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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일본 쇼와 시대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었던 당시 만 18세의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자살한 사건.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낮다.
이후 이 사건을 모방하는 식의 자살 사건이 빈번해져서, 일본 언론사는 오카다 유키코의 애칭인 윳코를 붙여 "윳코 신드롬" (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자살 직후의 영상에서 거적이 덮힌 유키코의 사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오고 있다.
자살 현장에서 바로 생방송을 진행한 것을 보면 그녀가 떨어지기 전부터 방송사들이 그녀의 자살을 중계하기 위해 얼마나 준비를 꼼꼼하게 했었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의 일본은 옐로저널리즘이 극에 다다른 상태였고 특종을 위해서라면 취재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안달나 있었기 때문에 방송의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1944~2010)의 무리한 취재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정황
2.1. 사건 직전의 상황
1986년 4월 4일, 사망 나흘 전엔 소속사 선배인 하야미 유, 남성 아이돌 시부가키대와 함께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 라는 일반 어린이들이 스타들에게 질문을 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활동하던 노래, 입술 Network를 부르는 그녀의 힘이 없어보이는 눈과 다크서클이 당시 그녀의 힘듦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카다 유키코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막이 송출되었다.
4월에는 12일에 열리게 될 유키코의 단독 콘서트를 위해 매일 선 뮤직 프로덕션에서 새벽 3시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4월 5일, 사망 사흘 전 인기가도를 달리던 유키코는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자택을 떠나 미나토구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사장의 자택에서 이삿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3일 후 사망 당일엔 유키코가 살고 있던 방에는 막 데뷔한 사카이 노리코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이 날 아이자와 사장은 사카이 노리코, 오카다 유키코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여서 "앞으로 네가 우리 회사를 책임질 테니까 열심히 해야 된다." 고 말하자 "저 같은 건 더 이상 안되는 걸요. 더 괜찮은 애(=사카이 노리코)가 있잖아요." 라는 어두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이 날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에 아이자와 사장의 부탁으로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에게 사인을 적어 선물로 주었다.
4월 6일, 사망 이틀 전에는 고향인 나고야에 돌아가 콘서트를 열었고 콘서트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본가에 들러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식사를 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묘하게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던 사진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고 한다.
평상시의 그녀였으면 "왜 나만 없는 거야? 힝!" 이라며 가볍게 장난섞인 짜증을 냈겠지만 이 때는 왜인지 아무 말이 없었고, 원래 자신의 무대 비디오도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 해야 하지만 아예 보지도 않고 미소도 없어서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고 유키코 사후에 어머니가 얘기했다.
그 후 당일 저녁 오후 8시 53분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해 도쿄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고 그것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 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때 유키코는 부모에게 묘한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유키코는 데뷔 3년 째에 이미 30억 엔(액수는 사후 국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루어졌다.)이라는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톱 아이돌이었는데, 고향에서 떨어져 살던 부모님을 도쿄로 오라고 한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해석된다.
당일 심야 도쿄로 돌아간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화 녹음을 마쳤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한 보고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얘기하고 있었다.
4월 7일, 사망 하루 전에는 오후 시부야 판테온에서 열린 '록키 4' 의 시사회 참석 이외에 간만에 빽빽히 들어차 있던 스케줄이 없었던 날이었다.
이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자택으로 돌아온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고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 내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후 오후 10시 경 미조구치 매니저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8일) 예정되었던 새 드라마의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음을 알렸고 그 얘길 들은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 라고 말했으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침 밝았다고 한다.
이후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마코가 오후 11시 반 경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얘기했다.
2.2. 사건 발생
4월 8일, 정오를 넘긴 12시 20분 경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구 요츠야의 자신이 소속돼있던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점심 시간이라 사람들이 가득찬 도시락 가게가 있었고, 더욱이 사망 당일 오전에 가스 중독 자살미수를 일으켰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기자들도 다수 진을 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적인 투신자살 현장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진을 치고 있던 기자 중 한 명은 검은색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해 순간 검은 물체의 쓰레기가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이내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주변의 목격자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특종을 위해 잠복해있던 한 기자는 그녀의 사진을 얻어간다.
당시, 그녀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누군지 식별을 하지 못해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가 투신한 건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카다 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2.3. 사건 직후
시신이 수습되고 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팬들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고 이윽고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날 것의 묘사와 함께 그대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은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연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 에서는 아나운서였던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사건에 대한 보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오카다가 첫 정규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의 인물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와 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 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 라며 눈물을 흘리며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 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이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루어질 정도였다.
이 후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쓰인 유서에 대한 내용이 일부 노출되어, 유서 속에 남겨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신은 이틀 뒤인 4월 10일 나카노의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뤘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데뷔곡을 시작으로 많은 작사를 해준 다케우치 마리야, 소속사 선배인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 가수 마츠다 세이코, 재일 한국인 작곡가 강진화, 그녀에게 준 곡이 작곡가로써 첫 작업이었던 코무로 테츠야, 수록곡을 함께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성만사(成満寺)로 돌아가 잠들었다.
법명은 侑楽院釈尼佳朋(유교인샤쿠니카호)로 유키코의 '유' 와 '음악'의 '악', 본명인 카요의 한자 '佳' 를 따서 만들어졌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아이돌'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하 1986년 5월 발매된 잡지 '위클리 세븐' 에서가 오카다 유키코의 영결식에서 취재한 연예계 동료들의 코멘트와 모습.
2.4. 후일담
사고가 일어난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 직후 1시간 뒤 아이자와 사장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이자 현재는 고인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 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사장은 아직도 사무실에 오카다의 사진을 걸어놓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오카다 유키코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 고 오카다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와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사망 후에는 그녀가 맡고 있거나 예정 중이었던 모든 스케줄이 중지되었다.
