례에 참석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에 대한 열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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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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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정한 율법완성의 길>
율법은 무엇이며, 예언서는 무엇인가? 구약의 백성들과 그들의 역사에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율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이며,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예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의지의 일관된 표현이며, 예수의 도래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대에도 구약에서와 똑같은 효력을 지닐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율법과 예언서는 절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선포하시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방법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 계명이 사람에 의해 준수되어야 하고 나아가 사람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계명은 진정 성취된다.
마태오복음서에서 서술상 아직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히 유대교의 율법과 규정을 어기신다. 몇 번은 예수의 제자들이 어기기도 했지만 이 잘못 또한 당연히 스승인 예수께 돌아가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죽을 위험에 처하지 않은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는 등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을 자주 하셨고, 정결규정도 가볍게 여기셨다.(마태 12,1-8.10-14; 15,1-2)
또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하느님만이 가지시는 죄사함의 권한을 침해하셨다.(마태 9,2-6)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율법체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으며, 천지가 사라져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선 예수의 율법과 율법학자들의 율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오경"과 그 안에 세워진 "십계명"을 가장 중요한 율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준수할 방법을 제시하는 "구전(口傳) 율법"도 율법의 범주에 포함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구전 율법은 율법과 전통에 관한 율사들의 구전해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런 해설을 집대성한 "탈무드"의 "미슈나"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미슈나 샤바트"(안식일법 규정)에는 39개의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목록이 적혀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율사들은 365개의 금령(禁令)과 248개의 행령(行令) 등 613개의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하였다. 이들 중 하나라도 어기면 곧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이렇게 율법학자들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을 구체적으로 해설한 규정과 세칙의 준수를 율법의 완성으로 보았다.
반면에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율법은 율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율사들은 가장 중요한 십계명을 자기들 고유의 정신으로 해석하여 하향적으로 세칙을 정하고, 이 세칙의 준수를 율법의 완성으로 보았다면,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세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신을 상향적으로 조명하여 원초적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신 것이다. 이렇게 율법에 대한 예수와 율사의 관점은 정반대로 향한다고 하겠다.
이로써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확실하다. 그분은 율법 하나하나와 그 일점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이나 일 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폐기하기도 하실 것이다.
산상설교의 권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제자들더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5,13-16) 예수께서 오늘은 진정한 율법완성의 길을 보여주셨다.
이제 이 방법으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새로운 대명제를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살게 될 시민이 가져야 할 자격으로 선포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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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율법의 완성>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보면 예수님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 씻는 규정이라든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 주는 것 등 사실상 율법의 파괴자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서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일 획, 일 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폐하려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려는 율법은 무엇이고, 예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그토록 책망하시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한 율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똑같은 한 종류의 율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말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십계명을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함.
2) 구약성서의 첫 번째 5권, 즉 모세 5경의 말씀들을 말함.
3) "모든 성서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율법과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함.
4) 구전 율법이라고 해서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의미하기도 함.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성서 그 자체라든가, 십계명 그 자체에는 규례와 규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으며, 크고 넓은 원칙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모든 일에 적용하기 위하여 수천 개의 규정과 규칙을 만들어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사소한 규정과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삶과 죽음이 달린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라고 간주했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그들의 말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이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 전체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 전반에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시거나 폐기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유다교의 613가지에 이르는 계율들을 : - 원수 사랑 (마태, 5, 43-48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과 - 황금률 (마태 7, 12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 22, 37-40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이렇게 환원시키어 단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풀이하신 율법(계율)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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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금표 알비노 신부님]
<율법의 정신>
오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율법을 폐기하면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히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율법의 자구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다교의 잡다한 계율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환원시킴으로 율법을 단순화시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성해야 할 율법과 예수님이 비판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후자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생각하던 율법입니다. 그들은 사소한 규칙 등을 율법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것의 모든 내용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맹목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비판한 율법은 바로 이러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율법입니다. 여기에 비해 예수님의 율법은 규정과 문자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정신입니다. 이러한 율법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지켜지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법대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이죠!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법의 정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얽매이거나 아니면 법을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챙기려는 인간의 영악함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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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사랑하라>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다만 사랑하라>
다만 사랑하라
스스로를
벗들을
모든 이를
다만 사랑하라
더 깊게
더 넓게
더 오롯하게
다만 사랑하라
까닭 없어도
아낌없이
주저하지 말고
다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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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 하나 정리를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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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과 양다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위해 메시아(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었던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성의 의미'는,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인 '사랑'이요, '모두의 구원'입니다. 법의 잣대로 너와 나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지키는 이와 지키지 않는 이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이 완성을 위해 땀 흘리셨고, 마침내 십자가 수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18,21)
하느님과 바알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가, 바알 신의 예언자들 사백오십 명과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너는 왜, 나처럼 율법의 완성을 위해, 땀 흘리지 않느냐?'
