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25.木. 새벽은 언제나 하루를 흐림으로 출발한다.
오전 11시30분이 지나면 이른 점심 손님들이 들어온다.
현관에서 홀로 들어서면 탁자 다섯 개가 벽을 따라 놓여 있고, 그 끝에는 타원형의 스시 카운터가 바로 뒤에 있는 주방과 연결된 채로 설치되어 있다. 스시 카운터 위에는 붉은 꽃이 그려진 화려한 일본식 등 두 개가 요염하게 걸려 있다. 오른쪽으로는 디귿 자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 탁자가 두 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방이 들여져 있다. 주방에서는 홀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주방에서 홀 쪽으로는 두 개의 통로가 있는데 하나는 스시 카운터와 연결된 자그마한 허리 여닫이 문이고, 또 하나는 음식을 만들어서 홀로 들이 밀어놓는 커튼이 둘러 있는 창구이다. 이 창구에 설치된 선반에 주방에서 만든 탕이나 지리 또는 구이를 그릇에 담아 올려놓으면 서빙 아줌마들이 손님의 탁자 위로 가져다 놓는다. 주방 안에서는 커튼 안쪽 홀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 선반 위에 올려놓기만 할 뿐이어서 이 음식이 몇 번 탁자 어떤 손님의 입으로 들어가는 줄은 모른다. 하지만 스시 카운터를 담당하고 있는 사장님은 바로 앞 키 큰 둥근 의자에 앉아 있는 손님과는 거의 코를 맞대고 있고, 홀과 방안의 상황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형적 요충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들이밀면 바로 주방을 볼 수 있어서 바둑으로 친다면 사귀어복통의 절대 위치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한창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저녁 식사시간에 사장님을 보면 전투에 임하고 있는 야전 사령관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는 한다.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생선회와 초밥을 만들고, 눈으로는 홀과 방안의 수요와 공급을 확인하며, 입으로는 손님과 대화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주방에 필요한 것을 요구를 하거나 재촉을 한다. 바쁠 때는 직접 음식 그릇을 들고 서빙을 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우리 식당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점심시간은 바빠 봐야 오후 2시가 넘어서면 끝난다. 대략 정리하고, 치우고, 설거지를 마치면 오후 3시 경이 되는데 이때부터는 낮잠 겸 자유시간이다. 대개는 남녀가 나뉘어 각각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한숨을 붙인다. 나는 낮잠을 즐기는 체질이 아닌지라 식당 주변의 길을 여기저기 천천히 쏘다닌다. 그러다 어느 날 방이동 백제고분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고서는 자유 시간에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고분 옆 풀밭에 신문지를 깔고 앉거나 누워서 책도 읽고, 공상도 즐기며, 시도 쓴다. 분주했던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서 앞으로 다가올 정신없을 저녁식사 시간 틈 사이에 들어 있는 이 두 시간여의 한가閑暇는 나에게 호흡과 호흡 사이를, 시간과 시간 사이를, 과거와 현재 사이를, 이완과 긴장 사이를, 암울과 희망 사이를, 고뇌와 평안 사이를, 쇠락衰落과 격정 사이를, 이성과 감성 사이를, 좌절과 분노 사이를,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질기게 이어주는 부드러운 입맞춤 같은 것이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 누군가 사랑하는 여인을 운명처럼 만나게 되 듯 처하는 상황이 바뀌면 미처 예상하지 못 했던 시간들을 운명처럼 사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의 낮잠과 바꿀 수밖에 없었던 자유시간이 그 여린 손으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잡아 일으켜 보듬어준 것이다. 나는 그녀의 품속 같은 그 두 시간을 예전에 24시간을 쓰듯 날마다 소중하게 사용해 간다.