사건의 악영향을 우려해 사망 전날 발매한 사진집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오카다가 집필하여 실릴 예정이었던 연재 소설도 게재가 중지되었다.
4월 12일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생전 마지막 방송을 함께 한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캔슬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의 콘서트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하였다.
오사카의 콘서트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 후에도 인기의 바로미터로 불리웠던 브로마이드 포스터의 판매는 계속 되었으며 한동안 판매 인기 순위에서도 5위 이하로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이자 데뷔 이전부터 그녀를 지켜봐왔고 죽음의 모습까지 눈 앞에서 목격한 미조구치 노부로는 훗날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유키코의 시신을 수습했었던 미조구치 매니저는 유키코의 사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다가 2000년(헤이세이 12년) 7월 8일, 유키코가 생전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실 5층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고 있던 지병을 괴로워하여 목을 매어 향년 54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1986년(쇼와 61년) 5월 2일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남겨져 있다.
미조구치 매니저의 바람대로 그녀가 사망한 신주쿠 요츠야 교차로 앞에는 매년 4월 8일마다 팬들이 꽃과 그녀의 사진, 앨범 등을 가지고 나와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에 잠든 그녀의 묘에는 35년이 넘는 세월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번도 마를 날이 없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2.4.1. 공황 윳코 신드롬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은 한 연예인의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의 자살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 고 유서를 남기며 투신 자살, 같은 해 5월 5일에는 21세의 재수생이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옥상의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여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 내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을 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 이라고 불렸다.
이 문제는 연예계 외에 정치권으로도 영향을 미쳐 가이후 도시키 문부대신이 야당의 추궁을 받으며 "10대 가수의 실태를 조사하겠다" 고 밝혔다.
3. 죽음의 이유에 관한 많은 설
인기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왜 갑자기 스스로 삶을 포기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표면적으로는 "1985년 11월 초부터 86년 1월 말에 걸쳐 TBS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그에게 거절당한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 라는 소문이 죽음의 이유로 알려져 있다.
사후 나온 유키코의 어머니가 쓰신 책, ‘사랑을 주세요’ 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쓴 오카다 유키코의 직필로 '미네기시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위에 적힌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투신자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오루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오후 11시 반 이후부터 택시를 타고 미네기시 토오루가 살고있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고 하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후일 발매의 주간지에서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사건이었다." 라는 발언이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오루는 당시 유키코와 나이차가 20살 이상이었던,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투신자살 사건 발생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 (アニキ)같은 느낌이었다" 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했다.
미네기시 토오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저 유키코에게 선배로서의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오카다 유키코 사후에 그녀의 모친이 직접 엮어서 낸 출판물 '사랑을 주세요' 에서는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 라고 적어놓은 것, 후쿠다 전무와 아이자와 사장이 밝힌 유서의 내용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관계가 아닌, 플라토닉한 짝사랑이었다는 증언을 보면 그것이 더더욱 확실해진다.
지금으로선 이 이유가 거의 아주 확실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흐르기 시작했다.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으며 그의 아이를 임신까지 한 상태였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의 결혼 발표로 충격에 빠진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카다 유키코가 둘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서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를 해주는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준 '입술 Network' 를 듣고 오카다가 감격해 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는 등 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려간 루머일 뿐이다.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유키코의 사후 쓴 자서전에서도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할 정도였다.
그녀의 일기장과 유서를 갖고 있다는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사장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내용의 메세지를 전했다.
이 외에도 원래 오카다 유키코가 좋아하던 대상은 배우 타치 히로시라는 등 그녀가 성소수자였다는 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 뮤직 프로덕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 미수 때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자신의 자살 시도가 알려져서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그는 그녀가 사라졌을 당시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고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위에서 그녀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 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이 잦았다고 한다.
그녀의 자살의 원인에 대한 일각에서의 의견 중엔 평소 풍부한 감수성을 소유하고, 때묻지 않았던 순수함을 지녔던 유키코가 일본 연예계의 추악한 일면을 알게 된 이후부터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갖고 있던 꿈과 환상이 깨져 버리는 바람에, 연예계 자체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이돌을 그만두려고 하였지만, 그녀를 세이코처럼 톱 아이돌로 육성시키고 싶었던 아이자와 사장의 격한 반대로 인해 은퇴가 무산되어 버리자 절망해 투신자살을 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생전에 근면성실하며, 굉장한 노력가라고 알려진 그녀가 연예계에 대한 실망, 연애 문제 등의 사유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오히려 과도한 스케줄로 생긴 피로로 인한 우울증이 발병했고 예기치 않게 휴일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자살기도를 했다가, 사건이 너무 커지자 가족들과 소속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막대한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위에도 전술했지만, 그녀의 소속사 사장 아이자와 사장은 그녀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분홍 종이에 쓰인 그녀의 '유서' 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걸 가지고 대중들이랑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을 했으며, 결국엔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한 적은 없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이 내용들을 모른다고 한다.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리지 않는 한 그녀의 자살 원인은 밝혀질 가능성이 이제 없다고 보면 된다.
첫댓글 헐 처음 안 사건이다ㅠㅠ 너무 안타깝기도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이글 보구 나무위키까지 정독하고옴,,, 어린나이에 무슨 마음이엇을까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자아이 아니었어?
와 조팔 이게뭐여 보고 눈을의심함
슬프다…
ㅠㅠ,,,
사장존나 수상하다
질문꼬라지..
미네기시인지 나발인지 자댕이 의심스럽다
너무 안타깝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