'너는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이냐?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요,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던지는 물음이라고 묵상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 가치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서 양다리를 걸치라고 유혹할 것 같습니다. 이 유혹을 성령의 힘으로 물리치고, 율법의 완성을 위해 더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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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가 되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선배 신부님께서 저를 자기 본당에서 특강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담되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합니까?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당시에는 만만한 후배라고 부려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초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진짜로 저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을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 공부가 됩니다. 저 역시 많은 강의를 통해 제 생각들을 정리하고 제 안에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었던 울렁증 같은 증세도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계속 똑같은 강의를 할 수 없으니, 쉬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만해서 부려 먹은 것이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 주신 귀한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로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해주셨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지요.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셔서 진정한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율법은 그 모든 권위를 계속해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우리는 모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은 율법은 주님의 권위를 받아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만약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안식일만 강조할 것이고 겉으로 보여주는 예식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새로운 모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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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시편16,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바로 마음에 와닿은 시편 화답송 두 구절입니다. 이래야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제가 강론시 가장 애용했던 말마디는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고 우리 수도자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살아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비단 수도자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전사이고,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교회의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전우애戰友愛와 학우애學友愛, 형제애兄弟愛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해왔습니다.
바로 주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엘리야 예언자로, 구약의 에녹,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인물로 꼽히는 분입니다. 오늘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참으로 사느냐 죽느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회전大會戰입니다.
주님의 전사이자 예언자인 엘리야 1명과 바알 예언자들 450명의 대결입니다. 1:450이니 분위기로 보면 바알 예언자들이 엘리야 예언자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전혀 주눅든 기색이 없고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러나 백성은 눈치를 보노라 묵묵부답,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세상과 하느님께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참으로 약하나 영악하고 무지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온갖 노력을 다해도 바알의 반응이 없자 이들 바알 예언자들을 놀리는 여유만만의 엘리야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이어 등장하는 주님의 전사,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엘리야의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기도는 이렇게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정말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입니다. 문득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조치훈이, 목숨을 걸고 축구를 한다는 박지성이, 목숨을 걸고 책을 만든다는 박국용 미카엘 출판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 출판인이 급기야 생각해낸 제 졸저 제목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였습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온힘을 다해 영적전투에 임하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래야 영육의 건강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마침내 하느님의 통쾌한 승리의 응답에 감복感服한 백성들의 고백입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 전투였지만 계속 이어질 엘리야 예언자의 평생전투입니다. 역시 죽어야 끝나는 우리의 영적전쟁입니다.
엘리야에 버금가는, 아니 엘리야를 훌쩍 뛰어넘는 주님의 전사가, 하늘나라의 전사, 사랑의 전사가 바로 오늘 복음의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역시 엘리야처럼 승천하심으로 빛나는 승리의 전사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이 사랑의 정신이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에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율법은 물론 계명과 말씀들을 사랑하고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단호한 율법 사랑인지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단호하고 엄중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율법사랑을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전율戰慄케 합니다. 참으로 어느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만이 어느 율법도 소홀함이 없이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수록 율법의 정신에 정통함으로 모든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마태복음의 여섯 대당명제를 통해 업그레이드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입증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사랑할 때 율법의 사랑 정신이 한눈에 보이고, 분별의 지혜도 생겨 율법의 사랑 정신 따라 사랑을 살게 되니 말 그대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일들은 모두가 무죄이며 율법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경지를 드러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명언이 생각납니다. 공자의 나이 70 종심從心에 이르렀을 때,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라는 고백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나이 70을 넘으면 삶자체가 사랑이라 하는 모든 일이 사랑의 법도, 사랑의 율법, 사랑의 계명에 벗어나지 않았다는 대자유인의 고백인데, 70을 훌쩍 뛰어 넘은 제 자신을 부끄러이 뒤돌아 보게 하는 공자의 고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는 사랑의 전사입니다. 삶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서 죽을 때까지 사랑을 배워야 하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학생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평생 전사, 사랑의 평생 학인입니다.
지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때 교황님은 깊고 감동적인 강론을 해주셨는데 주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령의 학교에 앉읍시다(Let us sit at the school of the Holy Spirit)”, ‘성령의 학교’란 말마디가 참신했습니다. 새삼 사랑의 학교는 성령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사랑의 학교, 성령의 학교에서 주님께 예수성심의 사랑을 배우고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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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4TEaLulo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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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적극적인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생명이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활의 길이
올바르면
우리들 삶도
올바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올바른 생활의
질서는 모순된
우리의 삶까지
치유한다.
사랑이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아프게
진단하신다.
자발적인 참여와
올바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의
성숙으로
사랑을
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삶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꼭 필요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정신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계명의
깨어있는 삶이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 여정도
중요하다.
율법과 예언서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을
사랑으로
들어 높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은
생활의 질서가
필요하다.
공동체는
이 사랑의 생명이
모여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생활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통해
인격을 폐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시는
분임을
깨닫게된다.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정신이다.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다.
완성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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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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