오후 5시가 넘어서면 자던 사람들이 하품을 크게 하면서 방에서 나와 저녁식사 준비에 들어간다. 오늘 점심시간대의 손님 분위기와 함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감각에 의거한 사장님의 물량 준비 명령이 하달되면 우리 주방 팀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 식당은 주방에서 준비하는 음식과 스시 카운터에서 준비하는 음식이 구별되어 있다. 스시 카운터를 담당하는 사장님이 초밥과 김밥, 그리고 생선회를 직접 만들고, 주방에서는 서더리 탕, 알 탕 등 매운탕과 복 지리, 대구 지리 등 지리와 각종 생선 구이, 튀김, 우동과 죽을 만든다. 그 중에서도 그날 저녁식사 예상분의 탕과 지리의 재료를 미리 뚝배기에 담아 쌓아놓았다가 홀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국물만 부어 바로 가스 불 위에 올려놓는다. 특히 저녁식사 시간에는 스끼다시로 꽁치 구이 두 마리가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실팍한 꽁치를 맑은 물에 한 번 흔들어 굵은 소금을 그 위에 후두둑 뿌린 뒤 커다란 가스 구이통에 넣어 나란히 올려놓고 불을 조절해놓으면 연하게 지글지글 소리가 나면서 꽁치가 구워지는데 그 맛과 냄새가 일품이다. 안주 감으로 은행 알도 볶아놓고 쌀 과자도 튀겨낸다. 한쪽에서는 생선회 접시 바닥에 깔 무채를 썰고, 또 한 편에서는 와사비를 장에 갤 때 같이 넣어주는 무즙을 만들기 위해 무를 강판에 열심히 갈고 있다. 자, 이제는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찜통에 고루 썰어서 물에 담아놓은 채소를 물을 바꿔가며 몇 번이고 헹궈내야 한다. 찜통 저 밑바닥까지 양 손을 넣어 끌어올리듯 위로 들었다 내려 놓았다를 반복하면 잡티나 숨어 있던 이물질들이 위로 떠오르고 채소의 색깔이 싱싱하게 바뀐다. 오후6시가 지나면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3분 대기조인 전투기 파일럿 같은 심정으로 홀 쪽을 주시한다. 조그마한 허리 여닫이 문 너머로 들려오는 사장님의 “어서 옵쇼!” 하는 인사말과 함께 작전개시다. 지금부터 오후9시30분까지는 살기 위해 싸우는 전투병처럼 주방에 있는 우리는 마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 수많은 재료와 후끈한 열기와 휘몰아치는 혼돈의 질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어쩔 줄 모르는 온몸의 짜릿한 흥분이여!
내가 출근을 하고 보름쯤 되었을 때 이곳에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주방장님이 일주일 뒤에 스스로 독립을 하기 위해 식당을 그만 둔다는 말을 전한다. 잠시 머리가 띵 하고 울려오는 충격이 있다. 요즘 며칠 동안 주방장님께 튀김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리고 배워야 할 게 너무도 많이 남아 있는데 갑자기 넓은 바다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남은 기간 동안 뭐든 하나라도 더 배워놓자 생각하고 부지런히 따라 해보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머리하고 손이 따로 노는 것은 책상물림들의 영원한 고질병이다. 이론적으로는 기름의 온도 마다 다르게 튀겨야 할 튀김의 종류와 색깔의 변화에 의해 재료가 가장 잘 튀겨진 상태를 줄줄 외우면서도 실제 상황에서는 그것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설 튀겨 내거나 지나치게 튀겨 딱딱한 덩어리를 만들어내기 일쑤이다. 이런저런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가운데 몇 가지 작은 변화가 주방에 일어난다. 성격이 싹싹하고 손이 빠른 스물다섯 살짜리 부 주방장이 요즘 나에게 부쩍 친근하게 대해주는 눈치가 보인다. 몇 번인가 그런 기미는 눈치를 챘지만 은연 중 주방장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던 부 주방장에게는 주방장님의 독립 소식이 그다지 애석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경력 3년차인 이 총각 부 주방장이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요리를 할 때 보면 손이 빠르고 간을 맞추는데 탁월한 감이 있는 것 같다. 볶거나 튀길 때도 볼라치면 불을 능숙하게 다루고 칼질을 할 때도 군더더기 동작이 별로 없다. 부 주방장이 만들어내는 탕이나 나물, 구이 등 그의 손이 닿으면 확실히 음식이 입에 붙는 맛이 있다. 요즘 우리 식당에서 사용하는 국물과 소스는 거의 부 주방장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복잡한 여러 재료의 조합이 적혀 있는 수첩을 들고 틈나는 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눈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화학조미료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는 점인데 아마 부 주방장이 처음 요리를 배웠을 때의 감이 그대로 몸에 젖어 습성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부 주방장 같은 유형의 사람이 이른 바 요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여겨지는데 몇 차례인가 사장님이 부 주방장에게 칭찬 비슷한 말을 흘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네가 해놓은 음식은 뭐든 맛이 있구나!”
- 계속 -
첫댓글 긴 글 감사합니다`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_ 계 속 _ 기대 합니다...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은듯하네요
참 재미있습니다. 전투장면같은 주방의 모습이 훤~하네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계속 기다려집니다. 고맙습니다.
흥미진진합니다. 감사합니다. *^^*